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잘못 키워서 그래."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 귀국하여 고생이 심했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피로하면 그만둬버리고, 조그만 장애가 있어도 하던 일을 놓아버리고, 편한 쪽으로만 하염없이 흘러가려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다.

..달빛이 무척 밝게 느껴졌다. 학교에 이르는 길이 무척 신선했다. 시간과 목적이 달라지면 풍경을 느끼는 감정도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다.

..가게로 들어선다. 아다마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가게에는 미국 냄새가 가득했다. 아다마는 그게 싫었던 것이다. 미국 냄새라 해도 실제로 미국에는 그런 냄새가 없다. 그러나 그 냄새는 기지촌의 단독주택에도 혼혈아의 머리카락에도 기지의 PX에도 있다. 인간의 지방 냄새다. 나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영양이 가득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다마, 그건 아니야. 내 자신이 싫어졌을 뿐이야."
..나와 아다마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신이 싫어졌다. 그것은 열일곱 살 소년이 여고생에게 사랑을 구걸할 때 이외에는 결코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대사다. 누구든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경제력도 없고 아내도 없는 지방도시의 이름 없는 열일곱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선별되어 가축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귀로에 선 순간이므로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면, 그 후의 인생이 어두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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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사랑받을 자격도 살아갈 가치도 없다고 여기고 확신하게 하는 ‘근본적인 체험(原體驗)’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존재가 그들을 노골적으로 버렸다든가, 예뻐하는 척만 하고 진심으로 애정을 주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진심으로’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즉 그들에게 애정이 가장 필요했던 어린 시절에 누구보다 그들을 먼저 챙기며 마음뿐 아니라 시간과 수고를 내줬다는 뜻이다. 소중한 사람이 그들을 두고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다거나 일이나 생활에 쫓겨서 매사에 건성이었다면 어린 자녀는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다 큰 어른들에게 자기 긍정감을 가지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전문가가 있다. 이는 한창 자랄 나이에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키가 덜 자란 사람에게 키를 더 키우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 긍정감은 그때까지 살아온 인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기 긍정감을 높이라는 둥 안일하게 말하는 건 정말로 고통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떠드는, 그야말로 입에 발린 말처럼 들린다.

..의학적 진단은 병명에 따른 카테고리에 의해 내려진다. 특히 정신의학은 증상을 바탕으로 진단을 내리는 구식(舊式)이다 보니, 증상의 숫자만큼 진단명이 붙는다. ‘우울 상태(기분 변조증)’ ‘불안장애’ ‘불면증’ ‘의존증’ ‘섭식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발모벽’ ‘섬유근통증’ ‘만성피로증후군’ ‘만성두통’ ‘편두통’ ‘과민대장증후군’ 등 이런 식으로 여러 진단명이 내려진다. 각각의 병명은 독립된 것으로 각기 다른 진단기준과 치료방침이 있으며, 각기 다른 전문학회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단지 증상을 나열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A씨에게 생긴 진짜 문제를 규명하는 본래의 진단이라고 할 수 없다. 감기를 ‘발열’ ‘콧물’ ‘재채기’라는 증상별로 진단해 해열제와 콧물약, 기침약 등 증상별로 약을 처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감기 정도는 내버려두어도 자연스럽게 낫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A씨와 같은 상태는 그야말로 몸과 마음 그리고 인생 전체가 점점 심각한 상태로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증상이 있을 때마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는 악순환을멈추지 못하고, 무엇이 근본적인 원인이며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규명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진단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A씨를 괴롭히는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애착장애’다.

..앞서 1장에서 살펴본 ‘기이한 병’은 미국에서도 1940년대까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경계상태’라는 보고가 있었다. 당시의 정신의학 개념으로는 정신병이나 신경증이라고도 정의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상태였다. 심지어 전문가조차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러 정서가 불안정한 환자가 자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고 격분하면서 정신과 병동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환자를 종래의 방식으로 치료하자 치료 스태프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사사건건 부딪치는 등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를 ‘경계사례’라고 불렀으며, 일본에서도 서서히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고 생명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는 등의 증상에 많은 사람이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렇게 정신과 병동이나 영화 속에서 일어날 법했던 현상들이 그로부터 20~30년 사이에 점차 일반가정이며 학교에서 일상적인 광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경계성 인격장애’라고 부르는 상태의 짧은 역사다.

