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p. ..기쁨이나 즐거움은 슬픔이나 고통처럼 깊이 뿌리내리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면이 있어요. 빛처럼 말이에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강렬한 빛이 쨍하고 빛나던 순간이 많았던 건 분명해요. 그런데 그게 별거 아니었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29p. ..천천히 붕괴되던 가정을 힘겹게 꾸려 나가면서 나는 한 권의 그림책을 냈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한 마리의 암고양이와 우연히 만나 새끼고양이를 낳고 이내 죽는다는,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였다. 『100만 번 산 고양이』라는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가 내 그림책 중에는 드물게 잘 팔린 그림책인 것을 보면, 인간은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를 소박하게 바라는구나 싶다. 무엇보다 내가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들켜 버린 기분이 들었다.
46p. ..처음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나는 소꿉장난에 겐짱을 끌어들였던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사실 결혼 따위 바라지 않는 게 아닐까, 흙투성이가 되어 전쟁놀이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 결혼식을 올리는 동안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결혼식이 과장된 놀이며 결혼식에 모인 남자들은 나뭇잎 위에 올린 진흙 만두를 "쩝쩝" 하고 먹는 친구를 놀리러 온 것 같았다.
72p. ..나는 무언가에 말을 걸고 싶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이슬람교 신자도 아니었지만 신을 불렀다. 그러자 아무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신이 샌들을 신고 하늘에서 춤을 추듯이 내려왔다. 더는 누구여도 상관없고 누구도 아닌 신은 본 적도 없는 중년 남자의 모습으로 나를 한없이 관대하게 받아 주었고 그제야 나는 잠이 들었다.
76p. ..만일 내 독일어가 능숙했다면 그들은 나를 이야기 상대로 멀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본의 노파들이 증오할 만한 며느리가 있다는 불행을, 혹은 감사해야 할 가족이 있다는 현실을, 작은 단지 안에서 혈연과 얼굴을 맞대는 현상을, 일본의 빈곤과 뒤처진 사회복지를, 일본을 대표해 부끄러워했지만 복지의 발전이 마냥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증오해야 할 상대가 아무도 없는 고독과 증오해야 할 대상이 있는 불행을 과연 같은 저울에 달 수 있을까?
78p. ..겨우 넉 달간 하숙인에 불과했던 나와 헤어질 때, 하숙집 노파는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사람은 내가 멀리서 온 동양인이어서 저도 모르게 울었던 것이다. 독일 여자가 하숙했더라면 공통적이고 암묵적인 인간의 모습 때문에 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00p. ..세상 참 재미없다, 친구가 말했다. 인간 무엇이 재미가 없고 약 오르나 하면 차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눈의 크기나 코의 높이, 머리의 좋고 나쁨이나 유머 감각의 미묘한 차이, 그 남자는 좋은 남자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도 남과의 차이를 따지는 것이다. 돈이 있고 없음이나 재능의 스케일 등 무엇 하나 차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어딜 가나 비슷한 가정과 생활 수준. 일본 전체가 중류 가정이다. 그래서 ‘노노미야‘ 이야기는 이내 단순한 농담이 되어 "너 오늘 노노미야 할래? 뭐하면 내가 해도 되고" 하고 자동차 운전을 시키거나 한다.
107p. ..내가 산 찻주전자는 내가 살 수 있는 정도라서 수준이 빤하다. 분명 지금도 예술과 실용이 양립하는 훌륭한 찻주전자와 밥그릇, 몇십 년이나 되는 긴 수명을 다할 ‘명주‘, ‘염색 직물‘이 일부 존재하는 것도 알고는 있으나 우리 대중과는 관계가 없는 곳에서 일부 부자와 시시덕거리는 것일 테다.
141~142p. ..서베를린에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서베를린이 동독 안에 존재하는 것을 알고 당황한 나는 하숙집에서 지도를 보았다. 유럽 지도 안에서 베를린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베를린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하면서 창문으로 바다에서 돌출된 육지가 보였다. 그것은 한 치도 틀림없는 지도 모양 그대로였다. 그제야 나는 지도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달로 날아갔던 우주비행사는 지구가 지구본이랑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백지도白地圖는 바흐와 닮았다고 친구가 말했다.
184p. ..나를 구원한 것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고 하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189p. ..같은 행위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가볍게 흘려보내는 사람도 있다.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평생 잊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쇄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흘려보냄으로써 살아남는 사람도 있다. 교사가 우리를 키운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살아온 것이다. 저마다의 힘으로 저마다의 혼을 담아.
195p. ..아직 지면을 다 덮지 않은 눈을 보면서, 어서 지면이 새하얗게 덮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당에 나갔다. 그 당시 나는 눈 속에 있는 소녀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것이므로, 누군가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인 네모진 마당을 보는 이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붉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앞치마에 눈을 받으려고 했다. ..앞치마로 눈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앞치마를 앞으로 펼쳐서 눈을 받는 소녀를 연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눈과 함께 내려온 것일까?
224p. ...처음으로 젖을 물렸다. 갓난아기는 거대한 내 젖가슴에 필사적으로 작은 입을 대고 빨아들였다. 기특하고 측은하고 사랑스러웠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조그만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 아이가 팔십이 되었을 때, 그 고독을 누가 위로해 줄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주면서 이 아이가 팔십이 되었을 때의 고독이 걱정되어 울었다.
232p. ..사랑은 가까이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그것은 실로 불공평한 편애로, 미의식조차 바꾸는 것이다.
281p. ..병원에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은 말을 하는 인간보다 고양이에게 그 고독한 영혼을 쏟아붓는 것일까? 나는 고양이가 마치 인간처럼 되었다기보다 인간이 그 병원에 데리고 온 고양이처럼 되었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제 맥없이 죽지 않는다....
301p. ..우리는 "앗, 알았다" 하고 기쁜 표정을 짓는다. "앗, 알았다"라고 신나서 외치는 이유는 온통 모르는 것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알게 된 것이 ‘사건‘ 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알았다‘ 한 것도 머지않아 모르는 것 안에 섞이고 모르는 것이 내려서 쌓여 간다.
335p. ..또 하나는 그림책 『할머니』. ..이미 인간을 넘어서서 우주인이 된 ‘할머니‘, 옛날 그림책에 나오는 모모타로나 혀가 잘린 참새에 나오는 할머니가 아니다. ..어린 시절 세계의 전부이며 아이를 보호해 주던 다정한 엄마가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닌 우주인이 되었다. 그 슬픔과 비탄이 이 그림책에서 전해져 온다. "나도 언젠가 우주인이 될 거야." 마지막 페이지의 문구는 여전히 인간에 머물고 있는 우리를 뒤흔든다. 만화도 그림책도 색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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