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p. «칼날»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너무나 바르고 너무나 옳은 그 생각들은 아들을 또 얼마나 괴롭힐 것인가? 사회에 나갔을 때 아들은 무서운 혼란을 맞을 것이 뻔했다.

76p. «우주여행»
..그는 달에 세워질 천문대에서 일할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달은 황금색의 별세계였다. 그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끔찍하다고 했다. 그의 책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눈물도 보람 없이 흘려야 하고, 마음은 억눌리고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일 끔찍한 일은 갖고 있는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다. 지섭은 다시 도도새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93p.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139p.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 영희가 이 시간에 어디서 어떤 식탁을 대하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우리의 밥상에 우리 선조들 대부터 묶어 흘려보낸 시간들이 올라앉았다. 그것을 잡아 칼날로 눌렀다면 피와 눈물, 그리고 힘없는 웃음소리와 밭은기침 소리가 그 마디마디에서 흘러 떨어졌을 것이다....

143p.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사막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이다. 어두울 녘에 모래 섞인 바람이 분다. 선 하나로 표시될 그 지평 끝에 내가 알몸으로 서 있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팔을 안으로 끌어 들였다. 머리도 반쯤 숙여 나의 머리카락이 나의 가슴을 덮었다. 눈을 감고 열을 세면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바람 부는 회색의 지평선만 남는다. 이것이 내가 아는 죽음이다....

166p. «육교 위에서»
..두 사람에게 이 사회는 괴물 덩어리였다. 그것도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괴물 덩어리였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저희 스스로를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으로 보았다. 기름은 물에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도 합당한 것은 못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두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묻어 굴러간다는 사실이었다.

179p. «육교 위에서»
...동생 머리맡에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내가 갖다 놓은 것이다. 동생의 아이들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사람을 제일 약하게 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웃고 있었다.

278p. «클라인 씨의 병»
...그는 부를 생산이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물에 비유하고, 그것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한 곳에 괴어 썩어 버린다고 말했다. 그 말을 받아 누가 꽤 진지한 목소리로 "역사와 같군요"라고 말했는데,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 부의 생산자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란 점입니다"라고 했다....

295p. «클라인 씨의 병»
..."바다에서 제일 좋은 것은 바다 위를 걷는 거래.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자기 배로 바다를 항해하는 거지. 그다음은 바다를 바라보는 거야.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 우리는 지금 바다에서 세 번째로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307p.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나는 스프링보드를 몇 번 구르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풀 깊은 바닥은 아직도 어두웠고 물은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일 분가량 잠수해 있었다. 풀 밑바닥 모퉁이에 몸을 오그리고 앉아 느끼는 일 분 동안의 숨막힘, 일 분 동안의 거짓 절망이, 나중에 잃게 될 내 세계와 지금 멀어져 버리는 괴로움으로 변해 나를 죄어 왔다....

316p.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한여름 햇볕이 고민하는 사촌의 몸에 떨어졌다. 내 사고와 체질, 습성이 점점 국적 불명이 되어 간다고 그가 말한 적이 있다. 이 관찰 하나만은 그가 옳았다. 나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그가 인정한 셈이었다.

397p. 해설
...환언하면 조세희의 소설들은 그 구조와 표현에 있어 선험적으로 대립적인 그의 세계관과 미학적 방법론을 실천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의 이 같은 대립이 뤼시 골드만의 ‘단절의 근거인 구성적 대립‘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골드만의 경우 이 ‘구성적 대립‘은 주인공의 타락과 세계의 타락 사이에 존재한 단절이 근원적일 때 비극이나 서정시가 되고, 그것이 없거나 우연적일 때 서사시나 설화를 이루며, 소설은 그 중간 지점에서 변증법적 성격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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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p.
..나는 ‘공정‘보다 ‘불평등‘과 ‘격차‘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공정은 사회구조의 모순이 결부된 문제라기보다 게임 규칙에 관한 문제다.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규칙이 중요하겠지만 그 게임에 참여할 수 없거나 배제된 사람에게 규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정한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공정은 각 개인에게 다른 무게를 지닌다. 대기업 입사라는 게임에 참여하기 힘든 지방대 출신 청년에게 취업 과정에서 공정 여부는 큰 의미가 없다. 서울 주요 대학 입시에 원서를 내기 어려운 중하위권 학생들에게 정시와 수시 비중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13p.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치는 사람도 있느냐는 질문에 오창익 국장은 단호하게 "없어요"라고 답했다. 한국 사회에 굶어 죽는 사람은 이제 없다는 것이었다. 인권 전문가마저 고전적 의미의 아사는 사라졌다고 보고 있었다. 오창익 국장은 다만 ‘밥은 먹지만 피자는 못 먹는다‘는 말을 했다. ‘밥은 먹지만 치킨은 못 먹는다‘는 말도 했다. 굶지는 않지만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굶지 않는다고 인간으로서 존엄하냐는 건 다른 질문"이라고 말했다.