..일련의 실험을 통해 자식에게 어머니란 돌봐주거나 젖을 물려주는 존재라기보다 매달리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임이, 일단 집착이 생겨나면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하는 특별한 존재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이렇게 ‘특별한 존재’에 대한 집착이 새끼원숭이의 안정감뿐 아니라 발달과 생존까지 지탱해주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바로 그즈음 볼비는 특정한 양육자와의 연결이 안전감과 생존·적응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이렇게 특별한 유대관계를 ‘애착(attachment)’이라고 불렀다. 할로우의 실험은 애착의 존재를 그대로 증명해준 셈이다.

..인생에 걸림돌 하나 없어 보였던 그도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못했던 탓에 심각한 애착장애가 있었다. 그의 출세작인 『가면의 고백』은 동성애와 마조히즘 같은 성적 도착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자기 존재와 삶에 대해 뿌리에서부터 위화감을 안고 있었으며, 타인을 존재 자체로 사랑하지 못하는 장애였다는 것이다. 이는 다자이가 『인간실격』에서 이야기한 힘겨운 삶과 본질이라는 면에서 같다.

..자기 분노나 통증 등이 너무 심해서 정신을 자신에게 너무 집중한 탓에 상대의 기분이나 주변 상황을 살펴볼 겨를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면 정신화 능력은 발달하기 힘들다. 자기에게 생긴 사태나 감정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이해하거나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고하는 정신화는 자기가 느끼는 고통을 완화해주지만, 이러한 능력이 취약하면 자기 통증에만 집중하게 된다. 상대의 기분이나 사정보다도 자기 고통에만 사로잡혀서 의도치 않은 일이 벌어지면 과잉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상대뿐 아니라 자기의 고통과 스트레스까지 가중된다.

..그런데 회피형은 타인에게만 무관심한 게 아니다. 자기 기분이나 감정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며 흥미가 없다. 기분이나 감정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일에 열중해 잊어버린다. 자기 기분과 감정에 관심이 없다 보니 당연히 말로 표현하거나 상대에게 전달하는 데는 더더군다나 관심이 없다. 그런 일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생물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걸까? 우리에게 기쁨이나 만족을 주기 위한 체계에는 과연 어떤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걸까? 사실 사람에게 기쁨이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생물학적 체계는 다음의 세 가지밖에 없다.
..첫째는 배불리 먹거나 성적으로 흥분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엔도르핀 등 내인성 마약(뇌내마약)이 분비되면서 생기는 쾌감이다. 생리적 충족과 깊이 연관돼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기쁨을 가져다준다.
..두 번째는 보수계라고 불리는 체계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작용한다. 대뇌 선조체(Striatum; 뇌 기저핵의 한 영역으로 자발적인 움직임의 선택과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함-옮긴이)의 측좌핵(Nucleus accumbens; 동기 및 보상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보상체계-옮긴이)이라고 부르는 부위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면 사람은 쾌감을 느낀다.
..도파민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목적을 달성해냈을 때 분비된다.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은 순간에 도파민이 분비되며 ‘해냈다!’라는 쾌감을 느낀다. 수학 문제를 풀거나 마라톤을 완주했을 때도 유사한 희열이 생기면서 다시 노력해 다음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동기가 부여된다.
..그런데 이러한 보수계는 간혹 악용된다. 힘들이는 노력 없이 도파민만 분비되도록 해 즉흥적인 만족을 주면 강렬한 쾌감이 쉽게 얻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약이다. 알코올과 같은 의존적 물질도, 도박처럼 끊지 못하는 행위도 즉흥적으로 도파민 분비를 일으켜 중독되게 만드는 것이다(마약은 내인성 마약 분비를 수반하기도 한다).
..세 번째로 기쁨을 가져다주는 체계는, 이미 눈치 챘겠지만, 애착이다. 이는 옥시토신의 작용에 달려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피부끼리 닿았을 때 흥분보다는 편안함이 가득하게 밀려온다.

