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 «곶 이야기»
...나의 타고난 비상을 방해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었다. 하지만 행위의 실패는 때때로 그 목적의 선함에 의해 보상받는다. 내 경우에도 효과는 있었다. 말하자면, 그때까지 수동적이기만 했던 몽상에서 벗어나, 나는 몽상을 향한 용기를 얻은 것이다. 나는 주어진 책에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손으로 천일야화를 써야 했다. 나는 몽상을 향한 탐닉에서 몽상을 향한 용기로 나아갔다. ······ 어쨌든 탐닉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용기가 있는 것이다. - P-1

39p. «곶 이야기»
...걸핏하면 내 안에서 고개를 치켜들려던 강하고 날카로운 비애의 감정에 공포가 불을 지핀 탓에, 나는 격하게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에는 쓸쓸함과 불안함, 이유를 알 수 없는 동정이 뒤섞여 있었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며 버릇없이 울 때 속이 후련해지는 울음과는 달리, 나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애달픔이 있었다. 나는 멀리 소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았다. 눈물 젖은 눈에, 그 소나무는 비에 흠뻑 젖은 듯이 보였다.... - P-1

43p. «곶 이야기»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어째서인지 이번 일만큼은 부모님은 물론 나이외의 누구에게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고, 또 그것을 말하지 않는 데서 기쁨과 용기를 가지라고, 묵계와도 같은 무언의 다정함으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 P-1

44p. «곶 이야기»
..나는 이번 여름에 수영은커녕 물에 뜨는 법조차 배워 오지 못한 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야단맞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움직일 수 없는 신비로운 만족감이 있었다. 수영은 배우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인간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는 하나의 진실을, 훗날 내가 그것을 찾아 헤매고, 어쩌면 그것과 바꿀 수 있다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을 하나의 진실을, 나는 배우고 왔기 때문이다. - P-1

55p. «시를 쓰는 소년»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을 노래하는 것에, 소년은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라고 그는 처음부터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경험이 없는 것을 조금도 한탄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아직 체험하지 않은 세계의 현실과 그의 내적 세계 사이에는 어떤 대립이나 긴장도 보이지 않았기에, 굳이 자신의 내적 세계의 우위를 믿을 필요도 없었고, 심지어는 어떤 비이성적인 확신에 의해, 그가 이 세상에서 아직 체험하지 않은 감정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처럼 예민한 감수성에는, 이 세상의 모든 감정의 원형이, 어떤 경우에는 단지 예감이기는 했지만, 포착되어서 복습되어 있고, 나머지 경험은 모두 이러한 감정의 원소들을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원소란? 그는 독단적으로 정의를 내렸다. "그것은 말이다." - P-1

60p. «시를 쓰는 소년»
...하지만 현실에서 사랑을 하는 인간의 그 평범함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P-1

62p. «시를 쓰는 소년»
..소년은 들으면서, 그의 고백에 단 하나도 미지의 요소가 없다는 것에 놀랐다. 모든 것은 글로 쓰였고, 모든 것은 예감되었으며, 모든 것은 복습되었다. 글로 쓰인 사랑이 훨씬 생생하다. 시로 노래된 사랑이 훨씬 아름답다. R이 그 이상을 꿈꾸기 위해 현실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범함을 향한 욕구가 왜 생겨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 P-1

63p. «시를 쓰는 소년»
..⸺ 바로 그 순간, 소년은 무언가에 눈을 뜬 것이다. 사랑이니 인생이니 하는 인식 속에 반드시 끼어드는 우스꽝스러운 불순물, 그것 없이는 인생이나 사랑의 한가운데를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우스꽝스러운 불순물을 본 것이다. 즉, 자신의 짱구를 아름답다고 굳게 믿는 것. - P-1

78p. «의자»
..신음은 고통의 전달 수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음 소리를 냄으로써 달래지는 고통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고통은 알려지기를 바라지만, 고통 속의 쾌락은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 P-1

103p. «보온병»
..가와세도 오랜만에 만나 나누는 인사말은 잊은 채 대답했다. 가와세는 그 순간, 늘 빈틈없이 꼼꼼하게 정해놓은 과거와의 거리가, 뭔가의 계기로 살짝 줄어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와세는 그것이 외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도량형이 외국에서는 흐트러져버린다. 타국에서의 만남은 표정을 순식간에 과장해버려, 나중에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해도 이미 늦어 곤란할 때가 있다. 이것은 꼭 남녀의 경우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남자 지인끼리도 그렇다. - P-1

106p. «보온병»
...이 여자는 옛날부터, 먼 곳의 불을 바라보듯 보면 아름답다고, 가와세는 생각했다. - P-1

118p. «보온병»
..그런 식에 익숙해지면, 여자도 결국 자기방어를 위해 자연스럽게 열정을 피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가 무척 담백하게 느껴지는 것을 좋아했고, 또 그렇게 되려고 애를 썼다. 반쯤은 공리적인, 반쯤은 취향적인 동기에서 가와세는 아사카와의 정사(情事)가 최대한 ‘세련된 관계‘임을 바랐고, 그러는 사이에 그것이 서로의 허영심의 핵심이 되면서 어느새 옅은 유쾌한 절망이 스며들었다. 늘 주고받는 농담이나 말장난도 점점 공허해지더니, 어느샌가 자신들은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고 천하무적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P-1