92p.
..이들의 한 달은 덧셈과 뺄셈이다. 매달 말일 기초생활수급비가 들어오는 찰나의 덧셈이 끝나면 뺄셈이 연속된다....

93p.
..이들의 사칙연산에 곱셈과 나눗셈은 없다. 갖고 있다는 이유로 가격이 오르고 이자가 붙는 물건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나마 자산을 꼽자면 월세 보증금이 있다. 그것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다. 복리의 마법도 없다.

104p.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은 현진씨의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표현이었다. 그는 인터뷰하는 내내 몇 번이고 소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고기 부위나 조리법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소고기‘를 구워 먹고 싶다고 할 뿐이었다.

112p.
..수급비 65만 원을 나누는 작업은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병사들을 분류하는 일과 같다. 위급한 곳부터 차례로 틀어막는다. 신속하고 냉정해야 한다. 월세를 밀리면 민정씨는 AI 스피커를 챙겨 길거리에 나앉아야 한다. 또 비급여 진료비를 따로 남겨두지 않으면 스피커에 대고 살려달라고 외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식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146p.
..여든 넘게 살아오며 할머니는 기억할 것과 잊을 것을 빨리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지관에서 주는 밥을 입 안에 넣으며 하나둘 기억에서 지울 것들도 삼켰다....

182p.
...쉰네 살 승수씨는 대학동에서 10년간 살면서 방문을 열고 밥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틈새로 넘어오는 음식 냄새를 그의 이웃이 정겹게 느꼈을지 알지 못한다. 한 사람이 밥을 먹을 때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이 증오하게 되는 공간이라면 그곳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2p.
..식사를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의 식탁과 삶. 앞서 말했지만 처음부터 이를 핵심 주제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영양 취약 계층을 만나고 식사 사진을 받고 이를 토대로 내부 논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좁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주제는 ‘가난한 사람은 잘 먹지 못한다‘에 비해 훨씬 힘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이 잘 먹지 못한다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식사를 선택할 수 없고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한다는 건 누구나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는 문제다.

222p.
..어느 주장이 옳은지와 별개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빈자는 기준을 넘어선 안 된다.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그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좋은 음식을 먹어선 안 되고 브랜드 제품을 써선 안 된다. 도움에 감사하며 약자의 포지션에 머물러야 한다. 그 기준을 넘어설 경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빈곤한 식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 사회가, 자기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와 같다.

224p.
.."내 몸 하나 간수하고 투병 생활하는 것도 힘든데 내가 뭐라고 상차림에 사진까지…. 나 그냥 바닥이나 책상에 막 놓고 먹어요. 약 때문에 억지로 먹고 대충 먹다 말고 또 똑같은 반찬을 보면 밥 먹기가 싫어요. 그래도 상 놓고 차려 먹어보니 그 나름 괜찮았어요. 이제 상 놓고 먹으려고요. 말씀드리고 나니 좀 낫군요. 며칠 동안 안 하던 짓 한다고 참 애썼어요. 내일부터는 사진 안 보낼게요. 감사합니다."

230p.
..나는 이런 현상이 선진국 진입 단계에 이른 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정치, 경제, 사회 측면에서 여러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각 개인에게 추상적 정의는 큰 의미가 없다. 개인에게 선진국에 산다는 건 그냥 ‘잘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잘산다는 건 물질적인 여유와 풍족함을 누리며 산다는 의미가 가장 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쉽게 죽지 않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사회가 선진국이다. 지금 한국에서 생각하는 생명의 가치, 목숨의 가치는 수십년 전보다 훨씬 높아지고 소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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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p.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어 시간에 줄리언 모로 교수가 자주 하던 말이다. 나는 그가, 우리의 정신적 습관을 힘써 가꾸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의 음모를 고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 듯하다....

35p.
..튤립. 나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리스 문자를 보면서 튤립을 생각했다. 그리스에 튤립이 있었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터였다. 그리스 문자 프시(Ψ)는 튤립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 갑자기 빽빽한 알파벳의 숲에서 검은 튤립이 무수히 튀어오르기 시작하면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제멋대로 무늬를 만드는 것 같았다.

