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p.
..나는 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내게 선물이었다.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경찰들은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울지 않는 것을 보고 수상하게 여겼을지도 몰랐다. 내가 울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리라. 복잡하게 뒤얽힌 내 생각은 거기까지 계산해놓고 있었다.
..나는 긴장했던 신경을 느슨히 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느끼고 있던 위압감을 풀어놓았다.
..성공했다.
..울음이 났다. 나는 LA로 가는 내내 눈물을 흘리는 데 성공했다.

124p.
..내가 읽은 모든 책은 어머니에 대한 뒤틀린 경의였다. 내가 푼 모든 미스터리는 어머니에 대한 숨겨진 사랑이었다.

151p.
..그 무렵의 나는 절대 타협할 줄 모르는 십대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최후의 수단이 있었다. 그것은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하며 병적으로 만들어낸, 언제나 유효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비장의 한 수였다. 그것은 세상만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내 마음으로 만들어낸 세계에 숨어드는 능력이었다.

165p.
..나는 자유시간을 강렬히 원했다. 자유시간이란 몽상하고, 내 운명이 충만하다는 느낌을 북돋우는 시간이었다. 자유시간이란 충동의 노예가 되는 시간이었다.

268p.
...그녀는 내 어머니의 변호사이자 끄나풀이었다. 그녀는 나를 알았다. 그녀는 한 죽은 극작가의 말을 인용해 나를 ‘가진 것은 미래뿐인 총알‘이라고 불렀다. 나에게 자기 연민이 부족한 것을 그녀는 이해했다. 앞으로 전진하려는 나의 기세를 꺾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혐오하는 이유도 알았다. 총알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총알은 빠르게 날아간다. 목표를 맞출 확률은 반반이다.
..그녀는 내가 어머니를 알게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죽었는지를 내가 찾아내길 원했다.

274p.
..그가 차를 세워둔 곳까지 배웅해주었다. 우리는 악수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스토너는 말을 아꼈다. 내 마음이 먼 곳에 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371p.
...나는 범죄가 순전히 감정이입에 기인하여 도처에서 발병하는 도덕적 전염병이라고 보았다. 범죄는 갈 곳을 잃은 남성적 에너지다. 범죄는 황홀경에 젖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집단적 희구이다. 범죄는 잘못 발달된 낭만적 희구이다. 범죄는 태만한 개인의 나태함과 무질서가 유행병과 같은 규모로 확대된 것이다. 자유의지는 존재한다. 인간은 자극에 반응하는 실험실의 쥐보다는 낫다. 이 세상은 좆같은 곳이다. 책임은 어쨌든 우리 모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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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3p.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의 관음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관음증이 다른 이들보다 특히 강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부인‘이 되거나 ‘내부인 시선‘을 얻으려는 열망이 강하다....

52p.
...저널리즘을 위한 만남에는 정신분석 치료를 위한 만남처럼 퇴행 효과가 있는 듯하다. 글의 주인공은 기꺼이 작가의 아이가 돼 작가를 자기 요구를 다 들어주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는 어머니로 여기고, 그런 어머니가 자기에 관해 좋은 말만 하는 기사를 써주리라고 기대한다. 물론 기사를 쓰는 기자는 엄격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절대 용서하지 않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83p.
...사회는 한편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도덕성과 다른 한편으로 위험할 정도로 무질서한 관대함의 두 극단 사이를 암묵적 합의를 통해 중개한다. 그 합의 덕분에 우리는 조용하고 신중한 조건을 지키며 매우 엄격한 도덕 규칙을 위반할 수 있다. 위선은 인간의 실수를 허용하고 겉보기에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질서와 쾌락의 요구를 조화시킴으로써 사회가 계속해서잘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다....