136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이 현세를 움직이고 있는 동기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현세는 정지해버린다. 고승의 눈에는 그 정지된 모습만이 보일 뿐, 현세는 그저 종이 위의 그림, 타국의 지도 한 장일 뿐이다. 이런 무루(無漏)의 심경은 공포마저 잊게 만든다. 왜 지옥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현세의 무력함은 너무도 자명했고, 게다가 그는 결코 오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것이 자신의 높은 덕의 결과라는 것 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P-1

142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남자들이 정쟁을 일삼는 동안, 그녀는 다른 방법, 순전히 여성적인 방법에 의한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삭발하여 출가하는 여자를 비웃었다. 대체로 여자는 속세는 버릴지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버릴 수 없다. 남자만이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노승은 한때 속세를 버렸다. 그는 귀족들보다 훨씬 더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속세를 버렸듯이, 그는 이번에는 후궁 때문에 내세마저 버리려는 것이다. - P-1

143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이었던 고승이 한순간에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버린 것이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싸움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용기는, 만약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가능할 일을 기꺼이 금하고 있다는 긍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 P-1

145p. «시가데라 고승의 사랑»
..사실은, 이 사랑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고승은 그만큼 더 깊이 부처를 배반하는 결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불가능이 어느새 해탈의 불가능과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망상은 확고해지고, 사념(邪念)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희망이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단념하기 쉽지만, 이 불가능한 사랑은 호수처럼 고요히 땅을 뒤덮고, 흘러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 P-1

164p. «히나의 집»
...어느 시대든 청춘이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다. 오늘날처럼 청춘을 방해하는 외부의 장해가 많은 시대에는 내부의 장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동정을 잃지 않는 건실한 청년의 수가 오히려 많다 라는 반대 논리도 성립하는 것이다. - P-1

174p. «히나의 집»
..나는 전차가 그 불빛 한가운데서 멈추고, 발차하고, 또다시 그 불빛의 낙원에서 멀어져가는 것이 오늘밤에는 묘하게 느껴졌다. 타고 있는 전차가 마치 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은 언제나 항해를 떠올리게 하는 법이다. - P-1

195p. «표»
..그는 자신도 강으로 가서 거기서 다니를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기도 전에, 회색 바지를 접고 앉아 있던 다니가 그 바지가 힘없이 떠오르듯 일어서더니, 늘 그렇듯 왼쪽 어깨를 살짝 내린 채, 시끌벅적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내려갔다. 센이치로는 왠지 다니가 두 번 일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

219p. «괴물»
..나리모치는 전하를 저주했다. 그의 저주는 매우 근대적이고 프로테스탄트적인 저주로, 거창한 주문이나 주술은 필요 없다. 그저 늘 마음에 새기고, 잊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1914년, 황족 청년은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 P-1

228p. «괴물»
..아이는 이부자리 옆까지 와서 쪼그려 앉아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도 두려움은 없고, 호기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리모치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 중에, 질투가 섞인 호기심이 아니면 용서하지 않았다.... - P-1

234p. «괴물»
..이쓰코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비난의 표시로, 이미 그녀는 아버지를 간병 받아야 할 애착 인형처럼 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아버지에게도 듣는 귀, 보는 눈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귀, 아버지의 눈은 육체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세계에서 가만히 이 세상을 향해 있는 귀와 눈 같았다. 그 다른 세계에서 무슨 말이 들린다 해도, 이 세상에서는 수치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의 귀, 이 세상의 눈 앞에서만 사람은 후안무치하게, 있는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리라. - P-1

236p. «괴물»
..나리모치는 이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으로 모든 것이 결정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사실 인생에는 겉보기엔 볼품없는 중요한 순간이 더러 있는 법이다. 그것은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군중 속에 섞인 암살자가 더욱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 P-1

255p. «우국»
..두 사람이 죽음을 결심했을 때의 그 기쁨에 조금도 불순함이 없다는 것에 중위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물론 분명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모르는 둘만의 정당한 쾌락이 대의와 신의 위엄에 의해, 한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도덕에 의해 지켜졌음을 느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눈 속에서 정당한 죽음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철벽에 둘러싸인 채 타인의 손끝 하나도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정의의 갑옷으로 무장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위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우국의 충정 사이에 어떠한 모순이나 당착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같은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 P-1

256p. «우국»
..이것이 그대로 죽은 얼굴이 된다! 이미 그 얼굴은, 정확히 말해, 반쯤은 중위의 소유를 떠나 죽은 군인의 기념비 위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눈을 감아보았다.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여, 이제 그는 사물을 보는 인간이 아니었다. - P-1

256~257p. «우국»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보는 마지막 사람의 얼굴, 마지막 여자의 얼굴이다. 나그네가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땅의 아름다운 풍경에 쏟는, 떠나는 이의 눈빛으로 중위는 찬찬히 아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 P-1

