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에는 고약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작용하며 금전적인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다. 식료품점과 구두공장과 구둣가게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우리의 출생 배경을 숨기지는 못한다. 릴라가 계산대 서랍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꺼낸다 해도, 그 액수가 3백만 리라가 되었든 5백만 리라가 되었든 돈으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릴라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녹색 옷을 입은 소녀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은 아니었다. 학교 앞으로 니노를 마중 나온 소녀를 보았을 때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보다 우월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아르만도였다. 그가 한 마지막 말에 나는 힘을 얻었다. 문가에 서서 호감을 가지고 나를 대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르만도는 내게 적대적일 줄 알았던 생소한 환경에 도착해보니 이미 나에 대한 평판이 좋아서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내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내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것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대접받는 자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날의 예상치 못한 대우에 나는 기운이 났다.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모든 근심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릴라가 하거나 하지 않을 일 때문에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이야. 하지만 머릿속에 정말 자기 자신이 힘들여 생각해낸 것은 하나도 없어. 모르는게 없는 척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야."
..릴라는 나를 너무나 믿은 나머지 차라리 혼자 비밀로 간직했으면 좋았을 법한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내가 평생 원해온 바로 그 사람을 자신이 얼마나 갈망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릴라는 내가 무디고 눈치가 없어서, 자기가 알아챈 것을 나는 알아채지 못해서 이때까지 니노의 뛰어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릴라가 나를 속이는 건지 아니면 본심을 감추려는 내 성향 때문에 정말로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눈 먼 봉사이자 귀머거리처럼 니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제야 자기가 도나토 사라토레 아들의 매력을 발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추측이 가증스러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릴라에게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가 한밤의 고요 속에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그저 릴라 곁에 머물며 릴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따금 한두 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우리는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셋은 하늘에 펼쳐진 신비로운 건축물에 감탄했다. 릴라는 우리가 꼬리에 꼬리를 잇는 감탄을 멈출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가 자기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두려움이 엄습해온다고 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이 놀라운 건축물 같은 것이 아니라 군청빛의 끈적거리는 역청 속에 흩어진 유리파편 같다고 했다. ..릴라의 말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즈음 릴라는 맨 마지막에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혼자 여유 있게 생각하다가 그때까지 대충이나마 함께 도달한 결론을 말 한마디로 뒤집어놓곤 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났다.
..인간이란 이따금씩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무의미한 말을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가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다른 때 같으면 처음에는 망설였을지라도 결국에는 브루노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 같다. 물론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안토니오도 특별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남자들과는 천천히 정이 드는 법이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남성상에 그다지 부응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브루노는 정중하고 관대했다. 상황이 달랐다면 쉽게 내 애정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릴라의 행동을 막고 릴라와 니노의 관계에 장애물이 되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나와 그녀가 처하게 된 상황을 똑바로 인식시키고 싶었다.
...이번에도 릴라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나를 끌어들였고 니노는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 니노는 가위나 풀, 페인트같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망가뜨리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릴라는 내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걸까. 왜 나는 매번 그녀에게 휩쓸리고 마는 걸까.
