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
..지금 생각하면 당시는 그저 인생의 입구에서 얼쩡거린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는 이제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까지 드는 순간이 분명하게 있었다.
..물론 얄팍한 착각이었다. - P-1

127p.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라 생기 있게 반짝이는 표정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의 가슴에 감동을 주며 깊이 스며드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일상에 언제나 그런 말과 표정이 넘치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을 적당히 넘기기 위한 지혜로서의 말과 표정도 있다. 가나의 아버지는 그조차도 빼앗긴 것 같았다. - P-1

134p.
..가나를 도와주는 게 싫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부르면 달려올 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누가 답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 감정에 화살표를 붙일 수 있는 어떤 전망이나 방향성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상황에 맡기고 그때그때 대응해봤자 이내 지칠 대로 지쳐 진이 빠질 것이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발을 움직인들 허공을 저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사귀기 시작해서 헤어지기까지 가끔씩 가나를 슬프게 했다. 어쨌거나 나는 기혼자였으니까. 전망 같은 것도, 화살표도 없이 상황에 내맡긴 채 사귀었다. 가나도 공중에 뜬 상태에 지칠 대로 지쳐 진이 빠져서 헤어지게 됐다. 지금에 와서 그것을 실감했다.
..이 정도 도움으로는 따라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그때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라면 화살표는 향후 전망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는 나를 향하는 셈이다. - P-1

149p.
..나는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던 주말을 그리워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 이렇게 그저 멍하니 있는 나 자신을 용서하려는 걸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수증기처럼 사라져가는 의문. - P-1

154p.
..어딘지 모르게 소노다 씨의 결심이 느껴지는 글투의 유래를 아는 것은 이 집뿐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이 집은 소노다 씨와 니시야마 도루를 말없이 지켜보지 않았을까. 자살했다고까지 한 말이 뭔가의 반동이라면, 어지간히 격한 감정이 존재했다는 뜻이리라. 서로 강하게 이끌렸던 것이 돌아올 수 없는 방향으로 멀어졌을 때, 그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 P-1

187p.
..불의 형태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벽난로 앞에서라면 침묵도 숨막히게 느껴지지 않는다. - P-1

198p.
..얼마 동안, 심지어 한 달 동안이라도 깊이 맺어져 있었다면 기억은 언제까지고 남는다. 말이 아니라 마음과 피부의 기억으로.... - P-1

212p.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말을 동원해서만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은 정말이지 갑갑한 존재다. 고양이는 후각과 시각과 청각을 백 퍼센트 활용해 속에서 보내는 예스 또는 노 신호에 따라 그저 움직일 뿐인데.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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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p.
..반면 동등대우의 법적 책임을 지니지 않는 이상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은 개인보다 매력적인 개인을 우대하는 행위 자체가 도덕적 잘못인지는 의문이다. 개인적 영역에서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외모를 가진 사람과의 친교에 더 많은 시간을 배정하려 애쓴다. 인간의 겉모습에 대한 우리의 미적 판단이 정치적 힘이나 상업자본이 왜곡한 인종적, 문화적 편견에 온전히 종속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름다운 겉모습에 대한 선호는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자나 유머 감각이 출중한 개인을 선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 P-1

30p.
..시간의 살과 뼈로 만들어진 외모를 제대로 응시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던 나의 겉모습에서 어느 날 작은 아름다움이라도 발견한다면, 나는 퍽 잘 사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장애가 있는, 아픈, 뚱뚱한, 나이 든, 어떤 종류의 상처나 흔적을 가진 몸에게서 "나는 내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라는 고백을 듣는다. 그들의 말을 그저 ‘정신승리‘나 터무니없는 나르시시즘이라고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면, 그는 자신이 늘 들여다본 ‘외모‘가 삶의 두터운 시간을 입고서 얼마간 아름다워진 순간을 만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잘 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겉모습이 곧 나의 실체라는 점은 받아들인다. - P-1

