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p. ..나는 거의 일평생을 지구와 평행하게 살아왔다. 드러누워서 책이나 텔레비전, 빌려온 비디오를 보았다.
45~46p.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모두들 꺼려하는 여자와 어울리는 관대한 나 자신‘에 도취되고 싶다는 몹시 불순한 마음으로 우쭐대며 그녀와 만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혐오스러운 나 자신.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반응한다. ..사고에 연속성이라는 게 없다. 그녀 자신의 역사도 그녀 안에 없다. 하물며 인류나 일본의 역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 ..마치 음악과도 같은 인생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에는 지속성이 필요하다.
50p.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어버렸다. 그런 눈은 온갖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탐욕스럽게 번들거린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75p.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세계는 점점 쓸쓸해진다.
150p.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라도, 생각의 가장 안쪽과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는 본인조차 알 수 없다. ..막상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부인도 의사도 모른다. ..환자의 언어 건너편에 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누구도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성이나 언어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152p. ..어릴 적에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게 된 유리구슬 하나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을 때 느꼈던, 어쩔 도리 없는 쓸쓸함과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린 나의 작은 우주에서 소중한 물건이 사라질 때면 그 물건이 어딘가에 섞여 들었다가 다시 나온다거나, 오빠가 장난으로 훔쳐 간 것이라서 결국 호주머니에서 발견된다는 식의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작은 우주에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 감정은 소중한 물건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 쓸쓸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