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3p.
...햇빛과 구름의 모습은 언제나 앞으로 다가올 날씨를 암시하지만, 강훈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현상을 보며 미래를 예견하지 않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강훈은 점퍼를 여미고 걸었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중이었지만 저녁만큼은 뒤처진 채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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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들었던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과는 약간 다르다. 하지만 사토코는 분명히 깨달았다.
..아침이 왔다는 것을.
..끝없이 이어지는 밤의 밑바닥을 걸어, 빛 하나 없는 터널을 빠져나왔다. 영원히 밝아 오지 않을 것 같던 아침이 지금 밝았다.
..아이는 우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당당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고 싶거든" 하고 아기에게 안겼다. 자신이 안은 것이 아니라 아기에게 안기는 듯한 포옹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엄마 아빠는 히카리의 뒤에서 또 다른 히카리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실패하지 않은 히카리였다.
..중학교 때 임신과 출산이 없었다면 이러이러했을 것이라는 ‘실패하지 않은‘ 히카리. 남학생과 사귀지도 않고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무럭무럭 자라서 오노야고에 들어갔을 히카리. 그들이 바라는 히카리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잃어버린 가능성이기에 비로소 그 히카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착한 아이였다. 죽은 아이의 나이를 세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의 히카리를 뛰어넘어 그 가능성에 열중했다. 그 아이였다면 지금쯤, 하는 상상을 현실의 히카리보다 훨씬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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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내가 동창회 같은 데에 나가지 않는 이유와 비슷했다. 남들에 의해 소환되는 그 시절의 나도 싫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그 시절의 나인 척하고 있을 게 분명한 현재의 나도 싫었다.
..여러 사람과 공유한 시간이므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아침 메뉴는 구운 흔적이 있는 딱딱한 식빵과 우유였다. 식판 위에는 기름이 겉도는 식은 달걀프라이 혹은 삶은 달걀이 한 개씩 담겨 있었다. 신입생들은 처음에 식판에 빵을 수북이 쌓아놓고 먹었다. 그러다 차차 양이 줄어드는데, 두 장쯤이 되면 기숙사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것이었다. 비로소 개별적 입맛이 가동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빨리 적응한 애들은 자신들이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주 수업에 빠졌다. 그런 이유라면 나 역시 충분한 조건을 갖췄지만 나는 학교 수업에 빠짐없이 들어갔다. 일단 기숙사에서 나와야만 혼자의 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멀리 떠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자주 위축되고 두려움과 자괴감에 빠지지만 그런 태도를 되도록 감춰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약점이 있다는 걸 공유하면 편해지긴 하지만 무시당하는 걸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점을 숨기고 방어하고 또 상처받았을 때 태연하게 보이는 법을 연구하면서 타인을 알아간다.

..오지은이 왜 음악 얘기를 꺼내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랑 잘 맞는다고 생각하기 위해 그냥 갖다 붙이는 말 같았다. 그때에도 나는 그녀가 상냥한 성품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것이 타인을 몇 개의 묶음으로 분류해놓고 천편일률적 교양으로 응대하는 무례한 태도라는 건 깨닫지 못했다.

..연설을 잘하진 못하겠지만 사교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녀가 그 정도를 치명적 장애나 결핍이라도 되는 듯이 감추려 들고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장애와 결핍을 가까이에서 본 적 없는 그녀의 ‘공주다움‘이었다.

..그녀는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늘 남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거나 우월감에 취한 게 아니라 단지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안에는 우연히 들어온 바람으로 가득 채워졌다가 그것이 빠져나가 텅 비워지곤 하는 허공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다. 결국은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에게 번번이 끌려다니는 꼴이 되고 말지만 말이다.