265~266p. «우국»
..레이코의 손가락이 금박을 입힌 차가운 먹을 밀자, 연지(硯池)는 먹구름이 퍼지듯 순식간에 흐려졌고, 그녀는 이런 동작의 반복이, 이 손가락의 압력, 이 희미한 소리의 왕래가 오로지 죽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죽음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는, 그것은 시간을 담박하게 잘게 자르는 일상의 평범한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갈면 갈수록 매끄러움을 더해가는 먹의 감촉과 짙어지는 먹 냄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둠이 있었다. - P-1

268p. «우국»
..그것은 잠깐 동안의 신비로운 환상으로 중위를 이끌었다. 전장의 고독한 죽음과 눈앞의 아름다운 아내, 이 두 차원에 발을 걸치고, 불가능한 이 둘의 공존을 구현하면서 지금 내가 죽으려 하고 있다는 이 감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지복(至福)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의 아름다운 눈에 내 죽음의 순간순간이 비친다는 것은, 짙은 향기의 미풍을 맞으며 죽음에 이르는것과 같다. 거기에서는 무언가가 허용되고 있다.... - P-1

271~272p. «우국»
..고통은 레이코의 눈앞에서, 레이코의 몸을 찢는 듯한 비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의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그 고통이 점점 자라난다. 뻗어 오른다. 남편이 이미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그의 존재 전체가 고통으로 환원되고,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감옥의 죄수가 되어버린 것을 레이코는 느낀다. 더구나 레이코에게는 고통이 없다. 비탄은 고통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레이코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 누군가가 무정하고 높은 유리벽을 세워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

294p. «황야에서»
..내 마음은 좀 더 다른 것이었다. 남이 있어서는 안 되는 내 서재에서, 장마철 아침의 희미한 어둠 속에 떨면서 서 있는 한 청년의 극도로 창백한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가 거기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P-1

299p. «황야에서»
..그것은 내 마음의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황야다. 내 마음의 일부임에는 틀림없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미개척의 황폐한 지방이다. 그곳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황량하고, 무성한 나무도 없고, 자라나는 풀꽃도 없다. 여기저기 드러난 바위 위를 바람이 스쳐가며, 바위 표면에 모래를 희미하게 흩뿌리고는 또 어디론가 실어간다. 나는 그 황야의 소재를 알면서도 발길을 향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그곳을 찾아갔던 적이 있고, 또 언젠가는 다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히, 그 녀석은 그 황야에서 온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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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은 그녀의 편지를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즐긴 것은 문체였고, 그것만으로 편지의 모든 풍부함과 의도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부분의 독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기록’이라는 문학의 목적 자체를 놓치고 말았다. 문체는 쓰디쓴 액체를 담아 세상에 권하는 하찮은 그릇에 불과하다.... - P-1

...그녀는 자신도 죄인임을 알고 있었다. 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온갖 색깔의 사랑을 포함할 만큼 광대했지만, 그 안에 폭압적인 그림자도 없진 않았으며, 결국 자신이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딸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비열한 굴레에서 벗어나길 갈망했지만, 딸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감당할 수 없었다.... - P-1

...소년들은 거기서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 말은 침묵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시는 더욱 가치 없는 형태의 말이었다.... - P-1

...이 마누엘의 사랑은 문학을 흉내 내어 생긴 것이 아니었다. 50년 전 프랑스의 한 독설가는 "사랑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결코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지만, 그에게는 이런 말이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 P-1

...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에서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착하고 똑같이 재능 있고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세상에 없다.... - P-1

.."하지만 마누엘, 우리 마누엘. 네가 어렸을 때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줬는지 기억 안 나니? 시내 여기저기를 기꺼이 돌아다니면서 작은 심부름을 해줬었는데. 내가 아플 때는 식당에 가서 수프를 끓여 달래서 가져오기도 했잖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해줬는지 기억나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 P-1

...간밤에 선장은 나와 함께 앉아서 딸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가 손으로 턱을 괴고 화롯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어. ‘가끔은 딸아이가 멀리 여행 중이고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딸아이가 영국에 있을 것만 같아요.’ 이런 말 하면 넌 나를 비웃겠지만, 선장은 자신이 늙을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구나. - P-1

...그는 모험가의 여섯 가지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타인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되 자기 얼굴과 이름은 바꾸는 능력, 타고난 말솜씨, 무궁무진한 독창성, 비밀주의,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재능, 그리고 무위도식하는 부자들을 경멸하여 사기를 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마음까지. - P-1

..스무 살이 가까워지면서, 피오 아저씨는 자신에게 세 가지 삶의 지향점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다소 이상한 형태의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다채롭고 은밀하고 전지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는 자신이 멀리서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고 본인들보다 그들에 대해 더 잘 안다고 느낄 수만 있다면, 공적인 삶에서의 명예와 지위 따위는 저버릴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식이 가끔은 행동으로 이어져서 국가적, 개인적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 P-1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애욕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갈 때 그녀의 얼굴에 살짝 어리는 불안의 흔적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처럼 애욕을 부정하는 것 자체에서 애틋한 애정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가장 예상하지 못한 관계에 숨어 있는 희미한 열정의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그런 열정은 시종일관 권태로운 의무에 바쳐진 일생마저도 달콤한 꿈처럼 지나가게 만들 수 있었다. - P-1

