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잘 맞아서 서로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안 맞는 연애는 오래가지 못한다.

.."미대에 가려는 녀석은 역시 좀 특이해."
..그런 말을 듣게 되니, 기분 탓인지 몰라도 나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내가 다른 모두와 다른 것을 그 사람들은 아마 그런 표현을 써서 이해했겠지. 알기 쉬운 분류법을 찾아내서 머릿속에 이질적인 인간을 받아들일 장소를 마련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던 사가노 히토미가 ‘미대에 들어가려는 녀석’이라는 팻말이 붙은 ‘흔하디흔한 인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못 있을 법한 이야기를 원한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말로 설명을 해주는 것만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진실인 것이다.
..자주 일어나는 일만 진실이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거짓말일 거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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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p.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방인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그랬다. 태어난 나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나는 그저 세상에 던져진, 아무것도 아닌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이상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의 경계를 떠도는 시간이었다.

180p.
...기운가쿠는 ‘구름이 일어나는 집‘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오래된 별장으로 아타미시의 유형 문화재이자 아타미의 3대 별장으로 불린다. 일본의 역사를 장식한 유명한 문인 다자이 오사무,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이 머물며 작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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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정직하죠. 이렇게 보고 있으면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개는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갑니다. 무엇을 방에 두고 무엇을 장식하고 무엇을 감춰두는지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도 알게 되죠."

.."무엇이든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예요."

...마사에는 고구레와 나쓰미의 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인생에 버릴 수도 열 수도 없는 발신만 되는 우편함을 남겨두고 떠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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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2p.
..감기로 학교를 쉬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시계를 올려다보며, 지금쯤 산수시간이겠지 또는 이제 슬슬 급식을 먹겠구나, 생각할 때의 내 기분. 사진을 찍은 것도, 녹음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때의 심정이 기억나는 것일까.
..감기로 쉬지 않았다면, 평소대로 학교에 갔을 나. 그 ‘나‘가 되었다고 가정하며 이불 속에 있는 일은 즐거웠다. 비어 있을 내 자리에 앉아 공상 속에서 급식을 먹었다.

93p.
..이불 속에서 어린 시절에 종종 했던 놀이가 있다.
..자신이 자는 위치를 거꾸로 뒤집기라는 내가 고안한 놀이다.
..상상한다.
..지금은, 벽 방향으로 머리가 있고 발 쪽에는 옷장이 있다. 그것을 머리 방향에 옷장이 있다고 상상해보는 놀이다.
..눈을 감은 채, 가능한 한 세밀하게 뒤집은 방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쪽으로 머리가 있으니까 천정의 모습은 이런 느낌이겠지. 창문은 오른쪽으로 바뀌고, 벽에 걸린 시계는 왼쪽.

162p.
..빵집에서 거북이 멜론빵을 산다. 멜론빵을 거북이같이 만들었을 뿐, 맛은 보통의 멜론빵이다. 하지만 ‘얼굴‘이 있는 탓에 여느 때보다 조심해서 입에 넣었다. 예전 우리 집 청소기에 수예점에서 찾아낸 인형용 눈을 달아봤더니, 그 순간 청소기의 ‘수고‘가 느껴졌었다.

166p.
..세탁한 담요를 벽장에 넣었다. "추워지면 또 만나!" 하면서 담요에 말을 걸어봤다가 침울해지고 말았다. 여름이 지나면 짧은 가을, 그리고 북풍의 계절. 겨울에 태어난 나는 당연하지만, 겨울에 나이를 먹는다.

207p.
..여러 가지 일이 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특히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은 좋은 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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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p.
..그녀는 자신들이 마분지로 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강기슭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35p.
..장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영이 이해한 것은 조금 더 나중이었다. 장사는, 돈을 쓰려는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했다.
..모바일 쿠폰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게에 왔다. 점원이 자신을 우습게 보지 않을지 의식하는 사람도 있고, 처리 시간이 오래 걸리면 쿠폰을 받기 싫어 꼼수를 부리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고작 1000원, 2000원을 아끼려고 이 수고를 들여야 하나, 자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그 쿠폰은 지금 쓸 수 없다는 안내를 받으면 누구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멀쩡한 사람도 화를 내게 만드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화는 고스란히 점원이 뒤집어쓴다.

137p.
..신문이나 책을 읽은 지 오래였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 생각은 온통 할인 제도와 그날 매상, 그리고 손님이 풍기는 분위기에 쏠려 있었다.
..주영은 동굴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상상했다. 빛이 없고 먹을 것이 모자란 좁은 공간에 오래 살면서 눈이 퇴화하고 피부도 투명해진 작고 불쾌한 생물들. 불필요한 기관은 모두 버리고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주영은 하중동 사거리와 구수동 사거리가 그런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맑고 깜깜한 물속에 갇혀 있었다.

156p.
..하은은 그들이 자기 욕을 하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그 대화에 끼고 싶었다. 그녀는 그 외에도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불편하고 속절없는 충동을 느꼈다. 오래된 것이었다.

227p.
..이제 자기 삶이 전환기에 이르렀음을, 어떤 불확실성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지민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단계‘를 향해 정신없이 빠르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지금 어떻게 미끄러지느냐가 앞으로 수십 년을 좌우할 것이었다.

267p.
..신은 자신이 어떤 역할극을 수행하는 중이고, 그 자리에서 너무 순도 높은 진실은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323p.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낡은 기타를 들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그는 생각했다.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성 평등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환경 운동, 동물권 운동, 그런 기획들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거대한 질서가 새로 생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변화를 잘 타고 미끄러지는 것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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