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어 시간에 줄리언 모로 교수가 자주 하던 말이다. 나는 그가, 우리의 정신적 습관을 힘써 가꾸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의 음모를 고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 듯하다....
35p. ..튤립. 나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리스 문자를 보면서 튤립을 생각했다. 그리스에 튤립이 있었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터였다. 그리스 문자 프시(Ψ)는 튤립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 갑자기 빽빽한 알파벳의 숲에서 검은 튤립이 무수히 튀어오르기 시작하면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제멋대로 무늬를 만드는 것 같았다.
74p. ..혼자 있을 때마다 나를 괴롭힌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신경쇠약이었다. 말하자면 흔한 불안감 혹은 과장된 자기혐오증 같은 것에 시달리고는 했던 것이다. 내 입으로 뱉은 험한 말 혹은 어리석은 말이 그 이상으로 명징하게 나를 겨냥하고 되돌아왔다. 나 자신을 타이르기도 해보았고,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오래전에 남에게 안긴 모욕, 은밀하게 경험하던 죄의식, 당혹감. 이런 것들이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씩 되살아나 나를 괴롭혔다....
85~86p. .."내가 자네들의 선생이 된 것은, 내가 자네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우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극도로 친밀했지만, 표면적으로는 냉담하고 사무적이었다. 그는 우리가 지닌 가장 매력적인 자질들을 제외한 우리의 어떤 점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그 매력적인 자질이란 우리의 모든 지루하고 비호감스러운 특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그가 가꾸고 확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줄리언이 의도하는 이 매력적인 수준에 나 자신을 맞추는 일에 굉장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결국 이 때문에 나는 거짓말로 자신을 교묘하게 방어하는 이상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우리의 전체성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발명한 덕목인 게니스 그라투스(genis gratus), 코르포레 글라벨루스(corpore glabellus), 아르테 물티스키우스(arte multiscius), 에트 포르투나 오풀렌투스(et fortuna opulentus), 즉 고운 얼굴, 부드러운 살빛, 충분한 교양 그리고 유복함을 통해서만 우리를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까지도 맹목적으로 이런 문맥에서 읽으려는 경향까지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버니가 지니는 현실적, 실재적 문제까지도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 바로 그런 문맥에서 문제의 핵심을 읽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167~168p. ..하얀 하늘. 지평선에서 사라지는 나무 그림자. 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 옆으로 늘어져 있는 두 손은 도무지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나에게는 그날의 지평선이 그렇게 생소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지워버림으로써, 우리를 외로운 모습으로, 버림받은 모습으로,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의 미완성 풍경화—거대한 숲처럼 자리 잡은 한 그루 나무의 윤곽, 배경이 그려지지 못한 화면에 불쑥 솟아 있는 가로등과 굴뚝—속에 덜렁 남겨놓은 지평선. 그런 지평선이 우리를, 낯익은 이정표가 있기는 하되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너무 제멋대로 흩어져 있어서 그것이 없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공허하게 하는 기억상실의 땅에 버려놓은 것 같았다.
175p. ..버니의 성격이 지니는 이 같은 비현실성 혹은 만화 같은 측면이야말로 그가 풍기던 매력의 비밀이었다. 그의 죽음이 햄든의 비극적인 사건이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비밀 때문이었다. 위대한 코미디언이 그렇듯이, 그는 자기 주위를 제 나름의 색깔로 칠했다. 그는 자기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냈다. 그래서 낙타를 탄 버니도 있을 수 있었고, 아기를 보고 있는 버니, 심지어는 우주의 버니도 가능했다. 그런데 죽고 나니 바로 이러한 그의 인상이 굳어지면서 전혀 다른 것으로 발전했다. 그는 비극적인 역할을 맡는, 관중들에게 낯익은 재담꾼이 된 것이다.
320p. ..줄리언은 모든 종류의 어려운 상황에 필요한 적절한 반응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늘 그에게서, 진심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자기의 반응을 우아해 보이게 하는 데 더 신경을 쓴다는 인상을 받고는 했다....
344p. .."아니, 알 거야. 너는 저 힘과 쾌락의 분류(奔流)를 알고 있어. 비밀을 가진다는 것, 자기 손으로 세상을 다스리면서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너도 알고 있어. 세상이 문득 넉넉해 보이던 순간을,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던 순간을 알고 있어."