74p.
..혼자 있을 때마다 나를 괴롭힌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신경쇠약이었다. 말하자면 흔한 불안감 혹은 과장된 자기혐오증 같은 것에 시달리고는 했던 것이다. 내 입으로 뱉은 험한 말 혹은 어리석은 말이 그 이상으로 명징하게 나를 겨냥하고 되돌아왔다. 나 자신을 타이르기도 해보았고,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오래전에 남에게 안긴 모욕, 은밀하게 경험하던 죄의식, 당혹감. 이런 것들이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씩 되살아나 나를 괴롭혔다....

85~86p.
.."내가 자네들의 선생이 된 것은, 내가 자네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우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극도로 친밀했지만, 표면적으로는 냉담하고 사무적이었다. 그는 우리가 지닌 가장 매력적인 자질들을 제외한 우리의 어떤 점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그 매력적인 자질이란 우리의 모든 지루하고 비호감스러운 특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그가 가꾸고 확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줄리언이 의도하는 이 매력적인 수준에 나 자신을 맞추는 일에 굉장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결국 이 때문에 나는 거짓말로 자신을 교묘하게 방어하는 이상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우리의 전체성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발명한 덕목인 게니스 그라투스(genis gratus), 코르포레 글라벨루스(corpore glabellus), 아르테 물티스키우스(arte multiscius), 에트 포르투나 오풀렌투스(et fortuna opulentus), 즉 고운 얼굴, 부드러운 살빛, 충분한 교양 그리고 유복함을 통해서만 우리를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까지도 맹목적으로 이런 문맥에서 읽으려는 경향까지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버니가 지니는 현실적, 실재적 문제까지도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 바로 그런 문맥에서 문제의 핵심을 읽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167~168p.
..하얀 하늘. 지평선에서 사라지는 나무 그림자. 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 옆으로 늘어져 있는 두 손은 도무지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나에게는 그날의 지평선이 그렇게 생소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지워버림으로써, 우리를 외로운 모습으로, 버림받은 모습으로,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의 미완성 풍경화—거대한 숲처럼 자리 잡은 한 그루 나무의 윤곽, 배경이 그려지지 못한 화면에 불쑥 솟아 있는 가로등과 굴뚝—속에 덜렁 남겨놓은 지평선. 그런 지평선이 우리를, 낯익은 이정표가 있기는 하되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너무 제멋대로 흩어져 있어서 그것이 없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공허하게 하는 기억상실의 땅에 버려놓은 것 같았다.

175p.
..버니의 성격이 지니는 이 같은 비현실성 혹은 만화 같은 측면이야말로 그가 풍기던 매력의 비밀이었다. 그의 죽음이 햄든의 비극적인 사건이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비밀 때문이었다. 위대한 코미디언이 그렇듯이, 그는 자기 주위를 제 나름의 색깔로 칠했다. 그는 자기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냈다. 그래서 낙타를 탄 버니도 있을 수 있었고, 아기를 보고 있는 버니, 심지어는 우주의 버니도 가능했다. 그런데 죽고 나니 바로 이러한 그의 인상이 굳어지면서 전혀 다른 것으로 발전했다. 그는 비극적인 역할을 맡는, 관중들에게 낯익은 재담꾼이 된 것이다.

320p.
..줄리언은 모든 종류의 어려운 상황에 필요한 적절한 반응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늘 그에게서, 진심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자기의 반응을 우아해 보이게 하는 데 더 신경을 쓴다는 인상을 받고는 했다....

344p.
.."아니, 알 거야. 너는 저 힘과 쾌락의 분류(奔流)를 알고 있어. 비밀을 가진다는 것, 자기 손으로 세상을 다스리면서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너도 알고 있어. 세상이 문득 넉넉해 보이던 순간을,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던 순간을 알고 있어."