135p.
...앞서 나는 맥도널드가 페리 스미스나 조 굴드처럼 특유의 자기 창조를 통해 작가의 작업을 상당 부분 대신 해주는 논픽션 장르의 ‘타고난 주인공‘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삶에서 위대한 논픽션 작품으로의 변신 과정에 꼭 필요한 핵심 요소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작가가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주인공에게 근본적인 애착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변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조 굴드와 페리 스미스는 실제로 지루하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괴짜에 불과하지만, 논픽션 작가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흥미로운 인물로 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맥도널드한테는 그런 야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138~139p.
...내가 키일러의 파란색 바인더에서 알게 된 ‘인터뷰 대상의 진실‘은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환자의 진실‘과 비슷했다.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행동이나 성격과 상관없이 자기 이야기를 할 뿐이다. 정신분석가를 다른 정신분석가로 대체해도 아무 문제 없듯이 기자도 마찬가지다. 내 맥기니스와 키일러의 맥기니스는 같은 사람이었고, 내 맥도널드와 키일러의 맥도널드와 맥기니스의 맥도널드도 같은 사람이었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환자와 마찬가지로 인터뷰 대상은 작가와의 관계를 압도하고 주도한다. 정신분석가가 환자를 창조할 수 없듯이 기자도 인터뷰 대상을 창조하지 못한다....

170~171p.
...문학작품 속의 인물은 현실의 인간보다 포괄적이고 관념적으로 묘사되고, 단순하고 일반적(혹은 앞서 말했듯이 ‘신화적‘)이지만, 그 초자연적인 생생함은 명백한 불변성과 일관성에서 나온다. 반면에 현실 속 인간은 소설 속 인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모호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까다로워서 상대적으로 덜 흥미로워 보인다. 정신분석 치료는 신경증 환자가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흥미롭지 않을 자유‘를 환자에게 돌려주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 환자가 스스로 자기 존재를 문학적으로 구축한 구조를 허물고 환자가 사로잡힌 정교하고 예술적인 양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정신분석 행위가 환자를 하나의 소설에서 다른 소설로, 예를 들어 고딕 낭만주의 소설에서 가족을 배경으로 한 희극으로 옮겨 가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부 정신분석가도 포함한다)도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가에게 치료를 받아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프로이트의 작업이 그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는 사실을 안다.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들은 종종 치료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한다. 정신분석 치료가 환자의 삶에서 소설화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해당하는, 중재되지 않은 개성과 독특함의 심연을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196p.
...서신 교환은 일종의 연애다. 그것은 작고 폐쇄된 사적인 공간에서 이뤄지고–봉투에 든 종이 한 장이 그것의 매개체이며 상징이다–미묘하지만 명백하게 에로티시즘에 물들어 있다. 누군가와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 상대의 편지를 기다리게 되고, 익숙한 봉투를 볼 때 감정이 점차 강렬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솔직히 인정하자면 서신 교환의 주된 즐거움은 받는 기쁨보다는 답하는 기쁨에 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서신을 주고받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의 ‘편지 쓰는 사람‘이고, 편지가 오는 일이 중대한 사건이 되는 이유는 편지를 읽을 기회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쓸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199p.
...저널리즘에 진실성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인터뷰 대상의 눈먼 자아도취와 기자의 회의주의 사이의 긴장이다....

210p.
...독자는 소설가를 믿지 않을 상황에서도 논픽션 작가를 굳게 신뢰한다. 그런 만큼 논픽션 작가는 독자가 미리 관대함을 지불한 상품을 꼼꼼하게 완성해야 한다. 물론 순수하게 허구로만 이뤄진 책이 존재하지 않듯이 순수하게 사실만으로 이뤄진 책도 없다. 모든 소설이 현실에 의지하듯이 모든 논픽션은 예술에 의지한다. 소설가는 인간 공통의 경험을 든든한 기반으로 삼기 위해 상상력을 일정한 수준으로 제한해야 한다.(꿈은 제한되지 않은 상상력의 전형적인 예다. 그래서 꿈 이야기는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재미가 없다) 반면에 논픽션 작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문학의 서사적 장치를 작동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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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p.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은 자극의 연속이라 종종 진이 빠졌다. 미국 작가 도널드 리치(일본에 50년 이상 기주한 미국 출신의 영화 평론가―옮긴이)는 이렇게 적었다. "일본에서 산다는 건 절대로 당연한 삶도, 주목받지 않는 삶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이 일상과 바짝 밀착해 있기에 일본에 사는 외국인들은 경계를 풀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전류가 흐른다. 외국인은 늘 주목받고 평가당하고 눈에 띄고 판단되느라 정신없다. 나는 내 삶을 절대로 당연히 받아들일 수없는 이런 생활이 좋다."