..기쁨을 가져다주는 세 가지 체계 중 애착 시스템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기본적인 안정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이 먹고 배가 부를 때 내인성 마약이 분비되며 얻는 생리적 만족이든, 노력해서 목표를 완수할 때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보수계 만족이든, 이는 어떤 행위로 인해 처음으로 손에 넣은 것이다. 만족을 얻고 싶으면 끊임없이 계속 먹어야 하거나 노력을 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해야만 한다.
..하지만 애착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안정감만은 유일하게 특정 행위나 그로 인해 달성된 결과가 필요하지 않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자기 모습으로 있을 뿐인데 조건 없이 얻어지는 만족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행위도, 노력도 필요 없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안정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만 회피형과 불안형의 특성적 차이도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불안형은 부모와의 사이가 원만한지가 매우 중요한 데 반해, 회피형은 일이 잘되는지가 위험성을 크게 좌우했다. 회피형의 경우, 약한 소리를 하며 상담을 청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며 난리를 피우거나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한계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거나, 알코올이나 인터넷게임·도박에 빠지든가,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두거나 한다. 그나마 이 정도는 안전장치가 작동 중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는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아서 자기가 자기를 쉬게 하지 못하는 채로 내달리다가 느닷없이 자살해버리는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 죽을 것 같은데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주변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회피형은 의사의 지시를 지키지 않으며 사망률이 높다는 결과가 있다. 이는 어릴 적부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며, 자기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고 학습해온 결과다.

..희망이란 기쁨을 향한 기대다. 지금 당장 기쁘지 않더라도, ‘언젠가 기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으로도 사람은 계속 살아간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쁨뿐 아니라 희망조차도 잃어버리고 나면 사람은 더 살아가지 못한다.
..사람에게 조건 없이 기쁨을 주는 체계가 애착을 지탱해주는 옥시토신계다. 애착하는 존재를 변함없는 마음으로 신뢰한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애착하는 존재가 없거나, 애착하는 존재가 있더라도 사이가 불안정하고 언제든지 증오나 분노·실망으로 바뀔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로울 때, 그리고 그것을 보상해주는 기쁨마저 잃어버렸을 때, 사람은 죽음으로 돌아선다. 애착 존재의 유무는 마치 ‘단단하고 평평한 땅에 섰는가, 골짜기 쪽으로 기울어진 땅에 섰는가’ 하는 만큼의 차이다.
..늘 분발하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은 어떻게든 살아진다. 그러나 힘을 낼 기력마저 사라져버리면, 더는 굴러 떨어지는 그를 지켜줄 버팀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애착장애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뜻이다.

..장애의 정도를 그가 안고 있는 고통으로 측정할 수만 있다면, 애착장애는 절대 가볍지 않다. 조금이라도 그들을 치료해본 전문가라면 오히려 더 큰 고통 속에 있다는 걸 결코 모를 리 없다. 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에 더욱 심각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의학의 진보로 암이나 치매조차도 치료가 가능해진 오늘날, 정말 치료가 곤란한 병을 꼽으라면 오히려 이쪽이다. 치료할 방법이 없어서라기보다 질병으로조차 인식되지 않고 문전박대 당해온 결과이며, 아무도 본격적으로 치료에 매달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인류의 앞을 가로막을 질병이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진짜 원인이 애착장애라는 게 널리 인식되면 상황은 크게 바뀔 것이다.

..경계성 인격장애, 섭식장애, 의존증, 만성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부모들에게는 안전기지가 될 능력이 부족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는 아이의 안전기지가 되는 것이 아이의 회복에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안전기지가 되어준다는 걸, 아이가 말하는 대로 하는 거라고 오해하거나,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안전기지가 된다는 건 아이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게 첫 번째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적절한 보살핌, 적절한 거리 유지 역시 필요하다. 내버려 둔다는 건 그저 방임일 뿐이며, 말대로 한다는 건 본래 의미로 보면 그를 지키고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다. 안전기지란 어디까지나 최종적으로 아이를 자립시키기 위한 체계이지,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을 대신해줘서 나약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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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바로 대상행동이라는 거다. 나는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대상행동이란 한 목표가 어떤 장애로 저지되어 그 목표 달성이 안 되었을 때 이에 대신하는 다른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처음에 가졌던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동으로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본래 추구하던 행위 뒤에 감춰진 충동이나 욕구는 다른 행위로 나타나고, 본래의 목표는 다른 행위를 하고자 하는 목표로 바뀐다. 이를 대상행동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이 위키피디아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면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내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전쟁, 사망, 질병, 침략, 재앙, 범죄가 끊이질 않는다. 인도에서 물대신 살충제를 먹고 자살한 다섯 명의 농부들도 결국은 한 개인이었다. 꿈을 가진, 계획을 가진 그리고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개인. 신문에서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떨쳐버리려고 한다.