370~371p.
..줄리언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낭만적인 측면에서 과장하게 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사랑했다. 내가 세상만사를 아름답게 윤색하고 싶다는 유혹, 세상만사를 다시 빚고 싶다는 유혹, 세상만사를 용서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 것은 바로 그와 함께 있을 때였다. 내가 그런 유혹을 느꼈던 까닭은 줄리언 자신이 정감과 지혜와 용기와 매력을 부여함으로써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자기 주위의 일상사를 다시 빚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사랑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은 물론, 내가 그 정반대의 극단으로 방향을 틀어 생각해보는 것도 쉬운 일이다. 이제 나는 줄리언이 지닌 매력의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로 느끼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접근해 있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열등감을 우월감과 오만으로 바꾸어놓는 묘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타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에서 그런 교육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충동을 성취하기 위해 그런 교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측면에 관한 한, 나는 어느 범위까지는 어느 정도 정확하게 체계를 세워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의 개성이 지니는 근본적인 마력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처음 만날 때의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자 하는데, 이 까닭 역시 이로써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에게 그는 처음에 그랬듯이 지금도 골목 어귀 같은 데서 불쑥 나타나 꿈을 이루고 싶으냐고 묻는 노현자와 같은 존재이다.

372~373p.
.."줄리언은 말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다 골라 먹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만 상자에 남겨두는,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로 들리기는 하나, 나는 줄리언의 개성을 이렇게 정확하게 지적한 은유를 알지 못한다. 내가 줄리언과 함께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당시 조르주 라포르그 교수는 다소 퉁명스럽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줄리언은 영원히 일급 학자는 되지 못할 거야. 왜냐? 사물을 보되 자기가 선택하는 측면에서만 보거든."
..내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고, 가령 두 가지 측면, 예술이나 미학 같은 데만 자기 관심의 초점을 집중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묻자, 라포르그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름다운 것에 사랑을 쏟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의미 있는 것과 맺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피상적인 것이라네. 나는 특정 측면, 자기가 좋아하는 측면에만 선택적으로 관심을 쏟는다고 해서 줄리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야.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측면을 무시한다고 줄리언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지."

413p.
...줄리언과의 이별이 헨리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헨리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우리와 자기 자신에게 줄리언이 가르쳤던 의리, 경건, 성실, 희생 같은 극도로 차가운 원칙은 따를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어떤 고상한 제스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앨버말의 벽거울에 비치던, 헨리가 권총을 자기 관자놀이에 갖다 대던 모습을 잘 기억한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정신은 승리의 순간을 향한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얼굴은 흡사 도약대 끝으로 다가가는 하이 다이버의 얼굴과 같았다. 눈을 꼭 감은 채 도약대 끝으로 다가가면서 물을 가르고 뛰어들게 될 순간을 기다리는 환희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418p.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나는 제임스 1세 시대의 희곡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웹스터도 읽었고 미들턴도 읽었으며 터너도 읽고 포드도 읽었다. 전공치고는 묘하다는 사람이 많았으나 내게는 촛불 아래로 드러나는 무정한 그 시절의 세계—죄지은 자는 벌을 받지 않고, 순진무구한 자는 자주 파멸을 맞곤 하는—가 좋았다. 《불만》 《하얀 악마》 《실연》 같은 희곡의 제목도 내게는 묘하게 매혹적이고도 아름다웠고 때로는 사악했다. 나는 여백을 메모로 빽빽하게 채우면서 미친 듯이 읽었다. 제임스 1세 시대의 작가들에게는 종말론적 위기가 감돌았다. 그들은 악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악이 교묘한 트릭을 통하여 선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야말로 썩어버린 이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427p.
.."줄리언이 하던 말이 생각나는군. 유령 같은 게 진짜로 있다는 거야.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유령 이야기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대. 그러니까 우리 역시 호메로스처럼 유령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거지. 줄리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그 이름을 다르게 부르고 있을 뿐이래. 추억, 무의식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래."

