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
..채 밝지 않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눈뜨며 고통스러운 꿈의 여운이 남아 있는 의식을 더듬어 뜨거운 ‘기대‘의 감각을 찾아 헤맨다. 내장을 태우며 넘어가는 위스키의 존재감처럼 뜨거운 ‘기대‘의 감각이 몸속 깊숙한 곳에 분명하게 되살아나기를 불안한 심경으로 바라는 그 헤맴은 언제까지고 바라는 것을 찾지 못한다. 힘 빠진 손가락을 붙여 모은다. 온몸 구석구석 살과 뼈들의 존재감이 제각각 느껴지면서 묵직한 통증으로 변해가는 것을, 밝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꺼리듯 뒷걸음질 치며 깨어나는 의식을 통해 느낀다. 그렇게 둔탁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연결성을 느끼지 못하는 무거운 육신을 나는 체념한 기분으로 다시금 받아들인다. 도대체 어떤 사물이 어떨 때 취하는 자세인지 떠올리기를 명백히 원치 않는 자세로 팔다리를 비틀어 꺾은 채 나는 자고 있었던 것이다.

13p.
...뜨거운 ‘기대‘의 감각은 되돌아오지 않지만 공포심은 없어졌다. 나는 모든 것에 무관심해졌고 지금 내가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다만 완벽하게 무관심한 나 자신을 어느 누구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유감스럽게 느껴진다. 개? 개는 눈이 없다. 무관심한 나 역시 눈이 없다. 사다리를 내려왔을 때부터 나는 줄곧 눈을 감은 채로 있었으니까.

15p.
...나는 친구의 죽은 육체가 존재의 전 기간에 걸쳐 단 한 번뿐인 비행을 행하는 풍요로운 시간을 지켜보는 동안, 어린아이의 정수리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또 다른 시간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내 육체가 부패의 시간을 체험할 때, 친구의 눈이 그것을 지켜보고 정당한 의미를 이해해주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8~39p.
.."무릇 모든 번민이라는 게 일단 해결되고 나면 어리석고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 아닌가요? 형이 일부러 귀국해서 요양소에 들어가는 일만 해도 형 머릿속에서 헝클어진 매듭이 풀리고 나면 그저 어리석고 시시한 짓으로 기억되고 끝나지 않겠어요?"
..다카시가 반발하듯 말했다.
.."풀리기만 한다면야……. 하지만 풀리지 않는다면 그 어리석고 시시한 일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거지."
..솔직한 기대감을 담아 친구가 말했다.
.."도대체 형 머릿속을 잡아두고 있는 게 뭐예요?"
.."그건 분명하지 않아. 그게 분명해진다면 나는 그걸 극복하고 이따위 어리석고 시시한 일에 매달려 몇 년씩 허비한 걸 후회하기 시작할 테니까. 거꾸로 내가 그것에 굴복해서 인생의전부로 삼는 식의 자기 파괴로 향하게 된대도 차츰 그 끈의 정체를 뚜렷이 알 수 있게 되겠지. 하긴 그 경우에도 알게 된 일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건 아니야. 또 광기를 키워온 한 인간이 극한 상태에서 이해한 일 같은 건 타인한테 전할 방법이 없지."

58p.
.."오히려 자신의 의지로 취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나는 알코올중독자예요. 어머니도 똑같았거든요. 내가 어느 정도 취했을 때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그 이상 취해 버리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나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분 좋은 취기에서 벗어나는 게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163~164p.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형수님 또한 독특해."
..나는 다카시가 머리를 붉게 칠하고 목을 매고 죽은 친구에 대해 그 사람은 독특한 인간이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고, 그 말은 방금 다카시가 한 말과 겹쳐지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을 흔들었다. S형 또한 독특한 인간이었다고 다카시가 말한다면 나는 더 이상 그의 꿈의 기억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아는 척하며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은 모두 죽어버린 이들, 타인에게 전달 불가능한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어떤 존재감을 진정으로 느낀 사람이 할수 있는 말이었다.

211p.
..꿈속에서 동요된 정서는 잠에서 막 깨어난 내 몸 구석구석에 여전히 쌓여 있고, 꿈의 실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에 찬 불안한 동요만이 균형을 잃을 만큼 잠에서 깬 나를 압도했다. 나는 정화조가 내부에 있고 콘크리트 뚜껑으로 닫힌 직육면체의 구덩이를 간절히 그리워했다....