64~65p.
...내가 무엇인가 마음에 든다면 ‘왜‘에 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시기다. ‘내‘ 마음에 들어서 입는다고 말하지만 그런 선호는 대부분 사회적으로 결정된 흔적이다. 어떤 옷이 마음에 든다면 그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누가 어디에서 만들었는지도 고려할 문제다. 이렇게 옷의 배경에 있는 정보를 탐색하는 데는 돈, 시간, 수고로움 같은 비용이 든다. 디자이너 옷이 아니더라도 어떤 옷이 내 삶의 방식이나 가치 기준에 맞는지 탐색하는 데는 정보를 찾고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저절로 이뤄지는 일은 없으며 남들이 좋다는 옷, 멋지다는 옷이 나에게 맞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결국 삶이 주어지는 동안 적당한 옷을 계속 찾아가는 일은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할 거다. 게다가 지금 같은 대전환의 과도기라면 과거의 유산들을 치워버리기 위해 더더욱 감수할 만한 것이 아닐까. - P-1

83p.
...디지털 인체계측학을 활용한 과학 지식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 과학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설명을 해 주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다. 이처럼 ‘왜‘를 말하지 않는 과학의 속성은 "모든 근거 있는 믿음의 밑바탕에는 근거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로 표현된다. - P-1

92p.
..실제로 편견은 고정관념과 같은 인지적 요소보다 호감과 같은 감정적 요인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주목할 점은 편견을 강화하는 감정적 요인이 강한 적대감 같은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무지와 정보 부족, 낮은 접근성으로 생기는 불안과 불편함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잘 모르고 많이 접하지 않은 낯선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강화한다.... - P-1

121~122p.
..의료인류학자 아네마리 몰은 현대 소비 사회에서 소비자–시민의 기호와 욕망은 쾌락과 윤리가 융합하는 방식으로 양성된다고 주장했다. 소비자–시민은 건강이라는 ‘선한 가치‘를 위해 쾌락을 더는 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도록 식품·건강 산업이 소비자의 욕망을 조형한다. ‘건강하고 맛있는‘ 제품을 광고하는 식품 포장을 분석하며 몰은 기업들이 ‘건강하지 않은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소비자‘가 아니라, 건강한 음식을 맛있다고 느끼는 ‘차별화된 취향을 체화한 소비자‘를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심혈관 질환을 방지하고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는 유기농 주스‘나 ‘좋은 유산균을 함유한 요거트‘ 광고의 핵심은 건강할 뿐 아니라 맛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음식이 맛있다고 느끼는 취향은 오랜 시간의 사회적 교육과 훈련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고상하다. 탄탄한 몸을 만들기 위한 나의 노력은 쾌락을 억누르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건강이라는 선한 가치를 향한 즐거운 일상과 차별화된 취향의 실천으로 재탄생하며, 전시해 마땅한 것이 된다. - P-1

155p.
...나와 타인이 서로 맞서는 상호대칭성에서는 얼굴을 살리는 대화의 윤리가 결코 도출될 수 없다. 나와 타인의 비대칭성, 다시 말해 둘 중 누군가 한발 먼저 물러나는 용서 혹은 사죄의 정신 또한 나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대화 윤리의 핵심이다. 나의 성스러운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사소한 모욕이나 비방을 너그러이 눈감아 주는 것은 내가 먼저 나를 줌으로써 나와 타인의 얼굴 모두를 성스럽게 만드는 선물 기술에 속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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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다. ‘마음 놓고 행복해할 수 있는 때’ 같은 건 인생에 없다는 사실을. 행복은 계절처럼 큰 단위로 오지 않고 몇 달씩이나 지속되지도 않는다. 마감이 코앞이니 당분간만 우중충한 채로 지내겠다는 다짐은 영영 흐린 기분으로 살겠다는 말과 같다. 마감 뒤엔 또 다른 마감이. 숙제 뒤엔 또 다른 숙제가 있다. 그러니 바쁘더라도 요령껏 시간을 내서 틈틈이 행복해야 한다. 작고 귀여운 기쁨이라도 모아야 일상을 지킬 수 있는 법이다.... - P-1

