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는 대상의 한계를 소상히 지적해 주려는 태도에서도 나온다. 토론이나 논설에서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그 대상이 지닌 한계를 뚜렷이 밝혀 드러내면 된다. 이것을 비난과 혼동하면 안 된다. 학술서나 논문은 대개 비판서다. 그래서 같은 주제에 관해 앞서 연구한 저작물을 쭉 검토하며 시작한다. 칸트는 인간의 앎이 지닌 능력 한계와 가능성을 규정하려고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을 지었다. 여기에 나온 비판이라는 말은 한계란 말과 뜻이 비슷하다. 『순수이성 비판』은 인간이 보고 들으며 아는 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설명한 책이다. 『실천이성 비판』은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려는 앎의 가능성과 한계를 규정한 책이다.

..아는 만큼 자기 이야기를 반듯하게 펼쳐 놓으면 공동체라는 더 넓은 맥락 안에서 조화로운 연관이 드러날 것이다. 특수 없는 보편은 없고 보편 없는 특수도 드물기 때문이다. 나를 우리라고 확장하는 일은 늦출수록 좋다. 허먼 멜빌은 이슈메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포경선이 내 예일이며 하버드다." 단테는 『신곡』에 ‘인생을 반 정도 살면 누구나 암울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고 적지 않고 이렇게 적었다. "인생의 반고비에서 나는 어두운 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1인칭은 힘이 세다. 직접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문장을 온전히 책임지는 일이 독자에 대한 봉사다. 감당할 수 있는 1인칭 관점에서 시작하여 점차 외연을 확대하는 태도가 좋다....

.."훌륭함의 종류는 한 가지이나 나쁨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라고 말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행복한 가정은 모두 같은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적은 작가 톨스토이는 다른 조건에서 출발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플라톤의 책 해설에 톨스토이를 언급해도 되고, 톨스토이의 책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도 괜찮을것 같다. 훌륭한 대본은 서로 돕는다.

..플라톤의 『국가』 10권에 이런 내용이 있다. ‘훌륭함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 훌륭함을 귀하게 여기는 이는 훌륭함을 많이 갖고 천하게 여기는 이는 적게 갖는다.‘ 이 훌륭함을 많이 갖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는 번역자로서 소명을 다해야 한다. 귀찮고 번거로우며 들어가기 힘든 그 좁은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노라면, 당신은 어느덧 전혀 만날 수 없을줄만 알았던 두 맥락을 잘 연결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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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주인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문장 안에 깃들여 사는 주어와 술어다. 주어와 술어가 원할 때가 아니라면 괜한 낱말을 덧붙이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내가 말했다‘와 ‘나는 말했다‘는 다른 뜻을 갖는 문장인 셈이다. ‘내가 말했다‘에서 ‘나‘가 ‘말했다‘ 라는 서술어의 주인이라면, ‘나는 말했다‘의 ‘나‘는 화제의 중심이다. ‘내가 말했다‘는 그나 그녀, 그들이 아닌 바로 ‘내가‘ 말했다는 뜻이라면, ‘나는 말했다‘는 다른 사람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말했다는 뜻이랄까.
..물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나 ‘지구는 둥글다‘처럼 바뀔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을 말할 때 쓰는 ‘은, 는‘도 보조사다. 하지만 내‘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지구를 본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지구‘가‘ 둥글어, 내‘가‘ 지금 보고 있다니까!"

..오해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만듭니다. 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풍경을 만들고 시선을 만들죠. 이해한 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시선과 결코 볼 수 없는 풍경. 그것이 설사 왜곡된 시선이고 왜곡된 풍경일지라도 말입니다.
..이해한 자는 풍경을 갖지 않습니다. 아니, 풍경을 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해한 자는 자신과 이해된 것 사이에 거리를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이해한 것인데 굳이 거리를 두는 건 바보 같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해한 자가 갖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장면이죠. 이해한 자신과 이해된 대상이 함께하는 장면. 하지만 오해하고 오해된 자들은 거리를 갖고 풍경을 갖습니다. 어떻게 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어떻게 해도 내게로 와서 장면이 될 수 없는 풍경을 말이죠.

.."내겐 나 자신이 문젯거리였다"고 고백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겐 분열된 자신을 드러낼 형식이 필요했을 겁니다. 단순한 고백체 문장으로는 자신의 고백처럼 "시간속에서 산산이 분열된" 자신을 담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문장 안에 다양한 거리와 시선을 담을 수 있어야 했겠죠. 말하자면 문장 자체가 풍경이 되어야 했을 겁니다.
..나는 여기 있고 내가 가야 할 곳이 저기 빤히 보이는데 나는 왜 저곳에 가지 못하는가. 내가 갈 수 없다는 걸 나는 아는가? 아니면 모르는가? 안다고 하면 내 의지는 위선이 되고 모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 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죠. 마음으로는 이미 수도 없이 건너가 버린 그 거리를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만 있는 겁니다. 누군가에겐 그 모습이 내가 속한 풍경이기도 하고 내 모습 자체가 풍경이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내겐 결코 풍경이 될 수 없죠. 왜냐하면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풍경을 만드는 거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문장의 시선은 결국 거리를 좁히려는 나의 의지와 당겨지지 않으려는 풍경 사이의 긴장감이 만드는 것 아닐까요.