...우리는 놀라운 수준의 훌륭한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와서, 우리가 다시 경험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기억한 채 살다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 피오 아저씨와 카밀라 페리촐레는 그들보다 앞서 칼데론이 스페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상계 수준의 연극을 페루에서 일궈내려고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었다. 걸작이 목표로 하는 대중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 P-1

..모든 부자들이 그러하듯,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그들의 집과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광범위한 독서를 한 사람들만이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 P-1

...이제 미모가 사라졌으니 헌신도 기대할 수 없다는 이러한 가정은 그녀가 애욕으로서의 사랑 외에는 어떤 사랑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애욕으로서의 사랑은 관대함과 배려 속에서 성장하고, 꿈처럼 아름다운 장면과 위대한 시를 낳는다. 그럼에도 그런 사랑은 가장 분명한 이기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런 사랑은 오랜 예속과 자기혐오, 조롱, 크나큰 의심을 겪어낼 때까지는 충실한 애정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그런 사랑 속에서 일생을 보낸 많은 사람은 어제 개를 잃어버린 아이보다도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 - P-1

..그리고 그 순간, 소녀 시절부터 집요하게 카밀라를 괴롭혀온 외로운 절망의 파도가 후아나 수녀의 분수와 장미꽃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이 지긋한 수녀원장의 흙 묻은 다정한 무릎 위에서 쉴 곳을 찾았다. - P-1

...그녀는 다짐했다. "이제는 나도 알아야 해. 세상 어디서나 은총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삶의 목표로 삼았던 특성들이 어디에나 있고, 세상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것을 말해 주는 새로운 증거에, 마치 소녀처럼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 P-1

...그러나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 P-1

(해제)
...피오의 사랑은 "애욕"(140쪽)을 부정하면서(부정당하면서) 비틀리는데 그 경우엔 대개 가학적인 속성을 갖게 된다. 상대가 느끼는 고통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그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을 보며 충성을 측정하는 식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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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p.
...At eighteen I had no proper understanding of the ways that constituted encroachment. I had a feeling for them, an intuition, a sense of repugnance for some situations and some people, but I did not know intuition and repugnance counted, did not know I had a right not to like, not to have to put up with, anybody and everybody coming near.... - P-1

18p.
...With me too, he was uncalculated, transparent, free from deception, always was what he was, with none of that coolness, that withholding, that design, those hurtful, sometimes clever, always mean, manipulations. No conniving. No games-playing. He didn‘t do it, didn‘t care for it, had no interest in it.... - P-1

70~71p.
...It was the convention not to admit it, not to accept detail for this type of detail would mean choice and choice would mean responsibility and what if we failed in our responsibility? Failed too, in the interrogation of the consequence of seeing more than we could cope with? Worse, what if it was nice, whatever it was, and we liked it, got used to it, were cheered up by it, came to rely upon it, only for it to go away, or be wrenched away, never to come back again? Better not to have had it in the first place was the prevailing feeling, and that was why blue was the colour for our sky to be. Teacher though, wasn‘t leaving it at that. - P-1

87p.
...It was clear though, they served some purpose, some sense of ‘See! Look at that. What‘s the point? There‘s no point,‘ thus confirming for him, solacing him even, in his despair, that as things stood, as always they‘d stood, there couldn‘t be triumphs and overcomings because overcomings were fancies and triumphs were daydreams, effort and renewed effort a vain waste of time.... - P-1

90p.
...As for those living in the dark, long attuned to the safeness of the dark, this wasn‘t wee buns for them either. What if we accept these points of light, their translucence, their brightness; what if we let ourselves enjoy this, stop fearing it, get used to it; what if we come to believe in it, to expect it, to be impressed upon by it; what if we take hope and forgo our ancient heritage and instead, and infused, begin to entrain with it, with ourselves then to radiate it; what if we do that, get educated up to that, and then, just like that, the light goes off or is snatched away? This was why you didn‘t get many shining people in environments overwhelmingly consisting of fear and of sorrow.... - P-1

144p.
...It seemed, and again I liked this, that this exchange was taking place in that ‘How can we get this done?‘ manner, that same manner of maybe-boyfriend, also of teacher, not the prevalent ‘What‘s the point, nothing is of use, it‘s not gonna make any difference is it?‘ and this surprised me.... - P-1

164p.
...There was too much of risk, and besides, they were challenging the status quo while I was trying to go under the radar of the status quo.... - P-1

174~175p.
..So ‘I don‘t know‘ was my three-syllable defence in response to the questions. With it successfully I refused to be evoked, drawn out, shocked into revelation. Instead I minimalised, withheld, subverted thinking, dropped all interaction surplus to requirement which meant they got no public content, no symbolic content, no full-bodiedness, no bloodedness, no passion of the moment, no turn of plot, no sad shade, no angry shade, no panicked shade, no location of anything. Just me, downplayed. Just me, devoid. Just me, uncommingled.... - P-1

231p.
...Here, I‘d contemplate the floor – the light dust on it, the odd hair on it, the specks of my recent emesis on it – and I‘d consider the only true things in this world were these basic conditions of floor, dust and so on and that they, and only they, could sustain me forever. Sometimes though, I‘d change my mind and it would become the panel of the bath, or the toilet bowl or the friendly bathroom wall against which occasionally I‘d find myself, that I‘d consider just as dependable of sustaining me forever too. - P-1

