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바로 대상행동이라는 거다. 나는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대상행동이란 한 목표가 어떤 장애로 저지되어 그 목표 달성이 안 되었을 때 이에 대신하는 다른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처음에 가졌던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동으로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본래 추구하던 행위 뒤에 감춰진 충동이나 욕구는 다른 행위로 나타나고, 본래의 목표는 다른 행위를 하고자 하는 목표로 바뀐다. 이를 대상행동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이 위키피디아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면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내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전쟁, 사망, 질병, 침략, 재앙, 범죄가 끊이질 않는다. 인도에서 물대신 살충제를 먹고 자살한 다섯 명의 농부들도 결국은 한 개인이었다. 꿈을 가진, 계획을 가진 그리고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개인. 신문에서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떨쳐버리려고 한다.

.."쇼핑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 최근에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요즘은 기대라는 게 없는 시대구나....... 바라는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지는 시대잖아. 소원이 이루어질 날을 기대하면서 꿈꿀 시간조차 없다니깐. 정말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활 그 자체를 즐기자.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말고 살자.
..눈을 감고 상상했다.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태양빛, 청결한 마룻바닥, 고급 소파와 단정한 커피 테이블, 그리고 창가에 장식한 꽃.
..빨간 베네치아 글라스 꽃병은 앞으로도 소중히 사용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리려고 했다. 볼때마다 사토시가 떠올라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렇게 멀지 않은 어느 날, 사토시를 떠올리지 않고 또 다른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깨끗한 거실에서 정성껏 우린 홍차를 마시자.
..혼자서 느긋하게 살아가는 성인 여자가 되자.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결심하고 눈을 반짝 떴을 때, 열어둔 창으로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진짜지. 너는 분명히 뭔가 이루어 낼 인간이야. 이 할아비는 안다."
..비장의 무기인 이 마법의 말은 사실 근거라곤 없지만, 사람의 미래는 모르니까 꼭 거짓말이라곤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말이 평생 마음을 지켜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생각이 비뚤어져서 시간을 낭비하던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말씀해주셨다.
.."너는 특별한 사람이야.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애들과는 달라. 뭔가 네 손에 꼭 움켜쥘 날이 올 거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어머니에게 화를 냈지만, 내심 기뻤다. 단순하다면 단순하지만, 인생에 희망을 본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그 말씀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뱃속이 따뜻해진다.
..힐끔 보니 하루토의 뺨도 살짝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루토의 몸을 칭칭 동여맨 ‘어차피 나 같은 것‘이라는 실이 아주 조금이라도 풀렸다면 좋으련만.......

.."이해해요. 전쟁 전에 태어나신 분들은 대부분 그러시거든요.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정리를 지도하면 정말 힘들어요. 필요 없는 줄 알면서도 버리기 싫다는 생각이 강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사람에게 줘서 정리한다는 생각 말고는 하지 못하세요. 나한테 필요 없는 물건은 대체로 다른 사람 역시 필요 없다는 것까지는 잘 모르시죠. 어르신, 제가 도와드릴게요. 전화번호부를 빌려주실래요?"

..옛날 사람은 어땠을까? 도마리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는 영양 상태도 위생 상태도 좋지 않고 약도 없어서 아이가 많이 죽는 시대였다. 그렇게 예전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 슬픔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지금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장수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의학도 발달해서 병도 치료할 수 있다. 그런 현대에 사는 우리는 예전보다 상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아닐까.
..선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나, 한편으로 시대 불문하고 아이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예전에는 아이가 많이 죽었으니까 여러 사람이 상실감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다들 괴롭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p.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만족감이 높은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정서와 판단이 문제와 실패로 쉽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상의 기쁨에 감사하고, 과거의 슬픔에 빠져드는 대신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으로 부정성의 힘에 대항한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들의 삶이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특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은 젊은이들보다 기분이 더 좋고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배움의 기회는 무시하고 행복을 주는 것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14p.
...혐오와 오염에 대한 로진의 실험은 러시아 속담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타르(tar) 한 숟가락은 꿀 한 통을 망칠 수 있지만, 타르 한 통에 들어간 꿀 한 숟가락은 아무것도 아니다."

80p.
...이 실험 결과를 보고 영감을 얻은 시카고의 심리학자들은 새로운 상호성 법칙을 제안했다. ‘당신이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당신의 등을 긁어주겠지만, 당신이 내 한쪽 눈을 가져간다면 나는 당신의 양쪽 눈을 다 가져가겠다.‘

156p.
..이것이 처벌의 이점 중 하나다. 처벌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실제 사용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다. 보상은 계속해서 주어야 하지만, 처벌은 단지 위협만으로도 그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다....

