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p.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은 자극의 연속이라 종종 진이 빠졌다. 미국 작가 도널드 리치(일본에 50년 이상 기주한 미국 출신의 영화 평론가―옮긴이)는 이렇게 적었다. "일본에서 산다는 건 절대로 당연한 삶도, 주목받지 않는 삶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이 일상과 바짝 밀착해 있기에 일본에 사는 외국인들은 경계를 풀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전류가 흐른다. 외국인은 늘 주목받고 평가당하고 눈에 띄고 판단되느라 정신없다. 나는 내 삶을 절대로 당연히 받아들일 수없는 이런 생활이 좋다."
155p. ...저는 인터넷으로 ‘신흥종교‘에 대해 검색하다가 일본에 연줄이 있는 예전 유도 선생님께 뭐라도 물으려고 연락했어요. 그런데 뭔가가 제 몸을 덮치는 것 같았어요.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다는 속담처럼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붕 뜨더니 저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람을 찾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정말 묘해서 그 기분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요. 물건을 잃어버려도 기분이 안 좋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없어졌다니 정말 처참했어요....
243~244p. ..실종자 가족들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두 배의 부담을 걸머진다. 처음에는 이 고난이 빚은 고통 때문이고 그다음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보편적 모습보다 한층 수준 높은 모습을 기대한다. ..우리는 당연히 인간으로서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대부분은 알든 모르든 대가를 원한다. 그 대가란 그들의 무력하고 곤궁한 모습 앞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팀은 자신의 고통과 공포심을 숨기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반면 제인 블랙맨은 주위에서 바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인은 고통을 마음껏 쏟아냈다. 어머니는 도움이 필요했고 도움을 받으면 진심으 로고마워했다. 덕분에 봉사자들은 자신들이 선의를 베푸는 사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249~250p. ..크리스타벨은 일본에서 외국인의 삶을 결정짓는 특징이 뭔지, 수많은 사회 부적응자들이 왜 일본을 찾는지 금세 깨달았다. 남들과 달라서 느낄 수밖에 없는 소외감이 외국인이어서 드는 더 크고 보편적인 소외감으로 상쇄되었다....
323p. ...오로지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영국과 미국의 법정과는 달리 일본의 법정은 범죄 동기를 상당히 중시한다. 범죄에 이르게 한 논리와 충동을 반드시 법정에서 입증해야 하고 그것이 용의자에게 선고를 내리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된다.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로는 부족하다. 일본의 재판부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요구한다. 그러면 형사에게는 용의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야 할 의무가 생긴다. 만약 실패하면 형사는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397p. ..검사는 유죄 판결률이 높은 이유는 용의자의 유죄가 확실할 경우에만 공판이 열리기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즉 유죄냐 무죄냐는 공개된 법정이 아니라 수사받는 동안 밀폐된 수사실에서 결정된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존슨은 이렇게 기술했다. "일본 검사들은 유죄일 경우에만 기소해야 하며, 기소했다는 건 유죄가 거의 확실한 것이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일본 형사 재판은 법에서 규정하는 대항논리에 따라 다투고 겨루는 스포츠 경기라기보다 사소한 의견의 불일치조차 없는 빈껍데기 형식에 가깝다."
429p. ..팀과 오바라는 나이가 11개월 차이였고, 둘 다 보트를 소유했고, 둘 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 팀의 고집스러울 만큼 특이하고 복잡한 성격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호감과 존경을 느꼈지만 많은 이들은 역겨워했다. 도덕적 견지에서 팀은 기존 도덕성이 요구하는 명확한 태도를 거부했다. 그는 앞장서서 외치는 대신 느릿느릿 주위를 맴돌다가 남들은 그저 흑백으로만 보는 연민과 모호함 속에서 미묘하게 다른 음영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한 수 위였다. 구경꾼들은 이런 모습에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루시 블랙맨의 사망이 선악의 대비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예시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다른 사람도 아닌 루시의 아버지가 이번 사건에 복잡한 면이 있다면서 자기 딸을 죽인 살인마에게조차 공정하게 굴며 범인을 동정하자, 선악의 관념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정통 교리가 결여된 팀이 자신들을 모욕한다고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용납할 수 있는 감정을 뛰어넘었다는 이유로 팀을 죄인 취급하며 신성 모독한 자와 거의 동일시했다.
518p. ..인간은 단 하나로 수렴된 진실을 찾는 데 길들여져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청명한 보름달 같은 진실을 보려고 매달린다. 범죄 서적은 사진처럼 명료한 이미지를 전달하며, 대중은 껍질을 벗겨 소금을 뿌린 견과류처럼 건조하게 편집된 사연을 기대한다. 그런데 취재 대상으로서 오바라 조지는 빛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연기와 연무뿐이었고 외부에서 빛이 들어올 때만 잠시 밝아졌다. 다시 말해 껍질이 견과류가 가진 전부였으며 오직 그것만이 매혹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