264p.
‘...She said it was impossible, that it was perilous to focus on good things when there were bad things, all these bad things, she said, that could not be forgot. She said old dark things as well as new dark things had to be remembered, had to be acknowledged because otherwise everything that had gone before would have been in vain....‘ - P-1

269p.
...Yet they hadn‘t married because third brother had gone and done the usual unquestioned, unconscious, self-protective thing. Being loved back by the person he loved to the point where he couldn‘t cope anymore with the vulnerable reciprocity of giving and receiving, he ended the relationship to get it over with before he lost it, before it was snatched from him, either by fate or by somebody else.... - P-1

305p.
...Nevertheless, the news of this Milkman name unsettled people; it cheated them, frightened them and there seemed no way round a feeling of embarrassment either. When considered a pseudonym, some codename, ‘the milkman‘ had possessed mystique, intrigue, theatrical possibility. Once out of symbolism, however, once into the everyday, the banal, into any old Tom, Dick and Harryness, any respect it had garnered as the cognomen of a high-cadre paramilitary activist was undercut immediately and, just as immediately, fell away.... - P-1

335p.
...I stressed that, owing to a reversal of the lifeforce inside her, she was blossoming, losing that ‘life‘s over, I‘m finished with life, past it, just eking out what‘s left‘ older person‘s perspective that usually she went about in and that I hadn‘t  noticed she‘d gone about in until of late when she‘d stopped going about in it.... - P-1

346~347p.
... According to his rulebook – mine too, at least before the predations upon me by the community and by Milkman – the physical and verbal aspects could be the only aspects. That meant that what was not of those trespasses – stalking without touch, hemming-in, taking over, controlling a person with no flesh on flesh, no bone on bone ensuing – could not then be happening. So it came about that of everybody who had heard of the wooing of me by Milkman, third brother-in-law was the only one who, unquestioningly, hadn‘t considered it to have taken place. - P-1

348p.
...As we jumped the tiny hedge because we couldn‘t be bothered with the tiny gate to set off on our running, I inhaled the early evening light and realised this was softening, what others might term a little softening. Then, landing on the pavement in the direction of the parks & reservoirs, I exhaled this light and for a moment, just a moment, I almost nearly laughed.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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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p.
...그러니 역시 그건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 아니라 요한이 지어낸 농담이었는지도 모른다. 요한 같은 젊은 예술가 지망생이 자신의 특수성을 보편적 사실로 퍼트리거나 그렇게 착각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어쨌거나 도이치에게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말은 청춘 시절 유희의 상징 같은, 말하자면 마법의 주문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주문에 지나치게 기대면 그 효능이 점차 떨어지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 P-1

38p.
...도이치의 온갖 생각, 힘, 행위의 소산일 말, 말, 말......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안에서 새로운 생각이나 힘, 행위의 태동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일단 언어화된 생각이나 힘이나 행위는 핀으로 꽂아 표본 상자에 가지런히 넣어둔 나비처럼 두 번 다시 날갯짓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 P-1

77p.
...도이치는 각각의 사례를 메모하지는 않았지만 시카리가 방금 말한 명언의 세 가지 유형(요약형, 전승형, 위작형)은 머리에 새겨두었다. 곧바로 기억할 수 있는 이론은 대개 현실의 복잡성으로 인해 오류를 품고 있기는 해도 일단 이론으로서는 뛰어난 경우가 많다. "단순한 것은 항상 허위다. 단순하지 않은 것은 쓸모가 없다"라는 발레리의 말을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도이치의 잼적, 샐러드적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 P-1

104p.
..한 인간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 이는 괴테 만년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괴테는 본인이 천재였으니 한 천재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걸 믿고 싶었을 터다. 하지만 자기 혼자서는 아무리 애써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다‘로 태세를 바꾸었다. 일테면 셰익스피어에 의해, 또는 바로 아랫세대인 홈볼트에 의해. 전통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자신을 접목함으로써 괴테는 자기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도이치는 괴테라는 인간에게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것을 말한‘ 문학적 전통에 접속할 수 있다.... - P-1

117~118p.
"...옛 독일 청년들은 대화 마디마디에 성서를 인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는데, 그건 결국 감정이나 사건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명시하지. 우리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 옛사람들이 엄선한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그들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우리보다 더 정교하게 열어서 보여준다는 점을 인정하는 게야. 거장들은 항상 옛사람의 장점을 이용하는데, 그 점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다네." - P-1

210p.
.."열이 확 받아서 ‘언어 시스템 자체가 인용이야‘라고 쏘아붙였지. ‘보르헤스도 그렇게 말했거든‘ 하고. 그랬더니 쓰즈키가 ‘논쟁에서 권위를 방패로 쓰는 사람은 지성이 아니라 기억력을 쓰는 것에 불과해‘라잖아. ‘다빈치도 그렇게 말했어‘ 하면서. 그럼 사귀는 수밖에 없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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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은 근대 이후에 출현했다. 이는 많은 학자의 일치된 견해기도 하다. 앞서 관광학에 관광의 명확한 정의가 없다고 했는데, 물론 개별 연구에는 참조할 만한 내용이 있다. 그중 하나인 존 어리와 요나스 라르센의 저서 『관광객의 시선』은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근대’를 몸에 걸치는 행위의 일환"이라고 했다. 여행은 예부터 존재했다. 순례와 모험 모두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관광은 근대 이후 사회에만 존재한다. 2세기 로마 귀족이 유프라테스강으로 ‘관광’을 가거나 15세기 베니스인이 팔레스타인에 ‘관광’을 갔다는 표현은, 비유로 사용할 수는 있겠으나 결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 P-1