370~371p. ..줄리언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낭만적인 측면에서 과장하게 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사랑했다. 내가 세상만사를 아름답게 윤색하고 싶다는 유혹, 세상만사를 다시 빚고 싶다는 유혹, 세상만사를 용서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 것은 바로 그와 함께 있을 때였다. 내가 그런 유혹을 느꼈던 까닭은 줄리언 자신이 정감과 지혜와 용기와 매력을 부여함으로써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자기 주위의 일상사를 다시 빚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사랑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은 물론, 내가 그 정반대의 극단으로 방향을 틀어 생각해보는 것도 쉬운 일이다. 이제 나는 줄리언이 지닌 매력의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로 느끼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접근해 있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열등감을 우월감과 오만으로 바꾸어놓는 묘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타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에서 그런 교육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충동을 성취하기 위해 그런 교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측면에 관한 한, 나는 어느 범위까지는 어느 정도 정확하게 체계를 세워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의 개성이 지니는 근본적인 마력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처음 만날 때의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자 하는데, 이 까닭 역시 이로써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에게 그는 처음에 그랬듯이 지금도 골목 어귀 같은 데서 불쑥 나타나 꿈을 이루고 싶으냐고 묻는 노현자와 같은 존재이다.
372~373p. .."줄리언은 말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다 골라 먹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만 상자에 남겨두는,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로 들리기는 하나, 나는 줄리언의 개성을 이렇게 정확하게 지적한 은유를 알지 못한다. 내가 줄리언과 함께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당시 조르주 라포르그 교수는 다소 퉁명스럽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줄리언은 영원히 일급 학자는 되지 못할 거야. 왜냐? 사물을 보되 자기가 선택하는 측면에서만 보거든." ..내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고, 가령 두 가지 측면, 예술이나 미학 같은 데만 자기 관심의 초점을 집중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묻자, 라포르그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름다운 것에 사랑을 쏟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의미 있는 것과 맺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피상적인 것이라네. 나는 특정 측면, 자기가 좋아하는 측면에만 선택적으로 관심을 쏟는다고 해서 줄리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야.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측면을 무시한다고 줄리언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지."
413p. ...줄리언과의 이별이 헨리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헨리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우리와 자기 자신에게 줄리언이 가르쳤던 의리, 경건, 성실, 희생 같은 극도로 차가운 원칙은 따를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어떤 고상한 제스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앨버말의 벽거울에 비치던, 헨리가 권총을 자기 관자놀이에 갖다 대던 모습을 잘 기억한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정신은 승리의 순간을 향한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얼굴은 흡사 도약대 끝으로 다가가는 하이 다이버의 얼굴과 같았다. 눈을 꼭 감은 채 도약대 끝으로 다가가면서 물을 가르고 뛰어들게 될 순간을 기다리는 환희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418p.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나는 제임스 1세 시대의 희곡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웹스터도 읽었고 미들턴도 읽었으며 터너도 읽고 포드도 읽었다. 전공치고는 묘하다는 사람이 많았으나 내게는 촛불 아래로 드러나는 무정한 그 시절의 세계—죄지은 자는 벌을 받지 않고, 순진무구한 자는 자주 파멸을 맞곤 하는—가 좋았다. 《불만》 《하얀 악마》 《실연》 같은 희곡의 제목도 내게는 묘하게 매혹적이고도 아름다웠고 때로는 사악했다. 나는 여백을 메모로 빽빽하게 채우면서 미친 듯이 읽었다. 제임스 1세 시대의 작가들에게는 종말론적 위기가 감돌았다. 그들은 악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악이 교묘한 트릭을 통하여 선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야말로 썩어버린 이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427p. .."줄리언이 하던 말이 생각나는군. 유령 같은 게 진짜로 있다는 거야.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유령 이야기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대. 그러니까 우리 역시 호메로스처럼 유령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거지. 줄리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그 이름을 다르게 부르고 있을 뿐이래. 추억, 무의식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래."
433p. ...파장과 에너지가 아니라면 죽음은 대체 무엇일 수 있는가? 아득한 옛날에 사멸한 별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별빛 같은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 수 있는가? ..이것은 줄리언이 하던 말이다. 《일리아스》 강의 시간,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꿈에 나타나는 대목에서 그가 하던 말이다. 아킬레우스가—유령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사랑하는 친구의 목을 껴안으려 하자 유령이 바로 사라지고 마는 이 대목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줄리언은 이런 말을 했다. 유령은 우리 꿈을 통해서 나타난다. 왜냐? 꿈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날아온, 사멸한 별빛이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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