155p.
...저는 인터넷으로 ‘신흥종교‘에 대해 검색하다가 일본에 연줄이 있는 예전 유도 선생님께 뭐라도 물으려고 연락했어요. 그런데 뭔가가 제 몸을 덮치는 것 같았어요.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다는 속담처럼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 저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람을 찾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정말 묘해서 그 기분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요. 물건을 잃어버려도 기분이 안 좋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없어졌다니 정말 처참했어요....

243~244p.
..실종자 가족들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두 배의 부담을 걸머진다. 처음에는 이 고난이 빚은 고통 때문이고 그다음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보편적 모습보다 한층 수준 높은 모습을 기대한다.
..우리는 당연히 인간으로서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대부분은 알든 모르든 대가를 원한다. 그 대가란 그들의 무력하고 곤궁한 모습 앞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팀은 자신의 고통과 공포심을 숨기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반면 제인 블랙맨은 주위에서 바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인은 고통을 마음껏 쏟아냈다. 어머니는 도움이 필요했고 도움을 받으면 진심으 로고마워했다. 덕분에 봉사자들은 자신들이 선의를 베푸는 사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249~250p.
..크리스타벨은 일본에서 외국인의 삶을 결정짓는 특징이 뭔지, 수많은 사회 부적응자들이 왜 일본을 찾는지 금세 깨달았다. 남들과 달라서 느낄 수밖에 없는 소외감이 외국인이어서 드는 더 크고 보편적인 소외감으로 상쇄되었다....

323p.
...오로지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영국과 미국의 법정과는 달리 일본의 법정은 범죄 동기를 상당히 중시한다. 범죄에 이르게 한 논리와 충동을 반드시 법정에서 입증해야 하고 그것이 용의자에게 선고를 내리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된다.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로는 부족하다. 일본의 재판부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요구한다. 그러면 형사에게는 용의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야 할 의무가 생긴다. 만약 실패하면 형사는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397p.
..검사는 유죄 판결률이 높은 이유는 용의자의 유죄가 확실할 경우에만 공판이 열리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즉 유죄냐 무죄냐는 공개된 법정이 아니라 수사받는 동안 밀폐된 수사실에서 결정된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존슨은 이렇게 기술했다. "일본 검사들은 유죄일 경우에만 기소해야 하며, 기소했다는 건 유죄가 거의 확실한 것이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일본 형사 재판은 법에서 규정하는 대항논리에 따라 다투고 겨루는 스포츠 경기라기보다 사소한 의견의 불일치조차 없는 빈껍데기 형식에 가깝다."

429p.
..팀과 오바라는 나이가 11개월 차이였고, 둘 다 보트를 소유했고, 둘 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 팀의 고집스러울 만큼 특이하고 복잡한 성격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호감과 존경을 느꼈지만 많은 이들은 역겨워했다. 도덕적 견지에서 팀은 기존 도덕성이 요구하는 명확한 태도를 거부했다. 그는 앞장서서 외치는 대신 느릿느릿 주위를 맴돌다가 남들은 그저 흑백으로만 보는 연민과 모호함 속에서 미묘하게 다른 음영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한 수 위였다. 구경꾼들은 이런 모습에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루시 블랙맨의 사망이 선악의 대비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예시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다른 사람도 아닌 루시의 아버지가 이번 사건에 복잡한 면이 있다면서 자기 딸을 죽인 살인마에게조차 공정하게 굴며 범인을 동정하자, 선악의 관념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정통 교리가 결여된 팀이 자신들을 모욕한다고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용납할 수 있는 감정을 뛰어넘었다는 이유로 팀을 죄인 취급하며 신성 모독한 자와 거의 동일시했다.