..운동장을 나온 뒤 그는 가게에 들러 담배를 샀다. 내게는 은단 껌을 한 통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솔‘ 담배를 피우면서 동시에 은단 껌을 씹으면 입안에서 쑥냄새가 난다고, 담배 피우는 곰이 된 기분이라고 싱거운 농담을 던졌다. 우리는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긴장했고 또 흥분해 있었다.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이 나이가 되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젊지만 생각보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게 입버릇이었고 나도 그 말에는 이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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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p.
..채 밝지 않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눈뜨며 고통스러운 꿈의 여운이 남아 있는 의식을 더듬어 뜨거운 ‘기대‘의 감각을 찾아 헤맨다. 내장을 태우며 넘어가는 위스키의 존재감처럼 뜨거운 ‘기대‘의 감각이 몸속 깊숙한 곳에 분명하게 되살아나기를 불안한 심경으로 바라는 그 헤맴은 언제까지고 바라는 것을 찾지 못한다. 힘 빠진 손가락을 붙여 모은다. 온몸 구석구석 살과 뼈들의 존재감이 제각각 느껴지면서 묵직한 통증으로 변해가는 것을, 밝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꺼리듯 뒷걸음질 치며 깨어나는 의식을 통해 느낀다. 그렇게 둔탁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연결성을 느끼지 못하는 무거운 육신을 나는 체념한 기분으로 다시금 받아들인다. 도대체 어떤 사물이 어떨 때 취하는 자세인지 떠올리기를 명백히 원치 않는 자세로 팔다리를 비틀어 꺾은 채 나는 자고 있었던 것이다.

13p.
...뜨거운 ‘기대‘의 감각은 되돌아오지 않지만 공포심은 없어졌다. 나는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고 지금 내가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다만 완벽하게 무관심한 나 자신을 어느 누구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유감스럽게 느껴진다. 개? 개는 눈이 없다. 무관심한 나 역시 눈이 없다. 사다리를 내려왔을 때부터 나는 줄곧 눈을 감은 채로 있었으니까.

15p.
...나는 친구의 죽은 육체가 존재의 전 기간에 걸쳐 단 한 번뿐인 비행을 행하는 풍요로운 시간을 지켜보는 동안, 어린아이의 정수리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또 다른 시간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내 육체가 부패의 시간을 체험할 때, 친구의 눈이 그것을 지켜보고 정당한 의미를 이해해주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8~39p.
.."무릇 모든 번민이라는 게 일단 해결되고 나면 어리석고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 아닌가요? 형이 일부러 귀국해서 요양소에 들어가는 일만 해도 형 머릿속에서 헝클어진 매듭이 풀리고 나면 그저 어리석고 시시한 짓으로 기억되고 끝나지 않겠어요?"
..다카시가 반발하듯 말했다.
.."풀리기만 한다면야……. 하지만 풀리지 않는다면 그 어리석고 시시한 일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거지."
..솔직한 기대감을 담아 친구가 말했다.
.."도대체 형 머릿속을 잡아두고 있는 게 뭐예요?"
.."그건 분명하지 않아. 그게 분명해진다면 나는 그걸 극복하고 이따위 어리석고 시시한 일에 매달려 몇 년씩 허비한 걸 후회하기 시작할 테니까. 거꾸로 내가 그것에 굴복해서 인생의전부로 삼는 식의 자기 파괴로 향하게 된대도 차츰 그 끈의 정체를 뚜렷이 알 수 있게 되겠지. 하긴 그 경우에도 알게 된 일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건 아니야. 또 광기를 키워온 한 인간이 극한 상태에서 이해한 일 같은 건 타인한테 전할 방법이 없지."

58p.
.."오히려 자신의 의지로 취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나는 알코올중독자예요. 어머니도 똑같았거든요. 내가 어느 정도 취했을 때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그 이상 취해 버리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나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분 좋은 취기에서 벗어나는 게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163~164p.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형수님 또한 독특해."
..나는 다카시가 머리를 붉게 칠하고 목을 매고 죽은 친구에 대해 그 사람은 독특한 인간이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고, 그 말은 방금 다카시가 한 말과 겹쳐지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을 흔들었다. S형 또한 독특한 인간이었다고 다카시가 말한다면 나는 더 이상 그의 꿈의 기억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아는 척하며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은 모두 죽어버린 이들, 타인에게 전달 불가능한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어떤 존재감을 진정으로 느낀 사람이 할수 있는 말이었다.

