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p. ..나는 ‘공정‘보다 ‘불평등‘과 ‘격차‘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공정은 사회구조의 모순이 결부된 문제라기보다 게임 규칙에 관한 문제다.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규칙이 중요하겠지만 그 게임에 참여할 수 없거나 배제된 사람에게 규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정한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공정은 각 개인에게 다른 무게를 지닌다. 대기업 입사라는 게임에 참여하기 힘든 지방대 출신 청년에게 취업 과정에서 공정 여부는 큰 의미가 없다. 서울 주요 대학 입시에 원서를 내기 어려운 중하위권 학생들에게 정시와 수시 비중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13p.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치는 사람도 있느냐는 질문에 오창익 국장은 단호하게 "없어요"라고 답했다. 한국 사회에 굶어 죽는 사람은 이제 없다는 것이었다. 인권 전문가마저 고전적 의미의 아사는 사라졌다고 보고 있었다. 오창익 국장은 다만 ‘밥은 먹지만 피자는 못 먹는다‘는 말을 했다. ‘밥은 먹지만 치킨은 못 먹는다‘는 말도 했다. 굶지는 않지만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굶지 않는다고 인간으로서 존엄하냐는 건 다른 질문"이라고 말했다.
92p. ..이들의 한 달은 덧셈과 뺄셈이다. 매달 말일 기초생활수급비가 들어오는 찰나의 덧셈이 끝나면 뺄셈이 연속된다....
93p. ..이들의 사칙연산에 곱셈과 나눗셈은 없다. 갖고 있다는 이유로 가격이 오르고 이자가 붙는 물건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그나마 자산을 꼽자면 월세 보증금이 있다. 그것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다. 복리의 마법도 없다.
104p.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은 현진씨의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표현이었다. 그는 인터뷰하는 내내 몇 번이고 소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고기 부위나 조리법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소고기‘를 구워 먹고 싶다고 할 뿐이었다.
112p. ..수급비 65만 원을 나누는 작업은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병사들을 분류하는 일과 같다. 위급한 곳부터 차례로 틀어막는다. 신속하고 냉정해야 한다. 월세를 밀리면 민정씨는 AI 스피커를 챙겨 길거리에 나앉아야 한다. 또 비급여 진료비를 따로 남겨두지 않으면 스피커에 대고 살려달라고 외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식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146p. ..여든 넘게 살아오며 할머니는 기억할 것과 잊을 것을 빨리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지관에서 주는 밥을 입 안에 넣으며 하나둘 기억에서 지울 것들도 삼켰다....
182p. ...쉰네 살 승수씨는 대학동에서 10년간 살면서 방문을 열고 밥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틈새로 넘어오는 음식 냄새를 그의 이웃이 정겹게 느꼈을지 알지 못한다. 한 사람이 밥을 먹을 때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이 증오하게 되는 공간이라면 그곳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2p. ..식사를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의 식탁과 삶. 앞서 말했지만 처음부터 이를 핵심 주제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영양 취약 계층을 만나고 식사 사진을 받고 이를 토대로 내부 논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좁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주제는 ‘가난한 사람은 잘 먹지 못한다‘에 비해 훨씬 힘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이 잘 먹지 못한다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식사를 선택할 수 없고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한다는 건 누구나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는 문제다.
222p. ..어느 주장이 옳은지와 별개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빈자는 기준을 넘어선 안 된다.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그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좋은 음식을 먹어선 안 되고 브랜드 제품을 써선 안 된다. 도움에 감사하며 약자의 포지션에 머물러야 한다. 그 기준을 넘어설 경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빈곤한 식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 사회가, 자기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와 같다.
224p. .."내 몸 하나 간수하고 투병 생활하는 것도 힘든데 내가 뭐라고 상차림에 사진까지…. 나 그냥 바닥이나 책상에 막 놓고 먹어요. 약 때문에 억지로 먹고 대충 먹다 말고 또 똑같은 반찬을 보면 밥 먹기가 싫어요. 그래도 상 놓고 차려 먹어보니 그 나름 괜찮았어요. 이제 상 놓고 먹으려고요. 말씀드리고 나니 좀 낫군요. 며칠 동안 안 하던 짓 한다고 참 애썼어요. 내일부터는 사진 안 보낼게요. 감사합니다."
230p. ..나는 이런 현상이 선진국 진입 단계에 이른 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정치, 경제, 사회 측면에서 여러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각 개인에게 추상적 정의는 큰 의미가 없다. 개인에게 선진국에 산다는 건 그냥 ‘잘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잘산다는 건 물질적인 여유와 풍족함을 누리며 산다는 의미가 가장 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쉽게 죽지 않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사회가 선진국이다. 지금 한국에서 생각하는 생명의 가치, 목숨의 가치는 수십년 전보다 훨씬 높아지고 소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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