433p.
...파장과 에너지가 아니라면 죽음은 대체 무엇일 수 있는가? 아득한 옛날에 사멸한 별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별빛 같은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 수 있는가?
..이것은 줄리언이 하던 말이다. 《일리아스》 강의 시간,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꿈에 나타나는 대목에서 그가 하던 말이다. 아킬레우스가—유령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사랑하는 친구의 목을 껴안으려 하자 유령이 바로 사라지고 마는 이 대목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줄리언은 이런 말을 했다. 유령은 우리 꿈을 통해서 나타난다. 왜냐? 꿈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날아온, 사멸한 별빛이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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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p.
..어쨌든 나는 영문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조금씩 공부에 흥미를 느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은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았다. 환경이 나에게 안긴 절망의 정체는 지금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환경, 그런 입장이었다면 우리 집이 아니라 비아리츠나 카라카스나 카프리 섬에 있었대도 행복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때는 나의 불행이 환경 때문에 오는 나 자신만의 고유한 불행으로 여겨졌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그런 게 분명했다. 반면에 어떤 의미에서는 밀턴의 말이 옳다. 밀턴에 따르면, 마음은 그 놓인 자리를 낙원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내 고향 플래노의 설계자는 도시를 낙원 쪽보다는 다른 쪽에 가까운, 어쩌면 애수의 도시로 만들고자 한 게 분명하다. 고등학교 시절 내게는, 학교가 파하면 쇼핑센터 같은 데나 서늘하고도 눈부신 지하상가 같은데, 수많은 상품, 수많은 상표가 있고, 거울이 있고, 시그널 음악이 있고, 휴식공간이 있고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그런 곳을 정신없이 쏘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이 잡다한 풍경이 내 머릿속의 퓨즈를 끊어놓을 때까지, 그래서 모든 것이 형상은 없고 색깔만 있는 듯 보일 정도로, 올망졸망하게 붙은 분자 덩어리로 보일 정도로 지각이 마비될 때까지 쏘다녔다. 그러다가는 좀비처럼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를 몰고 야구장으로 달려가, 핸들에 손을 얹은 채로 차 안에 앉아, 해가 지고 어둠이 내 눈을 가릴 때까지 방풍벽이나 노랗게 시든 겨울잔디를 바라보았다.

49~50p.
..나는 그와의 대화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현대적이고 주제에서 종종 벗어나는 대화라고 착각했지만(현대 정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주제에서 멀어지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라고 보는 나에게) 사실 그는 완곡어법을 통하여 나를 몇 차례고 같은 주제로 접근시키고 있었다. 나도 그때는 모르고 있다가 지금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대의 정신이 종작 없고 산만한 것이라면, 고전적 정신은 편협하고, 느긋하고, 비정하다.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지성의 품격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비록 이 시대를 체감하고 있기는 하나 내 영혼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강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62p.
.."로마식으로 말하면 푸리아이 세 자매지요."
..버니가 장발에 묻힌, 졸린 눈을 껌벅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렇다. 이들이 사람을 어떻게 미치게 하던가? 사람들의 내적 독백을 증폭시키고, 기왕에 타인에게 알려진 그 사람의 고유한 자질을 증폭시키고, 자신을 그 이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도저히 타인들과는 함께 살 수 없게 만들어버리지 않던가?..."

69p.
.."옳지 않은 까닭은, 인간에게 비합리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문명화하면 문명화할수록 그만큼 더 지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지적인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만큼 더 자기 억압에 시달린다. 억압에 시달리면 인간은 자기가 애써 말살하려 했던 원시적 충동과 화해할 수단을 필요로 하게 된다. 원시적 충동과의 화해를 모색하지 않으면 이 막강한 힘은 내부에서 뭉치고 강화되어 필경은 스스로를 해방하기에 이르게 되고, 이 강화의 과정이 길어지면 스스로 폭발하여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원시적 충동과 우리 사이에 일종의 안전판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71p.
"...이거야말로 막강한 비의(秘義)다. 황소의 포효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꿀의 분수인 것이다. 영혼이 강력한 인간은 존재의 너울을 찢어발기고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 공포스럽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인간만이 장차 자기를 소진하고, 삼키고, 그 뼈를 부러뜨릴 신의 모습을 대면할 수 있다...."

90p.
..나는 동성애를 불결하게 여기다가 결국 동성애자가 된 사람들을 알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일종의 피항심리(避港心理) 경향이 드러난 본보기이다. 그런가 하면 동성애 자체가 좋아서 동성애자가 된 사람들도 알고 있다. 나는 버니를 첫 번째 범주에 넣었다. 버니의 지나치게 싹싹한 태도와 지나치게 밀접한 교우 관계가 내게는 생소했고 따라서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고전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고전어 자체가 허물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고전어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몇 년 전에 교수 파티에서 술을 취하게 마신 한 고위 교무보직 교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네, 고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말해주지. 고전어로 쓰인 고전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쟁과 남색이야." 매서운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대단히 무책임하고 조잡한 표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많은 경구들이 그렇듯이 그것도 일말의 진실이 담긴 말로 들렸다).

113p.
..학교까지는 걸어서 겨우 15분 거리였다. 그러나 밤공기가 차가운 데다 머리가 몹시 아팠다. 그날 밤의 술자리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느낌, 또 한차례 그들과의 만남에 실패했다는 느낌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 정신없이 쏘다니면서 내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정확한 표현, 정확한 어형변화를 되씹어보는 한편, 내가 미처 대응하지 못했던 그들의 모욕적인 언사에는 마음속으로나마 비슷한 표현과 문장으로 대응했고, 내가 미처 고마움을 나타내지 못했던 친구들의 친절에는 마음속으로나마 비슷한 표현과 문장으로 빚을 갚았다. 그러니 내 속이 온전할 리 없었다.

