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 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 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다른 아이들과 도망가버리면 내게 속한 무엇인가를 릴라에게 맡겨두고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평소에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사용하던 표현이 진실하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그 표현은 바로 "일부러 하지 않았어요"였다.
..아버지는 마치 내가 떠내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달려 나가서 길을 건너 바다의 빛나는 파편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빛과 소리가 충만했던 그 순간, 나는 새로운 도시에 홀로 남게 되는 상상을 했다. 새로운 인생을 앞두고 나 자신도 새로워져서 말이다.
..릴라는 바로 그 순간 훗날 ‘경계의 해체‘라고 이름 붙인 그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릴라는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보름달이 뜬 바다 위로 하늘에서 거대한 태풍이 시꺼멓게 몰려오면서 빛이란 빛은 모조리 집어삼키고, 달의 경계를 침식하며 그 빛나는 원반의 형체를 망가뜨려 거칠고 비정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릴라의 침묵에 내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섬에서 보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편지에다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물처럼 넘치는 내 글과 이에 대비되는 그녀의 침묵은, 빛나는 듯 보이는 나의 삶은 실은 무미건조해서 남아도는 시간에 매일같이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데 비해 암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이야말로 실은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린 시절 꿈꿔왔던 부의 의미가 다시 한 번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아씨들』같은 책을 출판해 부와 명성을 얻고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 금화로 가득 찬 보물 상자를 들고 행렬을 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성에 쌓아둘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우리 존재를 확고하게 해주고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소중한 사람들의 ‘경계의 해체‘를 막아줄 시멘트 같은 돈의 이미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구체성과 일상적인 행동, 그리고 협상이었다.
..페란테는 한 인터뷰에서 작가의 본능은 교만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철저하게 타자화되어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고 이를 표현해낼 수 있다는 교만함에서 창작자로서의 본능이 비롯되는 것이라고. 이러한 지적 교만함을 타고난 것은 릴라이지만 이를 꽃피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릴라에게 밀리는 화자 레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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