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안다. ‘마음 놓고 행복해할 수 있는 때’ 같은 건 인생에 없다는 사실을. 행복은 계절처럼 큰 단위로 오지 않고 몇 달씩이나 지속되지도 않는다. 마감이 코앞이니 당분간만 우중충한 채로 지내겠다는 다짐은 영영 흐린 기분으로 살겠다는 말과 같다. 마감 뒤엔 또 다른 마감이. 숙제 뒤엔 또 다른 숙제가 있다. 그러니 바쁘더라도 요령껏 시간을 내서 틈틈이 행복해야 한다. 작고 귀여운 기쁨이라도 모아야 일상을 지킬 수 있는 법이다.... - P-1

..밥그릇, 칫솔, 탁상 거울, 집에서만 쓰는 안경. 매일 쓰는 것이 아름다워야 일상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언제까지 예쁜 카페나 근사한 숙소로, 비일상으로 도망칠 수는 없으니 일상을 가꿔야 한다. - P-1

..여러 사람의 다른 듯 비슷한 장소 궁합 풀이를 종합해 본 후에 나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됐는데, 바로 장소 궁합은 ‘그곳에서 내 모습이 어땠는지’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순수한 몽골 사람들처럼 맑아진 나, 일본 시골 할머니의 속도에 맞춰 행동하는 사려 깊은 나, 북유럽 사람처럼 담백한 일상을 보내는 나. 성공한 여행 서사에는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등장했다. 어떤 장소를 거듭 찾아가는 이유도 실은 거기에 데려다 놔야만 나오는 자신의 좋은 면을 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 P-1

...반면 W는 사진을 찍는 대신 손으로 그것들을 만져 보는 편이었다. 나무 이파리나 돌담을 아이처럼 툭툭 건드리며 걸었다. 그리고 장소를 떠나기 전엔 담배를 한 대 꼭 피웠다. 시간을 들여서 아주 오랫동안. 그건 뭐랄까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는 사람이 치를 법한 특별한 의식 같아 보였다. - P-1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필연적으로 유해해진다. 특히 내 마음에 여유가 없는 날이면 더더욱.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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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p.
..말했듯이 나에게는 무척 유용한 교훈을 준 일이었다. 나는 조시에게 ‘달라지는‘ 면이 있다는 것, 내가 그것에 적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 특성이 조시에게만 있는 게 아님도 알게 되었다. 매장 쇼윈도에 디스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면을 마련해 놓으려 한다는 것, 또 그 순간이 지난 다음에 그런 일시적 모습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 P-1

139p.
..어머니는 잠시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거 참 좋겠다.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지 않는 거.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거. 자꾸 지난 일을 돌아보게 되지 않는 거. 그러면 모든 게 훨씬 더......." 어머니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좋아, 클라라. 그럼 일요일에 같이 가는 거야. 하지만 내 말 명심해. 거기에서 사고가 생기면 안 돼." - P-1

225p.
.."울타리는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없앨 수 있지. 다른 데에 다시 세울 수도 있고. 하루 이틀 만에 지형 전체를 바꿀 수 있어. 울타리로 구획된 땅은 일시적이야. 무대 장치처럼 손쉽게 바꿀 수 있어. 나 전에 연극 했었단다, 알지. 가끔 꽤 괜찮은 극장에서도 했어. 삼류 극장에서도 했고. 울타리가 대체 뭐냐. 무대 장치지. 그게 영국의 좋은 점이야. 산울타리는 땅에 역사가 새겨져 있다는 느낌을 줘...." - P-1

308p.
"...문제는, 크리시 당신이 나하고 비슷하다는 거예요. 우리는 감상적인 사람들이죠.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죠.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당신도 알고요. 우리 세대 사람들은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놓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버려야 해요, 크리시. 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조시 내면에 클라라가 계속 이어 나갈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 P-1

423p.
...어쩌면 해는 세월이 지나고, 많은 것들이 달라진 다음에, 커피잔 아주머니와 레인코트 아저씨가 만난 것처럼 조시와 릭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 P-1

442p.
.."카팔디 씨는 조시 안에 제가 계속 이어 갈 수 없는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에게 계속 찾고 찾아봤지만 그런 것은 없더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저는 카팔디 씨가 잘못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카팔디 씨가 틀렸고 제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결정한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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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는 그랬지. 나는 고독했어. 외톨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척 고독했어. 왜냐하면 내가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때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나는 시간의 흐름이 없는 장소로 들어가고 싶었던 거야." - P-1

..나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강에 대해 생각하고, 조수에 대해 생각한다. 숲에 대해 생각하고, 용솟음치는 물에 대해 생각한다. 비에 대해 생각하고, 벼락에 대해 생각한다. 바위에 대해 생각하고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들은 모두 내 안에 있다. - P-1

.."자네도 참 답답한 인간이군. 계시란 그런 거란 말일세" 하고 샌더스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계시란 일상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거야. 계시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다만 관찰하는 이성에서 행동하는 이성으로 뛰어 옮겨 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나, 이 얼간이 같은 친구야?" - P-1

.."누구나 사랑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는 법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서글픈 기분이 드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상실한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P-1

...그녀는 시동을 걸었다가 멈추고, 무언가 생각하듯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시동을 걸고 주차장에서 빠져나간다. 시동을 멈췄다가 다시 걸 때까지의 공백이 너를 몹시 슬프게 만든다. 그 공백이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안개처럼 네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오랫동안 그것은 네 마음에 머물러 있다. 이윽고 너의 일부가 된다. - P-1