161p.
..심리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죄책감을 수치심과 구분하는데, 둘의 사회적 이득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나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자신의 핵심 자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분노하면서 철수하거나, 숨거나,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대조적으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나쁜 행동을 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것은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죄책감은 사람들이 고백 · 사과 · 노력 · 헌신에 대한 재확인을 통해 파트너나 친구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180p.
..또 하나의 흔한 반응은 투쟁, 즉 화를 내고 똑같이 갚아주려는 것이다. 분노와 공격성이 친구를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슬픔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기분에는 도움이 된다. 드월이 실험 결과를 요약한 것처럼, 외톨이들은 세상을 ‘핏빛 안경‘을 통해 보기 시작한다. 일단 사람들은 실험실에서 거부를 경험하면, 최악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호하거나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말이나 행동에서 적대감과 공격성을 읽어냈다. 그들은 자신이 이전에 당한 거부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포함해 타인을 처벌할 기회가 있을 때 더 공격적이었다.

240p.
...세디키디스는 솔 벨로(Saul Bellow)의 소설 《자믈러 씨의 행성(Mr. Sammler‘s Planet)》에 나오는, 과거를 돌아보기 좋아하는 등장인물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기억이 필요합니다. 기억은 무의미함을 피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253p.
..유럽 대중의 생활수준은 혁명적인 사상과 제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이 몰락하자 학자, 발명가 그리고 상인들은 제국의 간섭 없이 지식을 공유하고 혁신할 수 있는 독립적인 봉토로 분권화했다. 중세는 이전에는 로마 유한계급의 영화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 때문에 ‘암흑시대‘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학자인 장 짐멜(Jean Gimpel)의 말에 따르면, 중세는 사실 ‘인류의 위대한 혁신시대 중 하나‘였다. 그는 중세를 최초의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로마 경제의 동력이 노예 노동력이었던 데 비해, 중세 공학자들은 유럽 전역에 댐과 효과적인 새 물레방아를 만들어 자연의 힘을 활용했다. 풍차가 흥행하였으며 해안 저지대에 자리한 여러 국가에서는 그것을 배수에 활용했다. 독일의 ‘야만인들‘은 훨씬 개량된 형태의 철을 개발했다. 바이킹들은 조선과 항해술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 기계식 시계와 안경이 발명되었다. 윤작의 발달과 써레 및 무거운 새 쟁기의 발달로 농업 생산성은 급격히 향상되었고, 로마 시대에 비해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영양 섭취가 나아지고 건강해졌다.

257p.
...우리는 자신의 장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테러리즘이나 핵무기, 혹은 기후 변화가 지구상의 문명이나 삶에 ‘실존적 위협‘을 가한다고 상상한다. 위험이 멀리 있을수록 경고는 종말론적으로 되는 이러한 상황은 마치 두려움의 반비례 법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누리는 안전과 번영은 우리에게 더 많이 걱정할 시간과 더 많은 걱정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이용하는 공포 장사꾼들은 더 늘어나고 있다.

275~276p.
..반흡연 집단이 이러한 발전을 반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일부는 그랬다) 그들 중 대부분은 마치 오브 다임스 증후군(March of Dimes Syndrome)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악성 사례를 발달시켰다. 이것은 훨씬 가치 있는 단체에서 그 이름을 따오기는 했지만, 위기 장사꾼 집단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마치 오브 다임스는 소아마비와 싸우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지만, 소아마비 백신이 개발돼 이 질병의 위협을 종식시키자, 이 기관은 승리를 선언하고 해산하는 대신 싸워야 할 새로운 질병을 찾아냈다....

