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p. ..어쨌든 나는 영문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조금씩 공부에 흥미를 느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은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았다. 환경이 나에게 안긴 절망의 정체는 지금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환경, 그런 입장이었다면 우리 집이 아니라 비아리츠나 카라카스나 카프리 섬에 있었대도 행복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때는 나의 불행이 환경 때문에 오는 나 자신만의 고유한 불행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그런 게 분명했다. 반면에 어떤 의미에서는 밀턴의 말이 옳다. 밀턴에 따르면, 마음은 그 놓인 자리를 낙원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내 고향 플래노의 설계자는 도시를 낙원 쪽보다는 다른 쪽에 가까운, 어쩌면 애수의 도시로 만들고자 한 게 분명하다. 고등학교 시절 내게는, 학교가 파하면 쇼핑센터 같은 데나 서늘하고도 눈부신 지하상가 같은데, 수많은 상품, 수많은 상표가 있고, 거울이 있고, 시그널 음악이 있고, 휴식공간이 있고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그런 곳을 정신없이 쏘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이 잡다한 풍경이 내 머릿속의 퓨즈를 끊어놓을 때까지, 그래서 모든 것이 형상은 없고 색깔만 있는 듯 보일 정도로, 올망졸망하게 붙은 분자 덩어리로 보일 정도로 지각이 마비될 때까지 쏘다녔다. 그러다가는 좀비처럼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를 몰고 야구장으로 달려가, 핸들에 손을 얹은 채로 차 안에 앉아, 해가 지고 어둠이 내 눈을 가릴 때까지 방풍벽이나 노랗게 시든 겨울잔디를 바라보았다.
49~50p. ..나는 그와의 대화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현대적이고 주제에서 종종 벗어나는 대화라고 착각했지만(현대 정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주제에서 멀어지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라고 보는 나에게) 사실 그는 완곡어법을 통하여 나를 몇 차례고 같은 주제로 접근시키고 있었다. 나도 그때는 모르고 있다가 지금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대의 정신이 종작 없고 산만한 것이라면, 고전적 정신은 편협하고, 느긋하고, 비정하다.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지성의 품격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비록 이 시대를 체감하고 있기는 하나 내 영혼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강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62p. .."로마식으로 말하면 푸리아이 세 자매지요." ..버니가 장발에 묻힌, 졸린 눈을 껌벅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렇다. 이들이 사람을 어떻게 미치게 하던가? 사람들의 내적 독백을 증폭시키고, 기왕에 타인에게 알려진 그 사람의 고유한 자질을 증폭시키고, 자신을 그 이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도저히 타인들과는 함께 살 수 없게 만들어버리지 않던가?..."
69p. .."옳지 않은 까닭은, 인간에게 비합리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문명화하면 문명화할수록 그만큼 더 지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지적인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만큼 더 자기 억압에 시달린다. 억압에 시달리면 인간은 자기가 애써 말살하려 했던 원시적 충동과 화해할 수단을 필요로 하게 된다. 원시적 충동과의 화해를 모색하지 않으면 이 막강한 힘은 내부에서 뭉치고 강화되어 필경은 스스로를 해방하기에 이르게 되고, 이 강화의 과정이 길어지면 스스로 폭발하여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원시적 충동과 우리 사이에 일종의 안전판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71p. "...이거야말로 막강한 비의(秘義)다. 황소의 포효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꿀의 분수인 것이다. 영혼이 강력한 인간은 존재의 너울을 찢어발기고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 공포스럽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인간만이 장차 자기를 소진하고, 삼키고, 그 뼈를 부러뜨릴 신의 모습을 대면할 수 있다...."
90p. ..나는 동성애를 불결하게 여기다가 결국 동성애자가 된 사람들을 알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일종의 피항심리(避港心理) 경향이 드러난 본보기이다. 그런가 하면 동성애 자체가 좋아서 동성애자가 된 사람들도 알고 있다. 나는 버니를 첫 번째 범주에 넣었다. 버니의 지나치게 싹싹한 태도와 지나치게 밀접한 교우 관계가 내게는 생소했고 따라서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고전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고전어 자체가 허물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고전어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몇 년 전에 교수 파티에서 술을 취하게 마신 한 고위 교무보직 교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네, 고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말해주지. 고전어로 쓰인 고전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쟁과 남색이야." 매서운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대단히 무책임하고 조잡한 표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많은 경구들이 그렇듯이 그것도 일말의 진실이 담긴 말로 들렸다).