...관광은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기분에 따라 가서,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위다. 따라서 이는 일부 부유층만이 아니라 중산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도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아닌 것에 어느 정도 돈을 쓸 수 있게 된 산업 혁명 이후의, 생산력이 향상된 풍요로운 사회에서만 산업으로 성립한다. - P-1

...관광객은 생활에 필요해 그곳에 들른 것이 아니다. 사야 할 것이나 가야 할 곳이 있지도 않다. 관광객에게는 방문한 곳의 모든 사물이 상품이고 전시물이며, 중립적이고 무위적인, 즉 우연히 시선 안에 들어온 대상이다. 관광객의 시선이란 세계 전체를 파사주=쇼핑몰로 여기는 시선이다. - P-1

..이 책의 문맥에서 말하면 2차 창작은 ‘관광’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특정 작품의 일부를 가져와 원작자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그것도 원작자의 허락 없이 ‘경박하게’ 창작하는 행위기 때문이다. 이는 관광객이 관광지를 방문해 주민이 기대한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즐기고 일방적으로 만족해 돌아가는 상황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 P-1

...‘재귀성’이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항상 의식하면서 행동을 결정하는 메타적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전면화한 사회를 살고 있다. 이 점에서 포스트모던은 전혀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오히려 더욱 심화된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고 있다. - P-1

...설령 동기가 유치한 환상이라고 해도 한번 체르노빌까지 발걸음을 옮겨 그곳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투어 참가자는 필연적으로 그 사고 이외의 배경 정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정보의 다층성 속에서 다시 한번 사고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매년 체르노빌 투어를 통해 노리고 있는 효과다. 나 또한 처음 체르노빌에 갈 때는 유치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고 믿고 있던 장소를 찾아가 그곳이 ‘평범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평범하지 않은’ 일이 우연히 그곳에서 일어났다는 ‘운명’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평범함’과 ‘평범하지 않음’ 사이의 왕복 운동이 바로 다크 투어리즘의 근간이다. - P-1

..세계에는 ‘오류’가 있다. 볼테르는 이 인식을 제시하고자 주인공이 세계를 여행하는 소설을 썼다. 나는 여기서 관광이라는 모티프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철학을 본다. - P-1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보편적인 우호를 가져오는 제반 조건"이 될까? 그는 여기서 "방문할 권리"(방문권)를 논한다. 국가 연합에 참가한 국가의 국민은 서로의 국가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지구의 표면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권리에 근거해 서로 교제를 제안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이 갖는 권리"로, 이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면 영원한 평화를 이룰 수 없다.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방문권이란 방문할 권리만을 의미하지 손님으로 환대받을 권리는 포함하지 않는다. "우호의 권리, 즉 외국인의 권한은 그곳 주민과의 교류 시도를 가능케 하는 제반 조건을 넘어서는 것까지 확장되지는 않는다"고 칸트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외국인이 교류를 "시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성공은 보장되지 않으며 보장하지 않아도 된다. - P-1

...거꾸로 보면 존엄을 잃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는 존재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 해도 정신적으로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코제브와 헤겔의 생각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그런 자족하는 존재가 되면 인간의 역사는—생물로서의 인류 자체는 존속한다 해도—끝난다. 코제브는 이와 같은 인간관에 따라 2차 대전 후의 세계를 ‘포스트역사’라고 지칭한 것이다. 전후 냉전 상황에 직면해 그는 인류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본질적으로 어떤 새로운 이념도 발명하지 못했다는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 P-1

..아렌트는 이 대립을 ‘타자’ 또는 ‘공공성’ 유무의 대립과 포갠다. 아렌트에 따르면 활동의 장에는 반드시 ‘타자’가 있다. 청중이 없는 연설은 없으며 봉사 대상과 면식이 없는 봉사자도 없다. 활동의 본질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차이를 인식한 후에 언어적으로 소통하는 데 있으므로 반드시 타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는 공공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대조적으로 노동하는 공간에는 타자가 없다. 노동의 본질은 인간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게 하고 인원과 시간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생명력’을 제공하는 데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타자가 있을 수 없다고 아렌트는 생각한다.... - P-1

..슈미트, 코제브, 아렌트 모두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커다란 사회 변화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근본부터 되물은 사상가다. 슈미트는 친구와 적을 구분 짓고 정치를 행하는 자가 바로 인간이라고 답했고, 코제브는 타자의 인정을 추구하며 투쟁하는 자가 인간이라고 답했으며, 아렌트는 광장에서 토론하며 공공성을 만드는 자가 인간이라고 답했다. 언뜻 제각각인 답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인간을 무엇과 대비시켰는지를 보면 공통된 문제 의식이 부각된다. 슈미트가 친구/적 이론을 구축한 것은 친구와 적의 구분에 신경 쓰지 않고 경제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자유주의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코제브가 투쟁 정신으로 무장하고 역사를 만드는 이가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투쟁도 역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쾌락에 자족하는 인간(동물적 소비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을 집필한 것은 다시 인용하면 "자기 육체라는 사적인 공간에 갇힌",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하는 동물’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 P-1