211p.
..꿈속에서 동요된 정서는 잠에서 막 깨어난 내 몸 구석구석에 여전히 쌓여 있고, 꿈의 실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에 찬 불안한 동요만이 균형을 잃을 만큼 잠에서 깬 나를 압도했다. 나는 정화조가 내부에 있고 콘크리트 뚜껑으로 닫힌 직육면체의 구덩이를 간절히 그리워했다....

242p.
.."하지만 나한테는 그건,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로 끝나지 않아. 전쟁터에서도 일상인의 감각으로 살면서도 유능한 악의 집행자였던 육친 한 사람을 발견한 거야, 형. 내가 맏형의 시대를 살았다면 이건 나 자신이 쓴 일기일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내 세계의 전망에 새로운 측면이 열리는 것처럼 느껴져."

298p.
...개가 아니라면 애처롭도록 허망하게 발기한 자신의 페니스를 그처럼 솔직하게 노출시킬 수 있는 이는 없다. 다카시는 내가 모르는 어둠의 세계에서 경험한 것을 누적시켜, 고독한 개처럼 절박한 솔직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개가 자신의 우울을 말로 할 수 없듯이, 다카시 또한 타인과 공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머릿속 한가운데에 묵직하게 응어리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318~319p.
.."작가? 분명히 그 사람들은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하고서도 맞아 죽지도 않고 미치광이가 되지도 않고 살아남을지도 모르지. 그 작자들은 픽션의 틀로 사람들을 온통 기만하지. 그러나 픽션의 틀을 덮어씌우면 아무리 끔찍한 일도 위험한 일도 파렴치한 일도 자신의 신변은 안전한 채로 말해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작업을 본질적으로 취약하게 만들고 있어. 아무리 작가가 절실하게 진실을 말할 의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픽션의 형태로 무슨 일이건 말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는 모든 진실의 독성에 대해 미리 면역이 되어 있는 거야. 그건 결국 독자한테도 전달되어서 픽션의 틀 속에서 전개되는 내용에는 벌거벗겨진 영혼에 직접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깔보이게 되는 거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장으로 인쇄된 것 중에는 내가 상상하고 있는 종류의 사실 얘기란 존재하지 않아. 기껏해야 진실을 말할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포즈를 취하는 소설을 만나는 정도야."

508p.
..‘다카라면 당장 그곳으로 가서 그의 새 생활을 획득했을 테지. 다카는 일부러 코끼리를 잡으러 아프리카까지 가는 인간에게 휴머니즘적 희망을 걸고 있었다고 모모가 말했어. 모든 도시의 동물원이 핵전쟁으로 전멸한 뒤, 아프리카의 오지로 코끼리를 잡으러 가는 최초의 사내가 다카가 꿈에 그리던 타입의 인류였지.‘

532p.
...그리고 나는 아내가 다카시의 아이를 출산하려고 결심한 본질적 의미의 모든 것을, 하나의 돌덩어리를 보듯이 구체적으로 이해했다. 그 이해는 어떠한 정서적인 혼란도 야기하지 않고 나의 내부에 자리 잡았다....