175p.
.."시인과 어부의 삶, 완벽한 어떤 것(parfait), 은혜로운 교우(交友), 드넓은 삶터에서 사는 완벽한 삶. 이런 것의 단서가 되는 것이 바로 메타헤메랄리즘이라는 게 내 생각이야."

189p.
...그들에게 줄 만한 주소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질문을 깡그리 무시하고, 대신 지겨운 눈 소식, 겨울의 아름다움, 고독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잔뜩 써서 보냈다. 나는 이따금씩 먼 곳에서 그런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내 삶을 어떤 식으로 상상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했다. 내 편지가 묘사해내는 삶은 애착에서 벗어난 삶, 비인격적인 삶이었다. 따라서 포괄적인 삶, 반듯하게 정의되지 않는 삶이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대목대목이 공허해 보일 수도 있었다. 시기와 환경이 다를 뿐, 나 자신이 그렇듯이 내가 쓴 편지는 읽는 사람들에게 고타마 싯다르타(釋迦)의 분위기를 느끼게 할 터였다.
..나는 이런 편지들을 대부분 일을 시작하기 직전인 아침에 롤랜드 박사의 연구실에서나, 도서관에서나, 관리인으로부터 나가달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어슬렁거리곤 하던 초저녁의 커먼스 홀에서 썼다. 어떻게 보면 내 삶 자체가 이 연구실과 도서관과 커먼스 홀처럼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공공장소를 전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남들의 삶터인 그런 공공의 공간을 전전하던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았다. 한밤중에 기차역을 기웃거리면서, 지나다니는 승객들에게 20년 전의 심야열차 시간표를 묻던 유령이 있었다던가. 나 역시 그 유령처럼, 문이 닫힐 때까지, 관리인이 나가기를 요구할 때까지, 불이 켜진 곳, 온기가 있고 사람이 있고 대화가 있는 곳을 전전했다. 그렇게 전전하다 밖으로 나서면 뼈를 뒤트는 듯한 추위를 느끼고는 했다. 밖으로 나서면 빛도 온기도 없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따뜻함을 누려본 적이 없다.

190p.
..그러나 H. G. 웰스의 소설에 나오는 투명인간처럼, 나도 투명인간 노릇에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웰스의 주인공의 경우가 그랬듯이 내 경우에도 정신의 공백을 그 대가로 치러야 했다.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눈을 보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투명인간이 된 나의 몸을 관류하고 지나가는 것으로 믿었다....

190~191p.
...돌을 던지는 행위가 나에게는 강신(江神)의 가호를 비는 행위 혹은 나라고 하는 인간의 물리적인 형태가 여전히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행위였다....

225p.
...게다가 헨리가 끊임없이 버니에게 돈을 대는 데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헨리는 씀씀이가 헤픈 아내를 가진 남편이 그러듯이 버니의 옷가지 사는 데 드는 돈을 비롯해서 버니에게로 날아드는 청구서 금액은 물론 현금까지도 충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버니가 영문을 모르는 채 보호를 받다가 헨리가 베푸는 호의에 낚싯바늘이 달린 것을 알고는 몹시 화를 내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242p.
..숨을 멈추고 뤼케이온관의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상하게도 가슴은 뛰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텅 빈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밤새 흥분에 시달리다가 크리스마스 아침에 가만히 일어나 뒷문을 통해 살금살금 거실로 들어갔을 때 경험한 것과 비슷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놓여 있을 자리에 선물이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내 몸에서 모든 희망이 빠져나가 버리는 듯한 묘한 느낌을 자주 경험하고는 했다.

260p.
.."아무튼 자신의 존재를 일시적으로나마 중단해본다는 것, 말하자면 일상적 존재의 순간을 초월해보는 것, 이건 굉장한 경험이야. 꽤 까다로운 설명이 되겠지만 이로써 우리는 부수적인 이득을 누리게 되지. 고대 문화는 불행히도 이 이득의 정체에 대해서는 암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귀띔하고 있어서,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거기에 도달해야 했어."