292p.
..이제 똑같은 종류의 진화가 소셜 미디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낡은 대중매체 뉴스의 독과점에서 벗어나 스스로 뉴스 매체를 찾고 있으며, 또다시 재난의 예언이 나타났다. 권위자와 전문가가 선거를 뒤흔들 ‘가짜 뉴스‘의 출현과 대중을 양극화시킬 ‘이념 피난처(ideological silos: 미국 대중이 자신과 이념이 같은 사람들과만 고립되어 소통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옮긴이)‘와 ‘반향실(echo chamber: 벽을 특수 재료로 만들어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메아리치는 방을 가리키는 말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며 의견이 증폭 및 강화되는 현상을 뜻하는 말—옮긴이)‘을 비판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구글·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를 비롯한 다른 소셜 미디어 회사도 공공기업처럼 규제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비관주의자들이 또다시 문제를 과장하며 잘못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296p.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집단 안에 있을 때는 정신이 이상해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오직 천천히, 그리고 한 명씩 한 명씩 이성을 되찾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p.
..기쁨이나 즐거움은 슬픔이나 고통처럼 깊이 뿌리내리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면이 있어요. 빛처럼 말이에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강렬한 빛이 쨍하고 빛나던 순간이 많았던 건 분명해요. 그런데 그게 별거 아니었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29p.
..천천히 붕괴되던 가정을 힘겹게 꾸려 나가면서 나는 한 권의 그림책을 냈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한 마리의 암고양이와 우연히 만나 새끼고양이를 낳고 이내 죽는다는,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였다. 『100만 번 산 고양이』라는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가 내 그림책 중에는 드물게 잘 팔린 그림책인 것을 보면, 인간은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를 소박하게 바라는구나 싶다. 무엇보다 내가 단지 그것뿐인 이야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들켜 버린 기분이 들었다.

46p.
..처음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나는 소꿉장난에 겐짱을 끌어들였던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사실 결혼 따위 바라지 않는 게 아닐까, 흙투성이가 되어 전쟁놀이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 결혼식을 올리는 동안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결혼식이 과장된 놀이며 결혼식에 모인 남자들은 나뭇잎 위에 올린 진흙 만두를 "쩝쩝" 하고 먹는 친구를 놀리러 온 것 같았다.

72p.
..나는 무언가에 말을 걸고 싶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이슬람교 신자도 아니었지만 신을 불렀다. 그러자 아무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신이 샌들을 신고 하늘에서 춤을 추듯이 내려왔다. 더는 누구여도 상관없고 누구도 아닌 신은 본 적도 없는 중년 남자의 모습으로 나를 한없이 관대하게 받아 주었고 그제야 나는 잠이 들었다.

76p.
..만일 내 독일어가 능숙했다면 그들은 나를 이야기 상대로 멀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본의 노파들이 증오할 만한 며느리가 있다는 불행을, 혹은 감사해야 할 가족이 있다는 현실을, 작은 단지 안에서 혈연과 얼굴을 맞대는 현상을, 일본의 빈곤과 뒤처진 사회복지를, 일본을 대표해 부끄러워했지만 복지의 발전이 마냥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증오해야 할 상대가 아무도 없는 고독과 증오해야 할 대상이 있는 불행을 과연 같은 저울에 달 수 있을까?

78p.
..겨우 넉 달간 하숙인에 불과했던 나와 헤어질 때, 하숙집 노파는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사람은 내가 멀리서 온 동양인이어서 저도 모르게 울었던 것이다. 독일 여자가 하숙했더라면 공통적이고 암묵적인 인간의 모습 때문에 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00p.
..세상 참 재미없다, 친구가 말했다. 인간 무엇이 재미가 없고 약 오르나 하면 차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눈의 크기나 코의 높이, 머리의 좋고 나쁨이나 유머 감각의 미묘한 차이, 그 남자는 좋은 남자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도 남과의 차이를 따지는 것이다. 돈이 있고 없음이나 재능의 스케일 등 무엇 하나 차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어딜 가나 비슷한 가정과 생활 수준. 일본 전체가 중류 가정이다. 그래서 ‘노노미야‘ 이야기는 이내 단순한 농담이 되어 "너 오늘 노노미야 할래? 뭐하면 내가 해도 되고" 하고 자동차 운전을 시키거나 한다.

107p.
..내가 산 찻주전자는 내가 살 수 있는 정도라서 수준이 빤하다. 분명 지금도 예술과 실용이 양립하는 훌륭한 찻주전자와 밥그릇, 몇십 년이나 되는 긴 수명을 다할 ‘명주‘, ‘염색 직물‘이 일부 존재하는 것도 알고는 있으나 우리 대중과는 관계가 없는 곳에서 일부 부자와 시시덕거리는 것일 테다.

141~142p.
..서베를린에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서베를린이 동독 안에 존재하는 것을 알고 당황한 나는 하숙집에서 지도를 보았다. 유럽 지도 안에서 베를린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베를린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하면서 창문으로 바다에서 돌출된 육지가 보였다. 그것은 한 치도 틀림없는 지도 모양 그대로였다. 그제야 나는 지도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달로 날아갔던 우주비행사는 지구가 지구본이랑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백지도白地圖는 바흐와 닮았다고 친구가 말했다.