113p. ..학교까지는 걸어서 겨우 15분 거리였다. 그러나 밤공기가 차가운 데다 머리가 몹시 아팠다. 그날 밤의 술자리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느낌, 또 한차례 그들과의 만남에 실패했다는 느낌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 정신없이 쏘다니면서 내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정확한 표현, 정확한 어형변화를 되씹어보는 한편, 내가 미처 대응하지 못했던 그들의 모욕적인 언사에는 마음속으로나마 비슷한 표현과 문장으로 대응했고, 내가 미처 고마움을 나타내지 못했던 친구들의 친절에는 마음속으로나마 비슷한 표현과 문장으로 빚을 갚았다. 그러니 내 속이 온전할 리 없었다.
175p. .."시인과 어부의 삶, 완벽한 어떤 것(parfait), 은혜로운 교우(交友), 드넓은 삶터에서 사는 완벽한 삶. 이런 것의 단서가 되는 것이 바로 메타헤메랄리즘이라는 게 내 생각이야."
189p. ...그들에게 줄 만한 주소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질문을 깡그리 무시하고, 대신 지겨운 눈 소식, 겨울의 아름다움, 고독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잔뜩 써서 보냈다. 나는 이따금씩 먼 곳에서 그런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내 삶을 어떤 식으로 상상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했다. 내 편지가 묘사해내는 삶은 애착에서 벗어난 삶, 비인격적인 삶이었다. 따라서 포괄적인 삶, 반듯하게 정의되지 않는 삶이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대목대목이 공허해 보일 수도 있었다. 시기와 환경이 다를 뿐, 나 자신이 그렇듯이 내가 쓴 편지는 읽는 사람들에게 고타마 싯다르타(釋迦)의 분위기를 느끼게 할 터였다. ..나는 이런 편지들을 대부분 일을 시작하기 직전인 아침에 롤랜드 박사의 연구실에서나, 도서관에서나, 관리인으로부터 나가달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어슬렁거리곤 하던 초저녁의 커먼스 홀에서 썼다. 어떻게 보면 내 삶 자체가 이 연구실과 도서관과 커먼스 홀처럼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공공장소를 전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남들의 삶터인 그런 공공의 공간을 전전하던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았다. 한밤중에 기차역을 기웃거리면서, 지나다니는 승객들에게 20년 전의 심야열차 시간표를 묻던 유령이 있었다던가. 나 역시 그 유령처럼, 문이 닫힐 때까지, 관리인이 나가기를 요구할 때까지, 불이 켜진 곳, 온기가 있고 사람이 있고 대화가 있는 곳을 전전했다. 그렇게 전전하다 밖으로 나서면 뼈를 뒤트는 듯한 추위를 느끼고는 했다. 밖으로 나서면 빛도 온기도 없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따뜻함을 누려본 적이 없다.
190p. ..그러나 H. G. 웰스의 소설에 나오는 투명인간처럼, 나도 투명인간 노릇에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웰스의 주인공의 경우가 그랬듯이 내 경우에도 정신의 공백을 그 대가로 치러야 했다.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눈을 보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투명인간이 된 나의 몸을 관류하고 지나가는 것으로 믿었다....
190~191p. ...돌을 던지는 행위가 나에게는 강신(江神)의 가호를 비는 행위 혹은 나라고 하는 인간의 물리적인 형태가 여전히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행위였다....
225p. ...게다가 헨리가 끊임없이 버니에게 돈을 대는 데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헨리는 씀씀이가 헤픈 아내를 가진 남편이 그러듯이 버니의 옷가지 사는 데 드는 돈을 비롯해서 버니에게로 날아드는 청구서 금액은 물론 현금까지도 충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버니가 영문을 모르는 채 보호를 받다가 헨리가 베푸는 호의에 낚싯바늘이 달린 것을 알고는 몹시 화를 내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242p. ..숨을 멈추고 뤼케이온관의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상하게도 가슴은 뛰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텅 빈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밤새 흥분에 시달리다가 크리스마스 아침에 가만히 일어나 뒷문을 통해 살금살금 거실로 들어갔을 때 경험한 것과 비슷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놓여 있을 자리에 선물이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내 몸에서 모든 희망이 빠져나가 버리는 듯한 묘한 느낌을 자주 경험하고는 했다.
260p. .."아무튼 자신의 존재를 일시적으로나마 중단해본다는 것, 말하자면 일상적 존재의 순간을 초월해보는 것, 이건 굉장한 경험이야. 꽤 까다로운 설명이 되겠지만 이로써 우리는 부수적인 이득을 누리게 되지. 고대 문화는 불행히도 이 이득의 정체에 대해서는 암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귀띔하고 있어서,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거기에 도달해야 했어."
263p.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에게, 《신곡》은 도무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어. 단테를 읽고 단테를 이해하려면, 읽는 동안만이라도 기독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했지. 우리의 의례도 이와 같아. 우리는 여기에 그 자체의 의미만으로 접근해야지, 도착적(倒錯的)인 시각으로 접근해서도 안 되고, 학구적인 시각으로 접근해도 안 돼.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 처음에 우리는, 수 세기 동안 축적된 학문적 연구의 단편들을 통해서 우리의 의례를 해석하려고 했어. 그 결과 행위 자체가 지닌 생명력은 모조리 증발하고 만 것이지. 행위 자체의 아름다움, 공포, 그리고 행위 자체가 지니는 희생적 의미도 사라지고 만거야."