"..나는 말한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강함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강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치기 위한 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 내기 위한 강함입니다.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 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 나가기 위한 강함입니다." - P-1

.."미궁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 낸 것은, 지금 알려져 있기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이야. 그들은 동물의 창자를—때로는 인간의 창자를—꺼내서 그 형태로 운명을 점쳤어. 그리고 그 복잡한 형태를 찬양했어. 그러니까 미궁의 기본 형태는 창자야. 즉 미궁의 원리는 너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건 네 바깥쪽에 있는 미궁의 성격과도 서로 통하고 있어."
.."메타포?"
.."그렇지. 상호 메타포. 네 외부에 있는 것은 네 내부에 있는 것이 투영된 것이고, 네 내부에 있는 것은 네 외부에 있는 것의 투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서 넌 종종 네 외부에 있는 미궁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너 자신의 내부에 세팅된 미궁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거지. 그건 대개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 P-1

..일주일 전이었다면 난 이런 음악을 들어도 단 한 음정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어느 조그만 찻집에 들어가,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됐고, 덕분에 이 음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것은 그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처럼 생각됐다. - P-1

.."돌님과 이야기하는 데 음악이 방해되지는 않아?" 하고 청년은 나카타 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음악은 나카타에게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음악은 나카타에겐 바람과 같은 것이니까요." - P-1

..오시마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죠" 하고 대답했다. "그런 일은 있습니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가 일어납니다. 화학작용 같은 것이죠. 그리고 그후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거기에 있는 모든 눈금이 한 단계 위로 올라간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세계가 한 단계 더 넓어졌다는 것을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드물기는 합니다만, 가끔 있습니다. 연애와 마찬가지입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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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은 오랫동안 내린 비로 범람한 큰 강물과 닮았다. 지상의 표지판이나 방향판 같은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그 탁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이미 어딘가 어두운 장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비는 강 위로 계속 억수같이 퍼붓고 있다. 그런 장마 광경을 뉴스 같은 데서 볼 때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꼭 그대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라고. - P-1

..지금부터 백 년 뒤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나를 포함해서) 지상에서 사라져, 먼지나 재가 돼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여기 있는 모든 사물이 허무한 환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바람에 당장이라도 흩날려 없어질 것처럼 보인다. 나는 두 손을 펼치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 P-1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명無明의 세계는, 그 무거운 침묵과 혼돈은, 오래된 그리운 친구이자 지금은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다. 나카타 씨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글씨도 없고, 요일도 없고, 무서운 지사님도 없고, 오페라도 없고, BMW도 없다. 가위도 없고, 길쭉한 모양의 모자도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장어도 없고, 팥빵도 없다. 거기에는 전부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부분은 없다. 부분이 없으니까 이것과 저것을 바꿀 필요도 없다. 떼어 내거나 덧붙이거나 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일은 생각하지 않고, 전부의 속으로 몸을 담그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나카타 씨에겐 무엇보다도 고마운 일이었다. - P-1

..정오가 조금 지나자 검은 구름이 갑자기 머리 위를 뒤덮는다. 공기가 신비스러운 색깔로 물들어 간다. 곧이어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통나무집의 지붕과 유리창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른다. 나는 즉시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 빗속으로 뛰어든다. 비누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멋진 기분이다. 나는 큰 소리로 의미도 없는 말을 외쳐 본다. 크고 단단한 빗방울이 작은 돌멩이처럼 온몸을 때린다. 온몸에 따끔하게 느껴지는 통증은 종교적인 의식의 일부 같다. 그것은 내 뺨을 때리고, 눈꺼풀을 때리고, 가슴을 때리고, 배를 때리고, 페니스를 때리고, 고환을 때리고, 등을 때리고, 다리를 때리고, 엉덩이를 때린다.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아픔에는 분명히 아픔보다는 친밀한 정감이 깃들어 있다. 이 세계에서 내가 한없이 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것이 기쁘다. 갑자기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마신다. - P-1

.."자네는 이미 자네가 아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혀 위에서 천천히 음미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일세, 나카타 씨.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은 말이야." - P-1

...내가 원하는 만큼 오래오래 여기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읽고 싶은 책은 서가에 얼마든지 꽂혀 있고, 식료품도 충분하다. 그러나 여기가 한때의 통과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곳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너무나도 완벽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것은 지금의 나는 아직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아직 너무 이르다, 아마도. - P-1

.."이론적으로는 못 할 일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평온함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위협적인 거야. 그런 배반성을 잘 받아들이려면 나름의 준비와 경험이 필요해. 그러니까 우리는 일단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로 돌아가는 거야. 사회와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 P-1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는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 P-1

..그는 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길고 뾰족한 연필을 손에 들고 바라본다. 그 연필은 그의 신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물건처럼 보인다. - P-1

..나카타 씨는 오랫동안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나가노현에도 나카노구에도 바다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카타 씨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바다라는 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 상실해 왔음을 깨달았다.... - P-1

..그녀는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징의 대상은 아마도 언젠가의 시간이며, 어딘가의 장소다. 그리고 또 일종의 마음의 존재 방식이다. 그녀는 그와 같은 행복한 우연의 만남에서 빚어진 요정처럼 보인다. 영원히 상처 입을 리 없는 청순하고 순진무구한 상념이 그녀 주위에 다사로운 봄빛의 포자처럼 떠돌고 있다. 사진 속에서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1969년,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풍경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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