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
..오스테를리츠 역, 수업이 일찍 끝나는 화요일이나 금요일이면 자주 그곳에 간다. 떠나는 열차를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감흥이 있다. 난 사람들의 감정을 구경하기 좋아한다. 그래서 텔레비전 축구 중계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골이 들어가고 선수들이 키스하고, 팔을 벌리며 내달리고, 서로 뒤엉켜 얼싸안는 그 순간이 못 견디게 좋다....

18p.
...엄마는 한숨을 푹 쉬면서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고 대답했다. 한때는 그런 대답을 들으면 그런가 보다 했지만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맨 처음 튀어나오는 대답은 그저 물음에 대한 회피일 때가 많다는 것을.

27~28p.
..말하기, 난 그게 참 싫다. 말은 항상 내 본의와 다르게 튀어나오고, 새어나오고, 흐트러지는 것 같다. 내가 어휘력이 달리는 편은 아니니, 단어나 정의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면, 말들은 요동치고 흩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나 의견을 서로 나누는 일을 회피하고 그저 남들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걸로 만족한다. 지나친 것, 넘치는 것, 나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자꾸자꾸 불려나간 말들을 혼자 속에 묻어둔다.

57p.
..이제 나는 똑똑히 안다. 이미지는 몰아낼 수 없다. 배 속 깊숙이 파여 있는 보이지 않는 구멍들은 더욱더 몰아낼 수 없다. 이슥한 밤이나 이른 새벽에 불현듯 깨어나는 추억들도, 울림들도, 우리는 내치지 못한다. 비명의 메아리를 몰아내지 못함은 물론이요, 침묵의 메아리는 더욱더 그럴 수 없다.

108~109p.
...그래서 사람들은 제 집에 머문다. 작은 아파트에 자그마한 가구를 들여놓고 작은 밥그릇, 작은 커튼 등등에 매달려 사는 것은 현기증 때문이다. 위를 보면 이런 물음을 품지 않을 도리가 없고, 그 모든 것 안의 우리, 작디작은 우리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 또한 피할 도리가 없으므로.

140p.
..그 애를 보고 있으면 꼭 아주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 같다. 사막을 가로질러, 대양을 건너, 벗은 발로 산길을 걷고, 국도를 따라 수십 킬로미터를 지나온 사람 같다. 그 애는 머나먼 곳에서 돌아온 것이다.
..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토에서, 하지만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돌아왔다.

184p.
..문법이 규칙과 제약의 집합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실수하는 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법은 이야기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고 혼란과 유기를 감추며 구성요소를 이어주고 상반되는 것을 비교한다. 문법은 세상을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구성하는 근사한 수단이다.

249p.
..전에는 ‘사정‘에 존재 이유, 숨겨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그런 의미가 세상의 구조를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이유, 나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그런 면에서 문법은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공부를 하면 그 논리를 파헤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일종의 기만이다. 숱한 세월을 거쳐 이어온 기만, 이제는 나도 인생이 휴지休止와 불균형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한 연속에서, 질서는 그 어떤 절박한 필요에도 결코 부응해주지 않는다.

272p.
..노를 만나기 전에 나는 폭력이 고함, 구타, 싸움, 피를 동반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폭력이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으며 때로는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폭력은 상처를 은폐하는 시간, 불가피하게 이어지는 나날들, 결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다. 폭력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폭력은 입을 다물고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폭력은 설명을 찾을 수 없는 것, 영원히 불투명하게 남는 바로 그것이다.

277p.
..그래서 나는 폭력이 바로 여기에, 엄마가 나에게 행할 수 없는 그 불가능한 몸짓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원히 유예된 그 몸짓에도 폭력은 깃들어 있다.

288p.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을 만큼 몸이 가벼웠고 머릿속은 고요했다. 머릿속이 그렇게 고요하고 명철했던 적은 없었다. 이제 그 안에는 단어들이 없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몸짓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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