242p.
.."하지만 나한테는 그건,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로 끝나지 않아. 전쟁터에서도 일상인의 감각으로 살면서도 유능한 악의 집행자였던 육친 한 사람을 발견한 거야, 형. 내가 맏형의 시대를 살았다면 이건 나 자신이 쓴 일기일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내 세계의 전망에 새로운 측면이 열리는 것처럼 느껴져."

298p.
...개가 아니라면 애처롭도록 허망하게 발기한 자신의 페니스를 그처럼 솔직하게 노출시킬 수 있는 이는 없다. 다카시는 내가 모르는 어둠의 세계에서 경험한 것을 누적시켜, 고독한 개처럼 절박한 솔직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개가 자신의 우울을 말로 할 수 없듯이, 다카시 또한 타인과 공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머릿속 한가운데에 묵직하게 응어리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318~319p.
.."작가? 분명히 그 사람들은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하고서도 맞아 죽지도 않고 미치광이가 되지도 않고 살아남을지도 모르지. 그 작자들은 픽션의 틀로 사람들을 온통 기만하지. 그러나 픽션의 틀을 덮어씌우면 아무리 끔찍한 일도 위험한 일도 파렴치한 일도 자신의 신변은 안전한 채로 말해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작업을 본질적으로 취약하게 만들고 있어. 아무리 작가가 절실하게 진실을 말할 의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픽션의 형태로 무슨 일이건 말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는 모든 진실의 독성에 대해 미리 면역이 되어 있는 거야. 그건 결국 독자한테도 전달되어서 픽션의 틀 속에서 전개되는 내용에는 벌거벗겨진 영혼에 직접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깔보이게 되는 거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장으로 인쇄된 것 중에는 내가 상상하고 있는 종류의 사실 얘기란 존재하지 않아. 기껏해야 진실을 말할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포즈를 취하는 소설을 만나는 정도야."

508p.
..‘다카라면 당장 그곳으로 가서 그의 새 생활을 획득했을 테지. 다카는 일부러 코끼리를 잡으러 아프리카까지 가는 인간에게 휴머니즘적 희망을 걸고 있었다고 모모가 말했어. 모든 도시의 동물원이 핵전쟁으로 전멸한 뒤, 아프리카의 오지로 코끼리를 잡으러 가는 최초의 사내가 다카가 꿈에 그리던 타입의 인류였지.‘

532p.
...그리고 나는 아내가 다카시의 아이를 출산하려고 결심한 본질적 의미의 모든 것을, 하나의 돌덩어리를 보듯이 구체적으로 이해했다. 그 이해는 어떠한 정서적인 혼란도 야기하지 않고 나의 내부에 자리 잡았다....

539~540p.
..다카시나 아내와 함께 그것을 봤을 때 느꼈던 깊은 위안의 감정이, 지금은 단순히 나의 정서에 의해 환기되는 수동적인 인상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화면에 실재하는 회화적 실체로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을 보았다. 화면에 능동적으로 실재하는 대로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농밀한 ‘위무(慰撫)‘ 그 자체이다. 회화의 주문자는 아마도 궁극적인 ‘위무‘의 실체를 그려줄 것을 화가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물론 지옥은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으면서 자기를 유폐시키고 고독한 그 자신의 지옥에 맞서 있는 동생을 진혼하기 위한 그림이니까. 그러면서도 불꽃의 강은 아침 햇살을 머금은 물든 산딸나무의 잎사귀 뒷면처럼 붉게 칠하지 않으면 안 되고, 불의 파도의 선은 여자의 치맛자락 주름치럼 찬찬히 부드럽게 그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위안‘ 그 자체인 화염의 강이 실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혼자서 울부짖고 괴로워하는 망자인 동시에 고통을 가하는 도깨비이기도 한 성난 동생을 진혼하기 위한 그림이므로, 망자의 고통도 도깨비의 가혹함도 정확히 그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도깨비와 망자는 고뇌의 표출과 잔학의 실천에 번갈아 힘쓰고, 각자의 마음을 온화한 ‘위무‘의 유대를 통해 맺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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