263p.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에게, 《신곡》은 도무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어. 단테를 읽고 단테를 이해하려면, 읽는 동안만이라도 기독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했지. 우리의 의례도 이와 같아. 우리는 여기에 그 자체의 의미만으로 접근해야지, 도착적(倒錯的)인 시각으로 접근해서도 안 되고, 학구적인 시각으로 접근해도 안 돼.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 처음에 우리는, 수 세기 동안 축적된 학문적 연구의 단편들을 통해서 우리의 의례를 해석하려고 했어. 그 결과 행위 자체가 지닌 생명력은 모조리 증발하고 만 것이지. 행위 자체의 아름다움, 공포, 그리고 행위 자체가 지니는 희생적 의미도 사라지고 만거야."

294p.
...초록색 카멜레온은, 색깔이 다른 환경을 만나면 그 환경과 비슷한 색깔로 자기 몸 색깔을 바꿀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되도록이면 초록색 환경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카멜레온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314p.
...줄리언에 따르면 그리스어 산문 작법 공부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에게 언어를 실용적으로 쓰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 산문 작법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쉽게 언어를 숙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어를 이용한 사고법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그리스어를 다른 언어의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운 개념으로 억지로 번역함으로써 그 의미를 한정해버리면, 사고의 패턴이 전혀 달라져버린다. 결국 상당히 평이하고 일반적인 개념이 엉뚱한 개념으로 바뀌는가 하면, 그 개념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개념이 생생하게 살아나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리스어 개념을 영어로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곤란을 겪고는 한다. 불을 뜻하는 라틴어의 인켄디움(incendium)은 프랑스 사람들이 담배에다 붙이는 푀(feu)와는 다르다. 이 둘은 불은 불이라도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무정하고 흉폭한 퓌르(pur)와도 다르다. 그리스어로 퓌르(pur)라고 할 경우, 이 불은 일리온(트로이아—옮긴이) 성 위로 오르는 불길,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적한 해변에서 파트로클로스의 화장단(火葬壇) 위로 솟아오르는 불길을 말한다.

315p.
...우리가 미국 땅에서 쓰는 말은 부랑자와 헤어핀의 말, 호박과 맥주의 나라에서 쓰이는 말, 에이허브 선장과 뚱보 기사 팔스타프와 간호사 갬프 부인의 말일 뿐이다. 내 일상의 추억을 표현하는 데는 그런대로 쓰이는 이 말도 내가 사랑하는 그리스어 개념을 나타낼 때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스어는 긴박한 생각, 기발한 생각의 변전과는 인연이 없는 언어이다. 그리스어는 행위의 표현에 사로잡힌 언어이다. 다른 행위로 인해 증폭된 포괄적 행위에 대한 흥취에 사로잡힌 언어, 사방의 고무(鼓舞)를 받으며 거침없이 전진하는 행위에 사로잡힌 언어, 인과율의 그물 속에서, 그 목적인 행위에 사로잡힌 언어인 것이다.

330p.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 있나? 어떤 사회에서 정의로움이 가능한 것은, 사회의 각 계급 조직이 제자리에서 기능하고, 각 계급 조직에 속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만족하고 있을 때뿐이다. 이런 사회의 경우, 자기의 위치에서 신분 상승을 꾀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공연히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다. 현명한 가난뱅이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명한 부자들 역시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350p.
...지극히 일반적인 여자는 열등한 피조물, 귀를 기울이고 듣기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동물이라는 다분히 그리스적 미신 때문이었다. 아르고스인들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통념은 어찌나 집요하게 사람들 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지 언어의 뼈대에도 남아있다. 나는 이러한 통념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그리스 속담을 하나 알고 있다. 남자에게는 친구가 있고, 여자에게는 친척이 있고, 짐승에게는 짐승이 있을 뿐이라는 속담이 그것이다.

368p.
.."버니가 담배를 안 피우는 건 고등학교 때 운동을 했기 때문이야. 곱게 늙은 축구 코치 같은 사람 있지, 왜? 그런 사람 밑에서 감수성이 예민할 때 훈련을 쌓은 사람은 담배 같은 걸 못 피우게 돼."

389p.
.."너무 기발한 생각이었지. 우리 인간에게는, 행동으로 직결되는 계획을 머리로 짤 경우 지나치게 똑똑한 척하는 경향이 있어. 문서로 작성할 경우 그런 폐단은 없어지지. 균형을 생각하거든. 내 경우가 바로 전자에 속해.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니까, 고심해가면서 짠 계획이 이게 아니다 싶은 거야. 왜? 균형 감각을 무시한 계획이라서 너무 복잡하거든."