518p.
..인간은 단 하나로 수렴된 진실을 찾는 데 길들여져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청명한 보름달 같은 진실을 보려고 매달린다. 범죄 서적은 사진처럼 명료한 이미지를 전달하며, 대중은 껍질을 벗겨 소금을 뿌린 견과류처럼 건조하게 편집된 사연을 기대한다. 그런데 취재 대상으로서 오바라 조지는 빛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연기와 연무뿐이었고 외부에서 빛이 들어올 때만 잠시 밝아졌다. 다시 말해 껍질이 견과류가 가진 전부였으며 오직 그것만이 매혹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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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p.
..나는 거의 일평생을 지구와 평행하게 살아왔다. 드러누워서 책이나 텔레비전, 빌려온 비디오를 보았다.

45~46p.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모두들 꺼려하는 여자와 어울리는 관대한 나 자신‘에 도취되고 싶다는 몹시 불순한 마음으로 우쭐대며 그녀와 만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혐오스러운 나 자신.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반응한다.
..사고에 연속성이라는 게 없다. 그녀 자신의 역사도 그녀 안에 없다. 하물며 인류나 일본의 역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
..마치 음악과도 같은 인생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에는 지속성이 필요하다.

50p.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어버렸다. 그런 눈은 온갖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탐욕스럽게 번들거린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75p.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세계는 점점 쓸쓸해진다.

150p.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라도, 생각의 가장 안쪽과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는 본인조차 알 수 없다.
..막상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부인도 의사도 모른다.
..환자의 언어 건너편에 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누구도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성이나 언어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152p.
..어릴 적에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게 된 유리구슬 하나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을 때 느꼈던, 어쩔 도리 없는 쓸쓸함과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린 나의 작은 우주에서 소중한 물건이 사라질 때면 그 물건이 어딘가에 섞여 들었다가 다시 나온다거나, 오빠가 장난으로 훔쳐 간 것이라서 결국 호주머니에서 발견된다는 식의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작은 우주에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 감정은 소중한 물건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 쓸쓸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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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는 장비들을 꼼꼼히 점검해서 고장 난 곳을 고쳤다. 그리고 아버지는 고장 나기 전에 미리 장비를 뜯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어쩔 수 없이 고장이 나면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도 가르쳐주셨다. 무엇을 고장나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고치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북유럽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멀고도 먼 감정적인 거리는 어려서 형성되기 시작해서 날마다 강화된다. 누구에게도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는 문화에서 자라는 것,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지내니?‘ 하는 일상적인 인사도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어서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 말이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절대 입에 올리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고 배우는 문화 말이다. 완전히 고립된 공간에서 식량을 비롯한 자원이 점점 고갈되어가는 길고도 어두운 겨울을 지나면서, 불필요하게 서로를 죽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던 옛 바이킹 생존 전략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생물의 종이나, 새로운 무기물, 새로운 소립자, 새로운 분자, 혹은 새로운 은하계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리는 어느 과학자든 바라 마지않는 가장 높은 명예이자, 위대한 임무이다. 각각의 과학분야는 이름 짓는 관습에 적용되는 엄격한 규칙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 막 발견한 새로운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한 다음 지금까지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서 현대적이면서도 영구한 이미지를 암시하는 표현을 생각해내면 마침내 그 소중한 대상에 세례명을 붙일 수 있다. 그러고는 이 서투르게 이름 짓는 결과의 작은 부분이라도 앞으로 영원히 변치 않고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는 가망 없는 염원을 한다....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나보다 더 오래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내 나무도 그중 하나이다.