.."쇼핑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 최근에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요즘은 기대라는 게 없는 시대구나....... 바라는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지는 시대잖아. 소원이 이루어질 날을 기대하면서 꿈꿀 시간조차 없다니깐. 정말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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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그 자체를 즐기자.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말고 살자.
..눈을 감고 상상했다.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태양빛, 청결한 마룻바닥, 고급 소파와 단정한 커피 테이블, 그리고 창가에 장식한 꽃.
..빨간 베네치아 글라스 꽃병은 앞으로도 소중히 사용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리려고 했다. 볼때마다 사토시가 떠올라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렇게 멀지 않은 어느 날, 사토시를 떠올리지 않고 또 다른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깨끗한 거실에서 정성껏 우린 홍차를 마시자.
..혼자서 느긋하게 살아가는 성인 여자가 되자.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결심하고 눈을 반짝 떴을 때, 열어둔 창으로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진짜지. 너는 분명히 뭔가 이루어 낼 인간이야. 이 할아비는 안다."
..비장의 무기인 이 마법의 말은 사실 근거라곤 없지만, 사람의 미래는 모르니까 꼭 거짓말이라곤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말이 평생 마음을 지켜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생각이 비뚤어져서 시간을 낭비하던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말씀해주셨다.
.."너는 특별한 사람이야.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애들과는 달라. 뭔가 네 손에 꼭 움켜쥘 날이 올 거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어머니에게 화를 냈지만, 내심 기뻤다. 단순하다면 단순하지만, 인생에 희망을 본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그 말씀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뱃속이 따뜻해진다.
..힐끔 보니 하루토의 뺨도 살짝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루토의 몸을 칭칭 동여맨 ‘어차피 나 같은 것‘이라는 실이 아주 조금이라도 풀렸다면 좋으련만.......

.."이해해요. 전쟁 전에 태어나신 분들은 대부분 그러시거든요.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정리를 지도하면 정말 힘들어요. 필요 없는 줄 알면서도 버리기 싫다는 생각이 강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사람에게 줘서 정리한다는 생각 말고는 하지 못하세요. 나한테 필요 없는 물건은 대체로 다른 사람 역시 필요 없다는 것까지는 잘 모르시죠. 어르신, 제가 도와드릴게요. 전화번호부를 빌려주실래요?"

..옛날 사람은 어땠을까? 도마리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는 영양 상태도 위생 상태도 좋지 않고 약도 없어서 아이가 많이 죽는 시대였다. 그렇게 예전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 슬픔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지금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장수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의학도 발달해서 병도 치료할 수 있다. 그런 현대에 사는 우리는 예전보다 상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아닐까.
..선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나, 한편으로 시대 불문하고 아이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예전에는 아이가 많이 죽었으니까 여러 사람이 상실감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다들 괴롭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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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p.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만족감이 높은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정서와 판단이 문제와 실패로 쉽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상의 기쁨에 감사하고, 과거의 슬픔에 빠져드는 대신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으로 부정성의 힘에 대항한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들의 삶이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특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은 젊은이들보다 기분이 더 좋고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배움의 기회는 무시하고 행복을 주는 것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14p.
...혐오와 오염에 대한 로진의 실험은 러시아 속담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타르(tar) 한 숟가락은 꿀 한 통을 망칠 수 있지만, 타르 한 통에 들어간 꿀 한 숟가락은 아무것도 아니다."

80p.
...이 실험 결과를 보고 영감을 얻은 시카고의 심리학자들은 새로운 상호성 법칙을 제안했다. ‘당신이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당신의 등을 긁어주겠지만, 당신이 내 한쪽 눈을 가져간다면 나는 당신의 양쪽 눈을 다 가져가겠다.‘

156p.
..이것이 처벌의 이점 중 하나다. 처벌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실제 사용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다. 보상은 계속해서 주어야 하지만, 처벌은 단지 위협만으로도 그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다....

