183~184p.
..무료 배식을 하는 공원에 가서 니토 씨를 붙잡고 내 생각들을 얘기하고 싶지만 그녀와 만나고픈 마음은 없다. 생각이 건전한 사람과 대화하는 건 무섭다. 어쩌구 소의 사람들이 무서워 신청하러 가지 못하는 사치 씨의 기분도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다. 꾸중이나 잔소리를 듣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니토 씨 같은 사람이나 어쩌구 소의 사람과 얽히지 않고 즉석만남 카페에서 알게된 사람만 상대하다보면 이곳 생활이 우리의 ‘보통‘이 된다.

297p.
..내가 앉아 있는 동안 둘이서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뭐라도 돕는 게 좋겠지만 움직여봐야 방해만 될 것 같다. 둘은 몇 년이나 함께한 부부처럼 보인다. 부엌에서 대화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치 그들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인간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
..과거를 질질 끌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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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 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 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다른 아이들과 도망가버리면 내게 속한 무엇인가를 릴라에게 맡겨두고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평소에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사용하던 표현이 진실하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그 표현은 바로 "일부러 하지 않았어요"였다.

..아버지는 마치 내가 떠내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달려 나가서 길을 건너 바다의 빛나는 파편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빛과 소리가 충만했던 그 순간, 나는 새로운 도시에 홀로 남게 되는 상상을 했다. 새로운 인생을 앞두고 나 자신도 새로워져서 말이다.

..릴라는 바로 그 순간 훗날 ‘경계의 해체‘라고 이름 붙인 그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릴라는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보름달이 뜬 바다 위로 하늘에서 거대한 태풍이 시꺼멓게 몰려오면서 빛이란 빛은 모조리 집어삼키고, 달의 경계를 침식하며 그 빛나는 원반의 형체를 망가뜨려 거칠고 비정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릴라의 침묵에 내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섬에서 보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편지에다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물처럼 넘치는 내 글과 이에 대비되는 그녀의 침묵은, 빛나는 듯 보이는 나의 삶은 실은 무미건조해서 남아도는 시간에 매일같이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데 비해 암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이야말로 실은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린 시절 꿈꿔왔던 부의 의미가 다시 한 번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아씨들』같은 책을 출판해 부와 명성을 얻고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 금화로 가득 찬 보물 상자를 들고 행렬을 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성에 쌓아둘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우리 존재를 확고하게 해주고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소중한 사람들의 ‘경계의 해체‘를 막아줄 시멘트 같은 돈의 이미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구체성과 일상적인 행동, 그리고 협상이었다.

..페란테는 한 인터뷰에서 작가의 본능은 교만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철저하게 타자화되어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고 이를 표현해낼 수 있다는 교만함에서 창작자로서의 본능이 비롯되는 것이라고. 이러한 지적 교만함을 타고난 것은 릴라이지만 이를 꽃피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릴라에게 밀리는 화자 레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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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은 떠돌이처럼, 고독하게, 흔들흔들, 그때그때 살아가는 편이 좋다고, 그 편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내 마음속의 또 한 명의 내가 필사적으로 호소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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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p.
...또 이런 일도 있다. 어느 날 목욕을 하다 문득 손을 봤다. 그랬더니 앞으로도 몇 년 지나 목욕하면서 지금 우연히 손을 본 것을, 그리고 손을 보면서 문득 느꼈던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왠지 모르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또 어느 날 저녁 밥을 밥솥에 옮길 때, 영감이라면 지나친 과장일지 모르지만, 뭔가 몸속을 휘익 하고 스치는 것을 느꼈는데, 뭐라고나 할까, 철학의 꼬리라고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걸로 인해 머리도 가슴도 구석구석까지 투명해져서 뭔가 살아가는 것이 푹신하고 안정된 듯, 아무 말 없이, 소리도 내지 않고 우뭇가사리가 쑥 나올 때의 유연성으로 이대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아름답고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때는 철학 따위를 논할 게 아니다.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살아갈 예감 따위는 좋은 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웠다. 그런 기분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인간은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예수. 그렇지만 여자 예수 같은 건 싫다.

20~21p.
...본능이라는 말과 마주하면 울고 싶어진다. 본능의 거대함, 우리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힘, 그런 것이 가끔 나의 여러 경험에서 느껴질 때면 미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몰라 멍해진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수도 없는 그냥 거대한 것이 머리에 푹 씌워지는 것 같다. 그러고는 나를 마음대로 질질 끌고 다니기 시작한다. 끌려다니면서도 만족하는 감정과 그것을 슬픈 심정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감정....

56p.
..나는 슬픈 버릇이 있는데, 얼굴을 두 손으로 완전히 감싸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얼굴을 감싸고 꼼짝하지 않고 있다.

111p.
.."저기 있잖아요." 품위 없는 큰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가급적 소리를 낮춰, "있잖아요, 내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했을 때가 가장 여성스러워진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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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p.
..그러자 가까스로 미타라이가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그런데 다들 말하는 것처럼 내가 사람들과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이야말로 날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해. 이렇게 매일 평범하게 사는데도, 왠지 화성에서 사는 기분이 들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모두 나와는 다르니까."
..아무래도 우울증의 원인은 그쪽인 것 같다.

157p.
..소소한 기쁨이나 슬픔, 분노, 그런 건 태풍이나 소나기, 봄이 되면 매년 어김없이 피는 벚꽃 같은 거지. 인간은 매일 그런 것에 휘둘리면서 결국 모두 비슷한 곳으로 흘러가. 아무도, 아무것도 될수 없지.

284p.
..아파트를 나갔을 때 다시 한번 건물을 돌아보았다. 이때의 기분은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씁쓸하면서 어린 시절에 장난하다가 들킨 기분이 떠올랐다. 한 인간의 일생을 뒤쫓는 것은 일종의 엿보기이며, 인간에 대한 모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51p.
.."이 얼마나 기만인가!"
..미타라이는 계속했다.
.."도카이도를 메뚜기처럼 뛰어서, 이렇게나 불면의 밤을 거듭했는데, 어째서 다들 아침 인사를 할 때 그렇게나 먼 어제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을까!"

454p.
"...한 사람이 몇십 년이나 살아오다가, 그 전부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했어. 별의별,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사정이 있겠지. 그걸 이런 무책임한 태도로 벼르고 있는 패거리에게 뭐라고 설명할 거야? 과연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조용히 죽는 걸로 충분해! 너라고 예외일 것 같아? 죽는 방법을 운운할 정도니까 자살한 이유는 이미 알고 있겠네?"

504p.
..세상일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글쓰기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사실 없다. 나이가 얼마든 모르는 것은 있고, 젊을 때 잘 알다가 점점 잃어버리는 세계나 지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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