398p.
.."너는 거기에서 틀리고 있어. 우리가 완벽한 논리적인 방법을 통해 어떤 목적지에 이르려 하면서 일의 순서를 지나치게 꼼꼼하게 계획해둘 경우 그 논리적인 방법이 우리의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이 될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성적인 사람의 눈에는 이성적으로 계획한 일의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게 보인다는 말이야. 그러나 우연, 혹은 우연이 가져오는 행운은? 그건 보이지 않아. 예측 불가능, 비인위적인 것이야. 우리 입장에서 한번 따져보자. 우리가 버니를 따라다니는 게 좋겠어, 아니면 버니가 자기의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주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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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p.
..오스테를리츠 역, 수업이 일찍 끝나는 화요일이나 금요일이면 자주 그곳에 간다. 떠나는 열차를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감흥이 있다. 난 사람들의 감정을 구경하기 좋아한다. 그래서 텔레비전 축구 중계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골이 들어가고 선수들이 키스하고, 팔을 벌리며 내달리고, 서로 뒤엉켜 얼싸안는 그 순간이 못 견디게 좋다....

18p.
...엄마는 한숨을 푹 쉬면서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고 대답했다. 한때는 그런 대답을 들으면 그런가 보다 했지만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맨 처음 튀어나오는 대답은 그저 물음에 대한 회피일 때가 많다는 것을.

27~28p.
..말하기, 난 그게 참 싫다. 말은 항상 내 본의와 다르게 튀어나오고, 새어나오고, 흐트러지는 것 같다. 내가 어휘력이 달리는 편은 아니니, 단어나 정의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면, 말들은 요동치고 흩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나 의견을 서로 나누는 일을 회피하고 그저 남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걸로 만족한다. 지나친 것, 넘치는 것, 나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자꾸자꾸 불려나간 말들을 혼자 속에 묻어둔다.

57p.
..이제 나는 똑똑히 안다. 이미지는 몰아낼 수 없다. 배 속 깊숙이 파여 있는 보이지 않는 구멍들은 더욱더 몰아낼 수 없다. 이슥한 밤이나 이른 새벽에 불현듯 깨어나는 추억들도, 울림들도, 우리는 내치지 못한다. 비명의 메아리를 몰아내지 못함은 물론이요, 침묵의 메아리는 더욱더 그럴 수 없다.

108~109p.
...그래서 사람들은 제 집에 머문다. 작은 아파트에 자그마한 가구를 들여놓고 작은 밥그릇, 작은 커튼 등등에 매달려 사는 것은 현기증 때문이다. 위를 보면 이런 물음을 품지 않을 도리가 없고, 그 모든 것 안의 우리, 작디작은 우리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 또한 피할 도리가 없으므로.

140p.
..그 애를 보고 있으면 꼭 아주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 같다. 사막을 가로질러, 대양을 건너, 벗은 발로 산길을 걷고, 국도를 따라 수십 킬로미터를 지나온 사람 같다. 그 애는 머나먼 곳에서 돌아온 것이다.
..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토에서, 하지만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돌아왔다.

184p.
..문법이 규칙과 제약의 집합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실수하는 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법은 이야기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고 혼란과 유기를 감추며 구성요소를 이어주고 상반되는 것을 비교한다. 문법은 세상을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구성하는 근사한 수단이다.

249p.
..전에는 ‘사정‘에 존재 이유, 숨겨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그런 의미가 세상의 구조를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이유, 나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그런 면에서 문법은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공부를 하면 그 논리를 파헤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일종의 기만이다. 숱한 세월을 거쳐 이어온 기만, 이제는 나도 인생이 휴지休止와 불균형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한 연속에서, 질서는 그 어떤 절박한 필요에도 결코 부응해주지 않는다.

272p.
..노를 만나기 전에 나는 폭력이 고함, 구타, 싸움, 피를 동반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폭력이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으며 때로는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폭력은 상처를 은폐하는 시간, 불가피하게 이어지는 나날들, 결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다. 폭력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폭력은 입을 다물고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폭력은 설명을 찾을 수 없는 것, 영원히 불투명하게 남는 바로 그것이다.

277p.
..그래서 나는 폭력이 바로 여기에, 엄마가 나에게 행할 수 없는 그 불가능한 몸짓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원히 유예된 그 몸짓에도 폭력은 깃들어 있다.

288p.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을 만큼 몸이 가벼웠고 머릿속은 고요했다. 머릿속이 그렇게 고요하고 명철했던 적은 없었다. 이제 그 안에는 단어들이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몸짓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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