539~540p.
..다카시나 아내와 함께 그것을 봤을 때 느꼈던 깊은 위안의 감정이, 지금은 단순히 나의 정서에 의해 환기되는 수동적인 인상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화면에 실재하는 회화적 실체로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을 보았다. 화면에 능동적으로 실재하는 대로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농밀한 ‘위무(慰撫)‘ 그 자체이다. 회화의 주문자는 아마도 궁극적인 ‘위무‘의 실체를 그려줄 것을 화가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물론 지옥은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으면서 자기를 유폐시키고 고독한 그 자신의 지옥에 맞서 있는 동생을 진혼하기 위한 그림이니까. 그러면서도 불꽃의 강은 아침 햇살을 머금은 물든 산딸나무의 잎사귀 뒷면처럼 붉게 칠하지 않으면 안 되고, 불의 파도의 선은 여자의 치맛자락 주름치럼 찬찬히 부드럽게 그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위안‘ 그 자체인 화염의 강이 실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혼자서 울부짖고 괴로워하는 망자인 동시에 고통을 가하는 도깨비이기도 한 성난 동생을 진혼하기 위한 그림이므로, 망자의 고통도 도깨비의 가혹함도 정확히 그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도깨비와 망자는 고뇌의 표출과 잔학의 실천에 번갈아 힘쓰고, 각자의 마음을 온화한 ‘위무‘의 유대를 통해 맺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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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에는 고약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작용하며 금전적인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다. 식료품점과 구두공장과 구둣가게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우리의 출생 배경을 숨기지는 못한다. 릴라가 계산대 서랍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꺼낸다 해도, 그 액수가 3백만 리라가 되었든 5백만 리라가 되었든 돈으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릴라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녹색 옷을 입은 소녀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은 아니었다. 학교 앞으로 니노를 마중 나온 소녀를 보았을 때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보다 우월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아르만도였다. 그가 한 마지막 말에 나는 힘을 얻었다. 문가에 서서 호감을 가지고 나를 대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르만도는 내게 적대적일 줄 알았던 생소한 환경에 도착해보니 이미 나에 대한 평판이 좋아서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내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내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것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대접받는 자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날의 예상치 못한 대우에 나는 기운이 났다.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모든 근심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릴라가 하거나 하지 않을 일 때문에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이야. 하지만 머릿속에 정말 자기 자신이 힘들여 생각해낸 것은 하나도 없어. 모르는게 없는 척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야."

..릴라는 나를 너무나 믿은 나머지 차라리 혼자 비밀로 간직했으면 좋았을 법한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내가 평생 원해온 바로 그 사람을 자신이 얼마나 갈망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릴라는 내가 무디고 눈치가 없어서, 자기가 알아챈 것을 나는 알아채지 못해서 이때까지 니노의 뛰어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릴라가 나를 속이는 건지 아니면 본심을 감추려는 내 성향 때문에 정말로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눈 먼 봉사이자 귀머거리처럼 니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제야 자기가 도나토 사라토레 아들의 매력을 발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추측이 가증스러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릴라에게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가 한밤의 고요 속에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그저 릴라 곁에 머물며 릴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따금 한두 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우리는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셋은 하늘에 펼쳐진 신비로운 건축물에 감탄했다. 릴라는 우리가 꼬리에 꼬리를 잇는 감탄을 멈출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가 자기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두려움이 엄습해온다고 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이 놀라운 건축물 같은 것이 아니라 군청빛의 끈적거리는 역청 속에 흩어진 유리파편 같다고 했다.
..릴라의 말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즈음 릴라는 맨 마지막에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혼자 여유 있게 생각하다가 그때까지 대충이나마 함께 도달한 결론을 말 한마디로 뒤집어놓곤 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났다.

..인간이란 이따금씩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무의미한 말을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가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다른 때 같으면 처음에는 망설였을지라도 결국에는 브루노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 같다. 물론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안토니오도 특별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남자들과는 천천히 정이 드는 법이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남성상에 그다지 부응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브루노는 정중하고 관대했다. 상황이 달랐다면 쉽게 내 애정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릴라의 행동을 막고 릴라와 니노의 관계에 장애물이 되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나와 그녀가 처하게 된 상황을 똑바로 인식시키고 싶었다.

...이번에도 릴라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나를 끌어들였고 니노는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 니노는 가위나 풀, 페인트같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망가뜨리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릴라는 내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걸까. 왜 나는 매번 그녀에게 휩쓸리고 마는 걸까.