...그는 내게 "적어도 네 가지에서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혈액형이 있어서 잘못된 혈액을 보내면 "누군가가 죽기 때문에 완전히 그 혈액을 낭비해버릴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누군가의 죽음과 혈액의 낭비가 클로드의 마음속에서 분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비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병원은 아픈 사람을 가둬두고 그 사람이 죽거나 나을 때까지 계속 약을 주입하는 곳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누구도 치료할 수가 없었다.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 행동한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가루가 오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나만의 독특하고 별난 유전자들이 모여서 생긴 존재일 뿐 아니라 창조에 관해 내가 알게 된 그 작은 진실 덕분에, 그리고 내가 보고 이해한 그 진실 덕분에 실존적으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팽나무의 씨를 강화하는 광물질이 바로 오팔이라는 확실한 지식은, 누군가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그것이 알 가치가 있는 지식인지 아닌지는 오늘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느꼈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 나는 서서 그 사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싸구려 장난감이라도 새것일 때는 빛나 보이듯, 내 첫 과학적 발견도 그렇게 반짝였다.

..그곳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우리만이 열쇠를 갖고 있는 우리의 첫 실험실이었다. 작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것이었다. 나는 그 텅 빈 방을 우리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본 빌의 눈에 감탄했다. 과거의 꿈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있었지만 그는 우리의 새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 삶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버섯이 곰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남자의 성기가 곧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버섯의 머리는 그것이 엄청나게 맛있는 것이든 치명적인 독을 가진 것이든 더 복잡하고 완전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유기체에 부착된 생식기에 불과하다. 모든 버섯 머리 아래에는 길게는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균사 조직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흙덩이를 감싸며 그물처럼 퍼져서 땅의 모습을 보존한다....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거기서 사는 것이다....

..나는 잠들기 전에 하고 있던 생각을 마무리지었다. 이것이 내 인생이고, 빌은 내 가족이었다. 학생들은 계속 오고, 그리고 떠날 것이다. 학생들은 학생들이다. 어떤 학생들은 큰 희망을 품고 오고, 어떤 학생들은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애착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와 빌이고,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나머지는 모두 배경 소음에 지나지 않는 일들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잘난 척하고, 욕심 많고, 젠체하는 학계의 기대들로부터 해방시켰다. 나는 세상을 바꾸지도, 새로운 세대를 교화하지도, 내가 속한 기관에 영광을 가져다주지도 않을 것이다. 실험실에 몸을 담고, 모든 것, 육체와 영혼이 무너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그 밴에서 산 채로 기어나왔을 때 내가 가진 것을 확인해보니 중요한 것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신의였다....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비커와 온도계와 접지봉을 관리할 것이다. 내가 은퇴할 때 전부 다 쓰레기 취급 당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해는 절대, 절대 지지 않는다. 그냥 하늘 주변을 빙빙 도는 느낌이다. 가운데 서 있는 나를 중심으로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하늘에 낮게 뜬 채 빙빙 돌아갈 뿐이다. 삶은 조용하고 비현실적이 된다. 오늘이 며칠이고 지금이 몇 시인지를 확인하는 습관을 버리게 된다. 깰 때까지 자고, 배부를 때까지 먹고, 피곤해질 때까지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세 활동을 돌려가며 되풀이한다. 북극에서 얼마나 오래 일하는가에 상관없이 결국 있는 기간은 단 하루다. 그런 다음 겨울을 피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겨울에는 석 달 동안 밤이 계속되고 태양은 한 번도 뜨지 않는다. 나는 거기 없지만 그 이끼랑 그 새들, 그 사향소는 거기 남아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먹을 것을 찾아다닐 것이다.