161p.
..심리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죄책감을 수치심과 구분하는데, 둘의 사회적 이득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나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자신의 핵심 자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분노하면서 철수하거나, 숨거나,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대조적으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나쁜 행동을 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것은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죄책감은 사람들이 고백 · 사과 · 노력 · 헌신에 대한 재확인을 통해 파트너나 친구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180p.
..또 하나의 흔한 반응은 투쟁, 즉 화를 내고 똑같이 갚아주려는 것이다. 분노와 공격성이 친구를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슬픔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기분에는 도움이 된다. 드월이 실험 결과를 요약한 것처럼, 외톨이들은 세상을 ‘핏빛 안경‘을 통해 보기 시작한다. 일단 사람들은 실험실에서 거부를 경험하면, 최악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호하거나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말이나 행동에서 적대감과 공격성을 읽어냈다. 그들은 자신이 이전에 당한 거부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포함해 타인을 처벌할 기회가 있을 때 더 공격적이었다.

240p.
...세디키디스는 솔 벨로(Saul Bellow)의 소설 《자믈러 씨의 행성(Mr. Sammler‘s Planet)》에 나오는, 과거를 돌아보기 좋아하는 등장인물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기억이 필요합니다. 기억은 무의미함을 피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253p.
..유럽 대중의 생활수준은 혁명적인 사상과 제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이 몰락하자 학자, 발명가 그리고 상인들은 제국의 간섭 없이 지식을 공유하고 혁신할 수 있는 독립적인 봉토로 분권화했다. 중세는 이전에는 로마 유한계급의 영화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 때문에 ‘암흑시대‘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학자인 장 짐멜(Jean Gimpel)의 말에 따르면, 중세는 사실 ‘인류의 위대한 혁신시대 중 하나‘였다. 그는 중세를 최초의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로마 경제의 동력이 노예 노동력이었던 데 비해, 중세 공학자들은 유럽 전역에 댐과 효과적인 새 물레방아를 만들어 자연의 힘을 활용했다. 풍차가 흥행하였으며 해안 저지대에 자리한 여러 국가에서는 그것을 배수에 활용했다. 독일의 ‘야만인들‘은 훨씬 개량된 형태의 철을 개발했다. 바이킹들은 조선과 항해술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 기계식 시계와 안경이 발명되었다. 윤작의 발달과 써레 및 무거운 새 쟁기의 발달로 농업 생산성은 급격히 향상되었고, 로마 시대에 비해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영양 섭취가 나아지고 건강해졌다.

257p.
...우리는 자신의 장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테러리즘이나 핵무기, 혹은 기후 변화가 지구상의 문명이나 삶에 ‘실존적 위협‘을 가한다고 상상한다. 위험이 멀리 있을수록 경고는 종말론적으로 되는 이러한 상황은 마치 두려움의 반비례 법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누리는 안전과 번영은 우리에게 더 많이 걱정할 시간과 더 많은 걱정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이용하는 공포 장사꾼들은 더 늘어나고 있다.

275~276p.
..반흡연 집단이 이러한 발전을 반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일부는 그랬다) 그들 중 대부분은 마치 오브 다임스 증후군(March of Dimes Syndrome)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악성 사례를 발달시켰다. 이것은 훨씬 가치 있는 단체에서 그 이름을 따오기는 했지만, 위기 장사꾼 집단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마치 오브 다임스는 소아마비와 싸우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지만, 소아마비 백신이 개발돼 이 질병의 위협을 종식시키자, 이 기관은 승리를 선언하고 해산하는 대신 싸워야 할 새로운 질병을 찾아냈다....

292p.
..이제 똑같은 종류의 진화가 소셜 미디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낡은 대중매체 뉴스의 독과점에서 벗어나 스스로 뉴스 매체를 찾고 있으며, 또다시 재난의 예언이 나타났다. 권위자와 전문가가 선거를 뒤흔들 ‘가짜 뉴스‘의 출현과 대중을 양극화시킬 ‘이념 피난처(ideological silos: 미국 대중이 자신과 이념이 같은 사람들과만 고립되어 소통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옮긴이)‘와 ‘반향실(echo chamber: 벽을 특수 재료로 만들어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메아리치는 방을 가리키는 말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며 의견이 증폭 및 강화되는 현상을 뜻하는 말—옮긴이)‘을 비판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구글·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를 비롯한 다른 소셜 미디어 회사도 공공기업처럼 규제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비관주의자들이 또다시 문제를 과장하며 잘못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296p.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집단 안에 있을 때는 정신이 이상해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오직 천천히, 그리고 한 명씩 한 명씩 이성을 되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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