..아주머니가 어찌나 웃어대는지 숨을 헐떡였고 두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한동안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때까지 아주머니에 대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감정이 몰려왔다. 우리 어머니와 같은, 그러니까 알 것은 다 알고 있는 여인의 외설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넬라 아주머니의 웃음에는 순결하면서도 품위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이 든 노처녀의 웃음에 옮아 나도 웃기는 했지만 마지못한 억지웃음이었다. 아주머니처럼 좋은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걸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악의에 찬 순결한 처녀의 웃음을 따라 웃었더니 내가 갑자기 나이 든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결국에는 저렇게 웃게 되겠지.‘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다.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들은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불현듯 왜 내가 아닌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게 됐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길 줄 모른다. 감정에 이끌려 틀을 깨뜨릴 줄 모른다. 내겐 니노와 단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릴라와 같은 강인함이 없었다. 나는 항상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나는 그런 상념을 떨쳐버리고 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니노와 릴라가 없는 미래를 계획하고 그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모든 일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법을 익히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는 법을 습득했다. 서점 주인이 내 몸에 손을 대도 분개하지 않고 조용히 밀쳐냈고 진상 손님들에게도 선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나는 매일같이 되뇌었다.
..‘이렇게 생겨먹은 이상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사투리를 쓰고 돈은 땡전 한 푼 없는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가질 수 있는 만큼만 가지자. 참아야 할 때는 끝까지 참자.‘

..그들에게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내 밝은 미래를 위해서 다시는 그들과 볼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 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릴라는 굳이 말하지 않고도 내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고 릴라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실도 나중에 릴라의 공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을 서술하면서 어느 정도의 여과와 시간차, 부분적인 진실과 반쪽짜리 거짓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언어라는 불확실한 도구를 기반으로 힘들게 지난 시간을 측정한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네 말을 듣지 말걸 그랬어."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내 생각을 혼란스럽게 했잖아. 너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 같아. 똑,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지. 네 마음대로 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아."
.."네가 생각해낸 글이고 네가 쓴 글이야."
.."맞아. 그런데 왜 네 번이나 다시 쓰게 한 거야?"
.."다시 쓰려고 했던 건 너야."
.."리나. 내 말 똑똑히 들어.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돌아가서 구두를 팔든 햄을 팔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부탁이니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려고 애쓰다가 나까지 망가뜨리지는 말아줘."

...처음에는 무슨 변장대회라도 나가는 것 같았다. 가면을 너무 잘 만들어서 ‘거의‘ 진짜 얼굴이 된 것 같았다.
..불현듯 ‘거의‘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해낸 건가. 거의 그렇다. 나폴리에 있는 고향 동네에서 이제는 완전히 벗어난 건가. 거의 그렇다. 나는 교육 수준이 높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갈리아니 선생님이나 그녀의 아이들보다 더 수준 높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시험에 시험을 거치면서 권위 있는 교수님들에게 인정받는 학생이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거의‘라는 단어 뒤에 실상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피사로 온 첫날부터 나는 두려웠다. 나는 ‘거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회 문제를 아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일종의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 문제를 그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정보로 과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나 실력을 인정받기 위한 이용 수단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었다.

..동네의 계집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의 부인이 되기를 꿈꿨지만 커가면서는 정부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키웠다. 정부는 부인보다 활발하고, 전투적이고 무엇보다 더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정실부인이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기존 부인은 대부분 성격이 못됐고 이미 오래전부터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곤 했다) 중한 병에 걸려서 죽으면 정부 노릇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그동안 간직해온 사랑의 꿈을 이루기를 은근히 바랐다. 옳지 않은 측의 편을 드는 셈이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존 관습이 재정립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쓰는 데 20일이 걸렸다. 그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식사할 때만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글을 그만 쓰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수치심이 내게서 공책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준 공책을 식탁에 두고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나는 장난조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준 선물은?"
..그는 당황하며 공책을 가지러 달려갔다.
..우리는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입을 맞추고 포옹하면서 아르노 강가를 걸었다. 나는 진담 반 농담 반 조로 내 방에 몰래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내게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안토니오와 피에트로 사이에는 도서관 하나가 통째로 있었지만 둘은 정말 닮아 있었다.

..아이로타 가족들은 자기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자신들의 일에 누가 관심이나 있겠느냐는 듯한 태도로 행동하면서 그래도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도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 동안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인부들은 남자건 여자건 주변 일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서로 웃거나 욕설을 주고받을 때조차도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웃음소리와 목소리, 작업하고 있는 그 쓰레기 같은 재료며 악취에서조차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거기까지 릴라를 찾아간 것이 교만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마음에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긴 여행이 결국 릴라가 잃어버린 것을 나는 얻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내가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와의 마찰과 벌칙금을 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나에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 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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