..슈미트와 코제브 그리고 아렌트는 같은 패러다임을 살았다. 이들은 모두 경제적 합리성을 원동력으로 삼으며 정치를 배제하는, 친구/적의 구분이 없는 평면적인 대중 소비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를 부활시키려 했다. 달리 말해 그들은 모두 글로벌리즘이 실현하게 될 쾌락과 행복의 유토피아를 거부하기 위해 인문학 전통을 활용하려 했다.
..이 책이 ‘관광객’을 사유함으로써 극복하려는 대상이 바로 이 무의식적 욕망이다. 20세기의 인문학은 대중 사회의 실현과 동물적 소비자의 출현을 ‘인간이 아닌 것’의 도래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거부가 글로벌리즘이 진행된 21세기에 통할 리 없다. 실제로 인문학의 영향력은 이번 세기 들어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문학 자체를 변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바탕에 있는 위기 의식이다. - P-1

...이처럼 풀어 해석하면 알 수 있듯 『영원한 평화를 위해』의 제1확정 조항(각 국가의 시민적 체제는 공화적이어야 한다)은 인간으로 치환해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저속하다고 형용해도 될 정도의 논리다. 칸트는 각 국가에 ‘우선 네 하반신을 제어할 수 있게 된 다음에 국제 사회에 들어오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 P-1

..경제는 연결되어 있으나 정치는 분리되어 있는 시대. 욕망은 연결되어 있으나 사고는 분리되어 있는 시대. 하반신이 이어져 있는데도 상반신은 이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시대. 이것이 2층 구조 시대의 세계 질서다. 마지막으로 저속하다고 비난받을 것을 각오하고 연상을 이어 가자면, 이 시대의 국민 국가(네이션) 간 관계는 종종 서로 사랑을 확인하지 않은 채 육체 관계부터 맺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기 쉽다고도 할 수 있다. - P-1

..자유지상주의는 글로벌리즘의 사상적 표현이고, 공동체주의는 현대 내셔널리즘의 사상적 표현이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과거 내셔널리즘의 사상적 표현이다.
..자유주의는 보편적인 정의를 믿었고 타자에 대한 관용을 믿었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20세기 후반에 급속히 영향력을 잃었고 지금은 자유지상주의와 공동체주의만 남아 있다. 자유지상주의에는 동물의 쾌락만 있고 공동체주의에는 공동체의 선만 있다. 이대로는 어디에도 보편과 타자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사상적 역경이다. - P-1

..규율 훈련과 생명 권력은 프랑스 계열 현대 사상에서 권력의 두 유형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다. 거칠게 정리하면 규율 훈련은 권력자가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징벌을 가해 대상자의 행동을 좌우하는 권력을 가리킨다. 징벌을 가하기 때문에 규율 훈련이라 불린다. 한편 생명 권력은 어디까지나 대상자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면서도 규칙, 가격, 환경 등을 바꿈으로써 결과적으로 권력자의 의도대로 대상의 행동을 좌우하는 권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상의 사회적 삶에 개입하기 때문에 생명 권력이라 불린다.
..이 두 개념의 역사는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둘 다 푸코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푸코가 두 개념을 대립시켜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규율 훈련은 1975년에 간행된 『감시와 처벌』에, 생명 권력은 1976년에 간행된 『지식의 의지』(『성의 역사』 1권)에 등장한다. 두 책은 각기 다른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데, 친구기도 했던 철학자 질 들뢰즈가 푸코 사후인 1990년에 발표한 짧은 평론에서 두 개념을 대립시키며 규율 훈련이 지배하는 ‘규율 사회’는 19세기까지의 사회 모델이고, 현대 사회는 생명 권력이 지배하는 ‘관리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간략한 도식을 제시했다. ‘규율에서 관리로’라는 이 도식은 푸코의 원래 주장에 비해 알기 쉬워 바로 널리 퍼졌다.... - P-1

..나는 앞서 관광객의 철학이란 동물의 층과 인간의 층이 연결되는 횡단의 회로, 즉 시민이 시민으로서 시민 사회의 층에 머문 채 공공성 및 보편과 연결되는 회로를 모색하는 것이라고 했다. 방금 확인한 것처럼 네그리와 하트가 구상한 다중은 내 구상과 지향하는 바가 매우 비슷하다. 『제국』은 보통 국제 정치를 논한 책으로 수용되고 있지만 정치의 정의 자체를 변혁하려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철학적인 저서인 것이다. 다중의 모습은 이 책이 말하는 관광객과 극히 유사하다. - P-1

..‘우편적’은 어떠한가? 여기서 우편적이라는 말은 어떤 물건을 지정된 곳에 잘 배달하는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배’, 즉 배달의 실패나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많이 함축한 상태를 뜻한다(현실의 우편 사업 관계자에게는 이 용법이 못마땅할 수 있겠다). 관광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편적’이다.... - P-1