..밥그릇, 칫솔, 탁상 거울, 집에서만 쓰는 안경. 매일 쓰는 것이 아름다워야 일상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언제까지 예쁜 카페나 근사한 숙소로, 비일상으로 도망칠 수는 없으니 일상을 가꿔야 한다. - P-1

..여러 사람의 다른 듯 비슷한 장소 궁합 풀이를 종합해 본 후에 나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됐는데, 바로 장소 궁합은 ‘그곳에서 내 모습이 어땠는지’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순수한 몽골 사람들처럼 맑아진 나, 일본 시골 할머니의 속도에 맞춰 행동하는 사려 깊은 나, 북유럽 사람처럼 담백한 일상을 보내는 나. 성공한 여행 서사에는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등장했다. 어떤 장소를 거듭 찾아가는 이유도 실은 거기에 데려다 놔야만 나오는 자신의 좋은 면을 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 P-1

...반면 W는 사진을 찍는 대신 손으로 그것들을 만져 보는 편이었다. 나무 이파리나 돌담을 아이처럼 툭툭 건드리며 걸었다. 그리고 장소를 떠나기 전엔 담배를 한 대 꼭 피웠다. 시간을 들여서 아주 오랫동안. 그건 뭐랄까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는 사람이 치를 법한 특별한 의식 같아 보였다. - P-1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필연적으로 유해해진다. 특히 내 마음에 여유가 없는 날이면 더더욱.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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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p.
..말했듯이 나에게는 무척 유용한 교훈을 준 일이었다. 나는 조시에게 ‘달라지는‘ 면이 있다는 것, 내가 그것에 적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 특성이 조시에게만 있는 게 아님도 알게 되었다. 매장 쇼윈도에 디스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면을 마련해 놓으려 한다는 것, 또 그 순간이 지난 다음에 그런 일시적 모습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 P-1

139p.
..어머니는 잠시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거 참 좋겠다.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지 않는 거.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거. 자꾸 지난 일을 돌아보게 되지 않는 거. 그러면 모든 게 훨씬 더......." 어머니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좋아, 클라라. 그럼 일요일에 같이 가는 거야. 하지만 내 말 명심해. 거기에서 사고가 생기면 안 돼." - P-1

225p.
.."울타리는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없앨 수 있지. 다른 데에 다시 세울 수도 있고. 하루 이틀 만에 지형 전체를 바꿀 수 있어. 울타리로 구획된 땅은 일시적이야. 무대 장치처럼 손쉽게 바꿀 수 있어. 나 전에 연극 했었단다, 알지. 가끔 꽤 괜찮은 극장에서도 했어. 삼류 극장에서도 했고. 울타리가 대체 뭐냐. 무대 장치지. 그게 영국의 좋은 점이야. 산울타리는 땅에 역사가 새겨져 있다는 느낌을 줘...." - P-1

308p.
"...문제는, 크리시 당신이 나하고 비슷하다는 거예요. 우리는 감상적인 사람들이죠.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죠.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당신도 알고요. 우리 세대 사람들은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놓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버려야 해요, 크리시. 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조시 내면에 클라라가 계속 이어 나갈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 P-1

423p.
...어쩌면 해는 세월이 지나고, 많은 것들이 달라진 다음에, 커피잔 아주머니와 레인코트 아저씨가 만난 것처럼 조시와 릭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 P-1

442p.
.."카팔디 씨는 조시 안에 제가 계속 이어 갈 수 없는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에게 계속 찾고 찾아봤지만 그런 것은 없더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저는 카팔디 씨가 잘못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카팔디 씨가 틀렸고 제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결정한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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