..아주머니가 어찌나 웃어대는지 숨을 헐떡였고 두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한동안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때까지 아주머니에 대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감정이 몰려왔다. 우리 어머니와 같은, 그러니까 알 것은 다 알고 있는 여인의 외설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넬라 아주머니의 웃음에는 순결하면서도 품위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이 든 노처녀의 웃음에 옮아 나도 웃기는 했지만 마지못한 억지웃음이었다. 아주머니처럼 좋은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걸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악의에 찬 순결한 처녀의 웃음을 따라 웃었더니 내가 갑자기 나이 든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결국에는 저렇게 웃게 되겠지.‘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다.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들은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불현듯 왜 내가 아닌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게 됐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길 줄 모른다. 감정에 이끌려 틀을 깨뜨릴 줄 모른다. 내겐 니노와 단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릴라와 같은 강인함이 없었다. 나는 항상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나는 그런 상념을 떨쳐버리고 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니노와 릴라가 없는 미래를 계획하고 그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모든 일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법을 익히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는 법을 습득했다. 서점 주인이 내 몸에 손을 대도 분개하지 않고 조용히 밀쳐냈고 진상 손님들에게도 선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나는 매일같이 되뇌었다. ..‘이렇게 생겨먹은 이상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사투리를 쓰고 돈은 땡전 한 푼 없는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가질 수 있는 만큼만 가지자. 참아야 할 때는 끝까지 참자.‘
..그들에게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내 밝은 미래를 위해서 다시는 그들과 볼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 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릴라는 굳이 말하지 않고도 내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고 릴라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실도 나중에 릴라의 공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을 서술하면서 어느 정도의 여과와 시간차, 부분적인 진실과 반쪽짜리 거짓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언어라는 불확실한 도구를 기반으로 힘들게 지난 시간을 측정한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네 말을 듣지 말걸 그랬어."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내 생각을 혼란스럽게 했잖아. 너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 같아. 똑,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지. 네 마음대로 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아." .."네가 생각해낸 글이고 네가 쓴 글이야." .."맞아. 그런데 왜 네 번이나 다시 쓰게 한 거야?" .."다시 쓰려고 했던 건 너야." .."리나. 내 말 똑똑히 들어.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돌아가서 구두를 팔든 햄을 팔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부탁이니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려고 애쓰다가 나까지 망가뜨리지는 말아줘."
...처음에는 무슨 변장대회라도 나가는 것 같았다. 가면을 너무 잘 만들어서 ‘거의‘ 진짜 얼굴이 된 것 같았다. ..불현듯 ‘거의‘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해낸 건가. 거의 그렇다. 나폴리에 있는 고향 동네에서 이제는 완전히 벗어난 건가. 거의 그렇다. 나는 교육 수준이 높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갈리아니 선생님이나 그녀의 아이들보다 더 수준 높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시험에 시험을 거치면서 권위 있는 교수님들에게 인정받는 학생이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거의‘라는 단어 뒤에 실상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피사로 온 첫날부터 나는 두려웠다. 나는 ‘거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회 문제를 아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일종의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 문제를 그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정보로 과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나 실력을 인정받기 위한 이용 수단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었다.
..동네의 계집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의 부인이 되기를 꿈꿨지만 커가면서는 정부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키웠다. 정부는 부인보다 활발하고, 전투적이고 무엇보다 더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정실부인이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기존 부인은 대부분 성격이 못됐고 이미 오래전부터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곤 했다) 중한 병에 걸려서 죽으면 정부 노릇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그동안 간직해온 사랑의 꿈을 이루기를 은근히 바랐다. 옳지 않은 측의 편을 드는 셈이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존 관습이 재정립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쓰는 데 20일이 걸렸다. 그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식사할 때만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글을 그만 쓰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수치심이 내게서 공책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준 공책을 식탁에 두고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나는 장난조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준 선물은?" ..그는 당황하며 공책을 가지러 달려갔다. ..우리는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입을 맞추고 포옹하면서 아르노 강가를 걸었다. 나는 진담 반 농담 반 조로 내 방에 몰래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내게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안토니오와 피에트로 사이에는 도서관 하나가 통째로 있었지만 둘은 정말 닮아 있었다.
..아이로타 가족들은 자기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자신들의 일에 누가 관심이나 있겠느냐는 듯한 태도로 행동하면서 그래도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도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 동안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인부들은 남자건 여자건 주변 일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서로 웃거나 욕설을 주고받을 때조차도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웃음소리와 목소리, 작업하고 있는 그 쓰레기 같은 재료며 악취에서조차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거기까지 릴라를 찾아간 것이 교만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마음에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긴 여행이 결국 릴라가 잃어버린 것을 나는 얻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내가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와의 마찰과 벌칙금을 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나에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 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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