..이를테면 도시의 날씨가 그렇습니다. 도시에서 날씨가 매혹적인 이유는 농촌에서와 달리 날씨가 별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말하자면 들여다보고 해석해야 할 심연을 갖지 않아 오히려 매혹적인 셈이죠. 이야기처럼 도시의 날씨도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맥락이 있는 건 아니어서 ‘엉터리 이야기‘라는 말은 가능해도 ‘엉터리 날씨‘라고는 말할 수 없기에 더 매혹적이랄 수 있습니다. 요컨대 예측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모든 행위를 무색하게 만드는 거대한 표면이라는 점이 제가 도시의 날씨에 매혹되는 이유입니다.

..김훈은 좀처럼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세상의 삿된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삿된 세상에 대해 말하려고 애쓴달까. 삿된 세상은 삿된 말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게다가 삿된 말들은 삿된 방식으로 이리저리 뒤틀리고 접붙여지기 일쑤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로 기워진 말들의 허접함이, 말하는 자 혹은 말해야 하는 자를 비참하게 만들 때 세상은 삿되다. 그 삿된 세상에서 주체는 오로지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는 주격으로만 존재한다. ‘이, 가‘가 지시하는 바로 그 대상. 서술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거나 책임지지 못하는 주어로서만 ‘기능‘하는 주체들. ‘나는 누구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말해 준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정의하기보다 성질과 취향이 대신 말해 주기를 바라는 주어들. 삿된 세상은 그런 주어들로 가득하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장의 주인이 문장을 쓰는 내가 아니라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는 사실이다. 문장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면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넘어가게 되거나(왜냐하면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문장의 기준점을 문장 안에 두지 않고 내가 위치한 지점에 두게 되어 자연스러운 문장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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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씨는 숟가락을 접시에 팽개치듯 거칠게 놓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일의 가치랑 보수는 딱히 일치하지 않으니까, 신경 안 쓰는 게 나아."
.."그런가요?"
.."잘 버는 놈들일수록 제대로 된 일 안 해. 거만한 자세로 컴퓨터 앞에 앉아 뽁뽁거리며 버튼이나 누르고 사람을 아랫사람 부리듯이 부려먹고, 그보다는 짐 나르고 물건 만드는 사람들이 훨씬 훌륭한데 말이지."

..어머니가 불쑥 "아까 오카다 씨가 한 말, 좋았어" 하고 한마디 했다.
.."무슨 말?"
.."기어를 드라이브에 넣으면 제멋대로 앞으로 간다는 말."
..나는 어머니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왠지 마음이 편해지지 않아? 기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앞으로는 가게 되는 거야."
..과연 그럴까, 하고 대답하면서도 나는 내 몸에 달려 있을, 보이지 않는 기어를 드라이브에 넣어본다.

..문제아란 대체 어떤 의미인지, 사실 나는 잘 모른다.
..‘문제‘아가 있으면 ‘대답‘아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닐까, 오카다 군이 문제를 내면 다른 누군가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발상이나 떠오른 정도다.

..소중한 사람들이 잇달아 떠나간다는 공포심이 있었다.
..교정을 바라보면 신체의 소중한 부위가 바람에 날려 사라져갈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아버지도 사라지고, 오카다 군도 사라지고, 유미코 선생님도 사라졌다.
.."다 그런 거야." 어머니는 말했지만 그 ‘다 그런 거‘가 나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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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없어도 별로 아무런 문제도 없고, 필사적으로 끼지 않으면 내쳐질 것 같은 긴장감에 적당히 지쳤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밤을 보내면 마음의 평안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1990년대와 가치관이 전혀 다르다. 그 시절, 학급의 짱은 화려하고 교만하고 학교 바깥에 많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 어른스러운 여자아이들이었다. 지금은 10대까지 보수적이 되었다. 회사며 미팅이, 아니, 나라 전체가 시시해진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지인 중에서 여고생과 연대가 가장 가까운 미카의 태도를 떠올렸다. 그녀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 일도, 인간관계도 실수없이 누구하고나 원만하게 지내려는 자세가 보인다. 젊음에 대한 질투를 제외하고라도 답답해 보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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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p.
...햇빛과 구름의 모습은 언제나 앞으로 다가올 날씨를 암시하지만, 강훈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현상을 보며 미래를 예견하지 않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강훈은 점퍼를 여미고 걸었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중이었지만 저녁만큼은 뒤처진 채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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