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p.
...또 이런 일도 있다. 어느 날 목욕을 하다 문득 손을 봤다. 그랬더니 앞으로도 몇 년 지나 목욕하면서 지금 우연히 손을 본 것을, 그리고 손을 보면서 문득 느꼈던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왠지 모르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또 어느 날 저녁 밥을 밥솥에 옮길 때, 영감이라면 지나친 과장일지 모르지만, 뭔가 몸속을 휘익 하고 스치는 것을 느꼈는데, 뭐라고나 할까, 철학의 꼬리라고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걸로 인해 머리도 가슴도 구석구석까지 투명해져서 뭔가 살아가는 것이 푹신하고 안정된 듯, 아무 말 없이, 소리도 내지 않고 우뭇가사리가 쑥 나올 때의 유연성으로 이대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아름답고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때는 철학 따위를 논할 게 아니다.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살아갈 예감 따위는 좋은 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웠다. 그런 기분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인간은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예수. 그렇지만 여자 예수 같은 건 싫다.

20~21p.
...본능이라는 말과 마주하면 울고 싶어진다. 본능의 거대함, 우리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힘, 그런 것이 가끔 나의 여러 경험에서 느껴질 때면 미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몰라 멍해진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수도 없는 그냥 거대한 것이 머리에 푹 씌워지는 것 같다. 그러고는 나를 마음대로 질질 끌고 다니기 시작한다. 끌려다니면서도 만족하는 감정과 그것을 슬픈 심정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감정....

56p.
..나는 슬픈 버릇이 있는데, 얼굴을 두 손으로 완전히 감싸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얼굴을 감싸고 꼼짝하지 않고 있다.

111p.
.."저기 있잖아요." 품위 없는 큰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가급적 소리를 낮춰, "있잖아요, 내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했을 때가 가장 여성스러워진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