294p. ...초록색 카멜레온은, 색깔이 다른 환경을 만나면 그 환경과 비슷한 색깔로 자기 몸 색깔을 바꿀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되도록이면 초록색 환경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카멜레온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314p. ...줄리언에 따르면 그리스어 산문 작법 공부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에게 언어를 실용적으로 쓰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 산문 작법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쉽게 언어를 숙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어를 이용한 사고법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그리스어를 다른 언어의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운 개념으로 억지로 번역함으로써 그 의미를 한정해버리면, 사고의 패턴이 전혀 달라져버린다. 결국 상당히 평이하고 일반적인 개념이 엉뚱한 개념으로 바뀌는가 하면, 그 개념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개념이 생생하게 살아나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리스어 개념을 영어로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곤란을 겪고는 한다. 불을 뜻하는 라틴어의 인켄디움(incendium)은 프랑스 사람들이 담배에다 붙이는 푀(feu)와는 다르다. 이 둘은 불은 불이라도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무정하고 흉폭한 퓌르(pur)와도 다르다. 그리스어로 퓌르(pur)라고 할 경우, 이 불은 일리온(트로이아—옮긴이) 성 위로 오르는 불길,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적한 해변에서 파트로클로스의 화장단(火葬壇) 위로 솟아오르는 불길을 말한다.
315p. ...우리가 미국 땅에서 쓰는 말은 부랑자와 헤어핀의 말, 호박과 맥주의 나라에서 쓰이는 말, 에이허브 선장과 뚱보 기사 팔스타프와 간호사 갬프 부인의 말일 뿐이다. 내 일상의 추억을 표현하는 데는 그런대로 쓰이는 이 말도 내가 사랑하는 그리스어 개념을 나타낼 때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스어는 긴박한 생각, 기발한 생각의 변전과는 인연이 없는 언어이다. 그리스어는 행위의 표현에 사로잡힌 언어이다. 다른 행위로 인해 증폭된 포괄적 행위에 대한 흥취에 사로잡힌 언어, 사방의 고무(鼓舞)를 받으며 거침없이 전진하는 행위에 사로잡힌 언어, 인과율의 그물 속에서, 그 목적인 행위에 사로잡힌 언어인 것이다.
330p.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 있나? 어떤 사회에서 정의로움이 가능한 것은, 사회의 각 계급 조직이 제자리에서 기능하고, 각 계급 조직에 속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만족하고 있을 때뿐이다. 이런 사회의 경우, 자기의 위치에서 신분 상승을 꾀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공연히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다. 현명한 가난뱅이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명한 부자들 역시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350p. ...지극히 일반적인 여자는 열등한 피조물, 귀를 기울이고 듣기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동물이라는 다분히 그리스적 미신 때문이었다. 아르고스인들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통념은 어찌나 집요하게 사람들 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지 언어의 뼈대에도 남아있다. 나는 이러한 통념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그리스 속담을 하나 알고 있다. 남자에게는 친구가 있고, 여자에게는 친척이 있고, 짐승에게는 짐승이 있을 뿐이라는 속담이 그것이다.
368p. .."버니가 담배를 안 피우는 건 고등학교 때 운동을 했기 때문이야. 곱게 늙은 축구 코치 같은 사람 있지, 왜? 그런 사람 밑에서 감수성이 예민할 때 훈련을 쌓은 사람은 담배 같은 걸 못 피우게 돼."
389p. .."너무 기발한 생각이었지. 우리 인간에게는, 행동으로 직결되는 계획을 머리로 짤 경우 지나치게 똑똑한 척하는 경향이 있어. 문서로 작성할 경우 그런 폐단은 없어지지. 균형을 생각하거든. 내 경우가 바로 전자에 속해.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니까, 고심해가면서 짠 계획이 이게 아니다 싶은 거야. 왜? 균형 감각을 무시한 계획이라서 너무 복잡하거든."
398p. .."너는 거기에서 틀리고 있어. 우리가 완벽한 논리적인 방법을 통해 어떤 목적지에 이르려 하면서 일의 순서를 지나치게 꼼꼼하게 계획해둘 경우 그 논리적인 방법이 우리의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성적인 사람의 눈에는 이성적으로 계획한 일의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게 보인다는 말이야. 그러나 우연, 혹은 우연이 가져오는 행운은? 그건 보이지 않아. 예측 불가능, 비인위적인 것이야. 우리 입장에서 한번 따져보자. 우리가 버니를 따라다니는 게 좋겠어, 아니면 버니가 자기의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주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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