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p. ...그러니 역시 그건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 아니라 요한이 지어낸 농담이었는지도 모른다. 요한 같은 젊은 예술가 지망생이 자신의 특수성을 보편적 사실로 퍼트리거나 그렇게 착각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어쨌거나 도이치에게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말은 청춘 시절 유희의 상징 같은, 말하자면 마법의 주문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주문에 지나치게 기대면 그 효능이 점차 떨어지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 P-1
38p. ...도이치의 온갖 생각, 힘, 행위의 소산일 말, 말, 말......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안에서 새로운 생각이나 힘, 행위의 태동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일단 언어화된 생각이나 힘이나 행위는 핀으로 꽂아 표본 상자에 가지런히 넣어둔 나비처럼 두 번 다시 날갯짓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 P-1
77p. ...도이치는 각각의 사례를 메모하지는 않았지만 시카리가 방금 말한 명언의 세 가지 유형(요약형, 전승형, 위작형)은 머리에 새겨두었다. 곧바로 기억할 수 있는 이론은 대개 현실의 복잡성으로 인해 오류를 품고 있기는 해도 일단 이론으로서는 뛰어난 경우가 많다. "단순한 것은 항상 허위다. 단순하지 않은 것은 쓸모가 없다"라는 발레리의 말을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도이치의 잼적, 샐러드적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 P-1
104p. ..한 인간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 이는 괴테 만년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괴테는 본인이 천재였으니 한 천재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걸 믿고 싶었을 터다. 하지만 자기 혼자서는 아무리 애써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다‘로 태세를 바꾸었다. 일테면 셰익스피어에 의해, 또는 바로 아랫세대인 홈볼트에 의해. 전통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자신을 접목함으로써 괴테는 자기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도이치는 괴테라는 인간에게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것을 말한‘ 문학적 전통에 접속할 수 있다.... - P-1
117~118p. "...옛 독일 청년들은 대화 마디마디에 성서를 인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는데, 그건 결국 감정이나 사건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명시하지. 우리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 옛사람들이 엄선한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그들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우리보다 더 정교하게 열어서 보여준다는 점을 인정하는 게야. 거장들은 항상 옛사람의 장점을 이용하는데, 그 점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다네." - P-1
210p. .."열이 확 받아서 ‘언어 시스템 자체가 인용이야‘라고 쏘아붙였지. ‘보르헤스도 그렇게 말했거든‘ 하고. 그랬더니 쓰즈키가 ‘논쟁에서 권위를 방패로 쓰는 사람은 지성이 아니라 기억력을 쓰는 것에 불과해‘라잖아. ‘다빈치도 그렇게 말했어‘ 하면서. 그럼 사귀는 수밖에 없지." - P-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