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주인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문장 안에 깃들여 사는 주어와 술어다. 주어와 술어가 원할 때가 아니라면 괜한 낱말을 덧붙이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서 ‘내가 말했다‘와 ‘나는 말했다‘는 다른 뜻을 갖는 문장인 셈이다. ‘내가 말했다‘에서 ‘나‘가 ‘말했다‘ 라는 서술어의 주인이라면, ‘나는 말했다‘의 ‘나‘는 화제의 중심이다. ‘내가 말했다‘는 그나 그녀, 그들이 아닌 바로 ‘내가‘ 말했다는 뜻이라면, ‘나는 말했다‘는 다른 사람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말했다는 뜻이랄까.
..물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나 ‘지구는 둥글다‘처럼 바뀔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을 말할 때 쓰는 ‘은, 는‘도 보조사다. 하지만 내‘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지구를 본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지구‘가‘ 둥글어, 내‘가‘ 지금 보고 있다니까!"

..오해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만듭니다. 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풍경을 만들고 시선을 만들죠. 이해한 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시선과 결코 볼 수 없는 풍경. 그것이 설사 왜곡된 시선이고 왜곡된 풍경일지라도 말입니다.
..이해한 자는 풍경을 갖지 않습니다. 아니, 풍경을 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해한 자는 자신과 이해된 것 사이에 거리를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이해한 것인데 굳이 거리를 두는 건 바보 같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해한 자가 갖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장면이죠. 이해한 자신과 이해된 대상이 함께하는 장면. 하지만 오해하고 오해된 자들은 거리를 갖고 풍경을 갖습니다. 어떻게 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어떻게 해도 내게로 와서 장면이 될 수 없는 풍경을 말이죠.

.."내겐 나 자신이 문젯거리였다"고 고백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겐 분열된 자신을 드러낼 형식이 필요했을 겁니다. 단순한 고백체 문장으로는 자신의 고백처럼 "시간속에서 산산이 분열된" 자신을 담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문장 안에 다양한 거리와 시선을 담을 수 있어야 했겠죠. 말하자면 문장 자체가 풍경이 되어야 했을 겁니다.
..나는 여기 있고 내가 가야 할 곳이 저기 빤히 보이는데 나는 왜 저곳에 가지 못하는가. 내가 갈 수 없다는 걸 나는 아는가? 아니면 모르는가? 안다고 하면 내 의지는 위선이 되고 모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 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죠. 마음으로는 이미 수도 없이 건너가 버린 그 거리를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만 있는 겁니다. 누군가에겐 그 모습이 내가 속한 풍경이기도 하고 내 모습 자체가 풍경이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내겐 결코 풍경이 될 수 없죠. 왜냐하면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풍경을 만드는 거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문장의 시선은 결국 거리를 좁히려는 나의 의지와 당겨지지 않으려는 풍경 사이의 긴장감이 만드는 것 아닐까요.

..이를테면 도시의 날씨가 그렇습니다. 도시에서 날씨가 매혹적인 이유는 농촌에서와 달리 날씨가 별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말하자면 들여다보고 해석해야 할 심연을 갖지 않아 오히려 매혹적인 셈이죠. 이야기처럼 도시의 날씨도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맥락이 있는 건 아니어서 ‘엉터리 이야기‘라는 말은 가능해도 ‘엉터리 날씨‘라고는 말할 수 없기에 더 매혹적이랄 수 있습니다. 요컨대 예측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모든 행위를 무색하게 만드는 거대한 표면이라는 점이 제가 도시의 날씨에 매혹되는 이유입니다.

..김훈은 좀처럼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세상의 삿된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삿된 세상에 대해 말하려고 애쓴달까. 삿된 세상은 삿된 말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게다가 삿된 말들은 삿된 방식으로 이리저리 뒤틀리고 접붙여지기 일쑤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로 기워진 말들의 허접함이, 말하는 자 혹은 말해야 하는 자를 비참하게 만들 때 세상은 삿되다. 그 삿된 세상에서 주체는 오로지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는 주격으로만 존재한다. ‘이, 가‘가 지시하는 바로 그 대상. 서술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거나 책임지지 못하는 주어로서만 ‘기능‘하는 주체들. ‘나는 누구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말해 준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정의하기보다 성질과 취향이 대신 말해 주기를 바라는 주어들. 삿된 세상은 그런 주어들로 가득하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장의 주인이 문장을 쓰는 내가 아니라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는 사실이다. 문장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면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넘어가게 되거나(왜냐하면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문장의 기준점을 문장 안에 두지 않고 내가 위치한 지점에 두게 되어 자연스러운 문장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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