...나는 절대 아물지 않는 이 상처가 신물 나게 지겹다. 누가 작은 친절만 베풀어도 그 빵부스러기를 따라가면 엄마의 부드러운 사랑과 할머니의 애정 어린 칭찬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유치한 내 마음이 죽을 만큼 싫다. 이제는 놀라지 않지만 매번 그런 실수를 할 때마다 상처받는 것은 변함없다. ‘이 여자는 내 의사지 엄마가 아냐.‘ 나는 자신에게 그렇게 엄하게 이른다. 그리고 이런 욕구를 갖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치욕을 느낀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는 어디에선가 일정을 관리하는 누군가가 우리 둘 사이의 시간이 정확히 12분 남았다고 정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의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그녀는 "산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수술실에 보내는 데 45초밖에 걸리지 않아요" 하며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가까운 곳에 이곳보다 더 많은 (심지어 더 정교한) 기계가 있는 병실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마음을 뺏긴다.
..그리고 그녀는 클린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아기 아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예를 들어 기절하거나 하면 말이죠. 그러면 그냥 옆으로 차버리고 하던 일을 계속할 겁니다." 클린트의 어머니가 필라델피아에서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였기 때문에 그는 다양한 난산에 관한 이야기를 저녁 먹으면서 일상적으로 듣고 커왔다. 그런 그가 기절할 위험은 없지만 그는 그 시나리오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퇴원하기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내가 자주 그렇듯이,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알고 있는 일이고, 내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N21을 타고 남서쪽으로 여행하면서 우리는 5년전 처음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되새겼다. 세상에서 가장 녹색이 많은 곳에 온 경험 말이다. 너무도 사방이 녹색으로 충만한 아일랜드에서는 녹색이 아닌 것이 오히려 눈에 띄었다. 길, 벽, 해안선, 심지어 양 한 마리 한 마리마저 녹색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거기 놓여서, 서로 너무도 다른 수많은 종류의 녹색을 광활한 풍경 속에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데 도움을 주는 소품처럼 보였다. 사방은 옅은 녹색, 짙은 녹색, 누르스름한 녹색, 초록빛이 도는 노란색, 푸르스름한 녹색, 잿빛 회색, 진짜 녹색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지구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이 우월한 생명체들에 의해 우리가 운 좋게도 수적 열세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누릴 수 있다. 딩글에 있는 토탄 늪 가운데 서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 다른 영장류가 이곳 해안에 도착하기 전 아일랜드는 어떤 곳이었을까 상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주에서 보면 그것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는 털복숭이 에메랄드처럼, 거대한 해양 플랑크톤 꽃 같은 땅처럼 반짝였을까?

...나는 누군가가 95세가 돼서도 죽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햇살이 눈부신 오늘 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병을 띄워 보내고 싶다. 누군가 기억해주길. 누군가 언젠가 내 손녀를 찾아서 이야기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부엌에 앉아 손에 펜을 쥔 채 창밖을 보던 그날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는 결정을 내리느라 바빠서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도, 창틀에 쌓인 먼지도 볼 겨를이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기를. 결국 할머니는 수십 년 먼저 손녀를 사랑해버리기로 결정했다고 그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기를. 그 아이에게 할머니가 햇빛을 받고 앉아서 나무를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너를 꿈꿨다고 누군가가 말해줄 수 있기를.

..그러나 나무는 그것 말고도 다른 데 이 영양분을 써야 할 곳이 많다. 늙은 이파리들을 대체하고, 감염된 곳을 치료하는 약도 만들고, 꽃과 씨앗도 생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원자재를 사용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원이 남아도는 일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이 자원을 찾기 위해 위로 아래로 뻗는 데엔 한계가 있다. 결국 충분히 높이, 충분히 깊게 뻗지 못한 가지와 뿌리는 그 영양분들을 확보하기 위해 쓰는 자원보다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더 적어지는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의 소설가, 페미니스트-옮긴이)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과학자로서 나는 정말 개미에 불과하다. 다른 개미들과 전혀 다르지 않고, 미흡하지만 보기보다 강하고, 나보다 훨씬 큰 무엇인가의 일부라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함께 우리의 손주들의 손주들이 경외감을 느낄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있고, 그것을 건설하는 동안 할아버지들의 할아버지들이 남긴 투박한 지시사항을 날마다 들여다본다. 과학계를 이루는 작지만 살아 있는 부품으로서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수없는 밤들을 지새웠다. 내 금속 촛불을 태우면서, 그리고 아린 가슴으로 낯선 세상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오랜 세월을 탐색하며 빚어진 소중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나도 누구에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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