184p.
..나를 구원한 것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고 하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189p.
..같은 행위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가볍게 흘려보내는 사람도 있다.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평생 잊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쇄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흘려보냄으로써 살아남는 사람도 있다. 교사가 우리를 키운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살아온 것이다. 저마다의 힘으로 저마다의 혼을 담아.

195p.
..아직 지면을 다 덮지 않은 눈을 보면서, 어서 지면이 새하얗게 덮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당에 나갔다. 그 당시 나는 눈 속에 있는 소녀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것이므로, 누군가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인 네모진 마당을 보는 이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붉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앞치마에 눈을 받으려고 했다.
..앞치마로 눈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앞치마를 앞으로 펼쳐서 눈을 받는 소녀를 연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눈과 함께 내려온 것일까?

224p.
...처음으로 젖을 물렸다. 갓난아기는 거대한 내 젖가슴에 필사적으로 작은 입을 대고 빨아들였다. 기특하고 측은하고 사랑스러웠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조그만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 아이가 팔십이 되었을 때, 그 고독을 누가 위로해 줄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주면서 이 아이가 팔십이 되었을 때의 고독이 걱정되어 울었다.

232p.
..사랑은 가까이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그것은 실로 불공평한 편애로, 미의식조차 바꾸는 것이다.

281p.
..병원에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은 말을 하는 인간보다 고양이에게 그 고독한 영혼을 쏟아붓는 것일까? 나는 고양이가 마치 인간처럼 되었다기보다 인간이 그 병원에 데리고 온 고양이처럼 되었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제 맥없이 죽지 않는다....

301p.
..우리는 "앗, 알았다" 하고 기쁜 표정을 짓는다. "앗, 알았다"라고 신나서 외치는 이유는 온통 모르는 것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알게 된 것이 ‘사건‘ 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알았다‘ 한 것도 머지않아 모르는 것 안에 섞이고 모르는 것이 내려서 쌓여 간다.

335p.
..또 하나는 그림책 『할머니』.
..이미 인간을 넘어서서 우주인이 된 ‘할머니‘, 옛날 그림책에 나오는 모모타로나 혀가 잘린 참새에 나오는 할머니가 아니다.
..어린 시절 세계의 전부이며 아이를 보호해 주던 다정한 엄마가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닌 우주인이 되었다. 그 슬픔과 비탄이 이 그림책에서 전해져 온다. "나도 언젠가 우주인이 될 거야." 마지막 페이지의 문구는 여전히 인간에 머물고 있는 우리를 뒤흔든다. 만화도 그림책도 색달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0p.
..아버지는 다다미방으로 가서 종이 봉지를 가져왔다. 종이 봉지를 뒤집자 녹색, 황색의 수영모자, 빨간색과 스카이 블루의 수영복, 감색 경기용 수영복, 짙은 감색의 남자 반바지가 바닥에 널려졌다. 수영복이 저 혼자 수영하는 걸 기다리기라도 하듯 아버지와 나는 한동안 마루 바닥을 내려다봤다....

128~129p.
..이 사내를 만나고부터 나는 마치 내가 모래밭에서 모래를 파는 어린아이와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린아이는 삽으로 구덩이를 판다. 엄마가 시켜서든 자기의지로 그러는 것이든 혹은 다른 어린애들을 따라 하는 것이든 그런 것은 이미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린아이는 그저 구덩이를 판다. 모래를 삽으로 떠서는 버린다. 그 단조로운 작업을 계속하면 이윽고 구덩이가 생긴다. 모래를 더 퍼내면 뻐끔히 구멍이 생기고 어린아이가 들여다봐도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는 엄마에게 안겨 모래밭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어린아이의 의식에서도 구덩이는 사라진다. 그러나 내일이 밝으면 어린아이는 다시 구덩이를 판다.

130p.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의욕적으로 발표한 일을 취소당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맛봤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과 거절하는 것은 어디가 다른가.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160p.
...유키토와 나는 흠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정이나 애정 같은 뭔가를 보태려 하지는 않는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상대의 흠에 집착하고 싶다. 흠을 찾으려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흠이 나를 발견해 소리내 말을 걸어 온다. 그 소리는 보통 가늘고 희미한 것이지만 유키토의 소리는 분명히 판별할 수 있었다.

183p.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되어 온 것처럼 생각되는 두 사람의 인생이 메아리쳤다. 내가 평생 맛본 적 없는 관계로부터 울려나오는 그 메아리에, 부끄러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감상이 곁을 걷는 부부를 향한 것인지 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송충이나 개미, 산 것을 밟아 으깨고 싶다고 생각하며 도로를 바라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