..부정신학적 다중의 연대는 연대가 부재라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여겼다. 우편적 다중의 연대는 끊임없는 연대의 실패로 사후적으로 생성되어 결과적으로 연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그런 착각의 축적으로 이루어진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연대를 꿈꿨다. 나는 그 대신 관광객의 오배를 꿈꾼다. 다중이 데모하러 간다면 관광객은 놀고 구경하러 간다. 전자가 소통 없이 연대한다면 후자는 연대 없이 소통한다. 제국이 낳은 반작용인 전자가 사적인 삶을 국민 국가의 정치로 다루어야 한다고 외친다면, 제국과 국민 국가 틈새에서 탄생한 노이즈인 후자는 사적인 욕망을 통해 공적인 공간을 소리 없이 변화시킬 것이다. - P-1

..앞서 나는 바라바시와 앨버트가 네트워크의 시뮬레이션에 성장과 우선적 선택이라는 가정을 도입해 이 멱승 분포(무척도)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거꾸로 말하면 이들은 멱승 분포가 생성되는 메커니즘을 겨우 두 가정으로 설명했다. 바라바시와 앨버트의 연구가 가져온 진정한 충격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 멱승 분포는 웹페이지의 링크 분포나 연 수입 분포뿐 아니라 다양한 통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 현상만이 아니라 자연 현상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도시 규모와 수의 관계, 논문 인용 빈도와 점수의 관계, 전쟁 규모와 발생 수의 관계, 서적 부수와 출판 종수의 관계, 금융 위기 규모와 발생 수의 관계, 지진 규모와 빈도의 관계, 대량 멸종 상황에서의 멸종 종수와 빈도의 관계 등이 모두 무척도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P-1

..수학적으로 보면 우리 한 명 한 명이 네트워크의 꼭짓점이다. 그리고 스몰 월드=무척도 네트워크에서 꼭짓점과 꼭짓점의 관계는 가지 하나로 연결된 두 꼭짓점이라는 대등한 관계로도, 연결된 가지 수에 큰 차이가 있는 불평등한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네트워크의 형태에 주목한 해석이고, 후자는 차수 분포에 주목한 해석이다. 실제로 이에 대응하듯 우리 인간은 다른 한 인간(타자)과 마주했을 때 상대를 대등한 인간으로 느낄 때도 있지만 부와 권력의 격차 앞에 압도당할 뿐일 때도 있다. 아렌트는, 아니 그뿐 아니라 많은 20세기 인문학 사상가가 전자와 같은 관계가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후자는 ‘인간의 조건’이 박탈된 상태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양자는 하나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표현으로, 우리는 항상 둘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봐야 한다.... - P-1

..21세기의 새로운 저항은 제국과 국민 국가의 틈새에서 생겨난다. 이는 제국을 외부에서 비판하는 것도 내부에서 해체하는 것도 아닌, 오배의 재연을 시도한다.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과 만나고 갈 일이 없었을 곳에 가고 생각할 일이 없었을 생각을 함으로써, 제국 체제에 다시금 우연을 도입하고 집중된 가지를 바꿔 연결해 우선적 선택을 오배로 되돌리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그런 실천의 누적을 통해 특정한 꼭짓점에 부와 권력이 집중하는 현상에는 어떠한 수학적 근거도 없으며 언제든 해체하고 전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 즉 지금의 현실은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항상 상기하게 하고자 한다. 나는 이런 재오배 전략이 국민 국가=제국의 2층화 시대에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모든 저항의 기초에 두어야 할 필수 조건이라고 본다. 21세기 질서 속에서 오배 없는 리좀 형태의 동원은 결국 제국의 생명 권력을 모방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 P-1

..로티에 따르면 현대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통일하는 이론에 대한 요구를 포기"해야 하는 시대다. 예컨대 현대의 선진 서구 사회(1980년대에 집필된 책임을 상기하자)에서 특정 철학이나 종교를 사적으로 믿는 것은 자유이나 이를 공적으로 타인에게 강요하고 개종하라는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는 원래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기에 사실 이는 모순이다. 사적으로만 즉 개인의 취미로만 믿을 수 있는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허용되는 것은 사적인 종교뿐이며 로티는 이것이 옳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이 모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구상한다. 그것이 리버럴 아이러니스트다. 여기서 ‘아이러니스트’란 모순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또한 이 입장은 책 제목에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인 ‘우연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달리 말해 자신의 사적인 가치관이 단지 우연한 조건의 산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우연히 일본인이어서, 우연히 남성이어서, 우연히 20세기에 태어나서 이런 신념을 갖고 있지 다른 조건 속에 있었다면 다른 신념을 가졌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로티는 이렇게 말한다. "20세기 자유로운 사회는 자신의 가장 고차원적인 희망을 말할 때의 어휘가, 즉 자신의 양심 자체가 우연의 산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양심에 충실한 사람을 꾸준히 만들어 내고 있다." - P-1

..과거에 공산주의는 개인도 국가도 아닌 제3의 정체성으로 ‘계급’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공산주의의 혁명성은 사실 이 정체성의 발명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이 제3의 정체성에 의거했기에 부르주아 국민 국가를 부정하는 동시에 개인의 자유(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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