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p. «칼날»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너무나 바르고 너무나 옳은 그 생각들은 아들을 또 얼마나 괴롭힐 것인가? 사회에 나갔을 때 아들은 무서운 혼란을 맞을 것이 뻔했다.
76p. «우주여행» ..그는 달에 세워질 천문대에서 일할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달은 황금색의 별세계였다. 그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끔찍하다고 했다. 그의 책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눈물도 보람 없이 흘려야 하고, 마음은 억눌리고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일 끔찍한 일은 갖고 있는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다. 지섭은 다시 도도새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93p.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139p.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 영희가 이 시간에 어디서 어떤 식탁을 대하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우리의 밥상에 우리 선조들 대부터 묶어 흘려보낸 시간들이 올라앉았다. 그것을 잡아 칼날로 눌렀다면 피와 눈물, 그리고 힘없는 웃음소리와 밭은기침 소리가 그 마디마디에서 흘러 떨어졌을 것이다....
143p.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사막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이다. 어두울 녘에 모래 섞인 바람이 분다. 선 하나로 표시될 그 지평 끝에 내가 알몸으로 서 있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팔을 안으로 끌어 들였다. 머리도 반쯤 숙여 나의 머리카락이 나의 가슴을 덮었다. 눈을 감고 열을 세면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바람 부는 회색의 지평선만 남는다. 이것이 내가 아는 죽음이다....
166p. «육교 위에서» ..두 사람에게 이 사회는 괴물 덩어리였다. 그것도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괴물 덩어리였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저희 스스로를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으로 보았다. 기름은 물에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도 합당한 것은 못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두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묻어 굴러간다는 사실이었다.
179p. «육교 위에서» ...동생 머리맡에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내가 갖다 놓은 것이다. 동생의 아이들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사람을 제일 약하게 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웃고 있었다.
278p. «클라인 씨의 병» ...그는 부를 생산이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물에 비유하고, 그것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한 곳에 괴어 썩어 버린다고 말했다. 그 말을 받아 누가 꽤 진지한 목소리로 "역사와 같군요"라고 말했는데,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 부의 생산자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란 점입니다"라고 했다....
295p. «클라인 씨의 병» ..."바다에서 제일 좋은 것은 바다 위를 걷는 거래.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자기 배로 바다를 항해하는 거지. 그다음은 바다를 바라보는 거야.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 우리는 지금 바다에서 세 번째로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307p.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나는 스프링보드를 몇 번 구르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풀 깊은 바닥은 아직도 어두웠고 물은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일 분가량 잠수해 있었다. 풀 밑바닥 모퉁이에 몸을 오그리고 앉아 느끼는 일 분 동안의 숨막힘, 일 분 동안의 거짓 절망이, 나중에 잃게 될 내 세계와 지금 멀어져 버리는 괴로움으로 변해 나를 죄어 왔다....
316p.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한여름 햇볕이 고민하는 사촌의 몸에 떨어졌다. 내 사고와 체질, 습성이 점점 국적 불명이 되어 간다고 그가 말한 적이 있다. 이 관찰 하나만은 그가 옳았다. 나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그가 인정한 셈이었다.
397p. 해설 ...환언하면 조세희의 소설들은 그 구조와 표현에 있어 선험적으로 대립적인 그의 세계관과 미학적 방법론을 실천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의 이 같은 대립이 뤼시 골드만의 ‘단절의 근거인 구성적 대립‘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골드만의 경우 이 ‘구성적 대립‘은 주인공의 타락과 세계의 타락 사이에 존재한 단절이 근원적일 때 비극이나 서정시가 되고, 그것이 없거나 우연적일 때 서사시나 설화를 이루며, 소설은 그 중간 지점에서 변증법적 성격을 띠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