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p.
..아버지는 다다미방으로 가서 종이 봉지를 가져왔다. 종이 봉지를 뒤집자 녹색, 황색의 수영모자, 빨간색과 스카이 블루의 수영복, 감색 경기용 수영복, 짙은 감색의 남자 반바지가 바닥에 널려졌다. 수영복이 저 혼자 수영하는 걸 기다리기라도 하듯 아버지와 나는 한동안 마루 바닥을 내려다봤다....

128~129p.
..이 사내를 만나고부터 나는 마치 내가 모래밭에서 모래를 파는 어린아이와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린아이는 삽으로 구덩이를 판다. 엄마가 시켜서든 자기의지로 그러는 것이든 혹은 다른 어린애들을 따라 하는 것이든 그런 것은 이미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린아이는 그저 구덩이를 판다. 모래를 삽으로 떠서는 버린다. 그 단조로운 작업을 계속하면 이윽고 구덩이가 생긴다. 모래를 더 퍼내면 뻐끔히 구멍이 생기고 어린아이가 들여다봐도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는 엄마에게 안겨 모래밭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어린아이의 의식에서도 구덩이는 사라진다. 그러나 내일이 밝으면 어린아이는 다시 구덩이를 판다.

130p.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의욕적으로 발표한 일을 취소당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맛봤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과 거절하는 것은 어디가 다른가.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160p.
...유키토와 나는 흠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정이나 애정 같은 뭔가를 보태려 하지는 않는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상대의 흠에 집착하고 싶다. 흠을 찾으려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흠이 나를 발견해 소리내 말을 걸어 온다. 그 소리는 보통 가늘고 희미한 것이지만 유키토의 소리는 분명히 판별할 수 있었다.

183p.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되어 온 것처럼 생각되는 두 사람의 인생이 메아리쳤다. 내가 평생 맛본 적 없는 관계로부터 울려나오는 그 메아리에, 부끄러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감상이 곁을 걷는 부부를 향한 것인지 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송충이나 개미, 산 것을 밟아 으깨고 싶다고 생각하며 도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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