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p.
...또 이런 일도 있다. 어느 날 목욕을 하다 문득 손을 봤다. 그랬더니 앞으로도 몇 년 지나 목욕하면서 지금 우연히 손을 본 것을, 그리고 손을 보면서 문득 느꼈던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왠지 모르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또 어느 날 저녁 밥을 밥솥에 옮길 때, 영감이라면 지나친 과장일지 모르지만, 뭔가 몸속을 휘익 하고 스치는 것을 느꼈는데, 뭐라고나 할까, 철학의 꼬리라고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걸로 인해 머리도 가슴도 구석구석까지 투명해져서 뭔가 살아가는 것이 푹신하고 안정된 듯, 아무 말 없이, 소리도 내지 않고 우뭇가사리가 쑥 나올 때의 유연성으로 이대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아름답고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때는 철학 따위를 논할 게 아니다.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살아갈 예감 따위는 좋은 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웠다. 그런 기분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인간은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예수. 그렇지만 여자 예수 같은 건 싫다.

20~21p.
...본능이라는 말과 마주하면 울고 싶어진다. 본능의 거대함, 우리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힘, 그런 것이 가끔 나의 여러 경험에서 느껴질 때면 미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몰라 멍해진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수도 없는 그냥 거대한 것이 머리에 푹 씌워지는 것 같다. 그러고는 나를 마음대로 질질 끌고 다니기 시작한다. 끌려다니면서도 만족하는 감정과 그것을 슬픈 심정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감정....

56p.
..나는 슬픈 버릇이 있는데, 얼굴을 두 손으로 완전히 감싸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얼굴을 감싸고 꼼짝하지 않고 있다.

111p.
.."저기 있잖아요." 품위 없는 큰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가급적 소리를 낮춰, "있잖아요, 내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했을 때가 가장 여성스러워진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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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p.
..그러자 가까스로 미타라이가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그런데 다들 말하는 것처럼 내가 사람들과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이야말로 날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해. 이렇게 매일 평범하게 사는데도, 왠지 화성에서 사는 기분이 들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모두 나와는 다르니까."
..아무래도 우울증의 원인은 그쪽인 것 같다.

157p.
..소소한 기쁨이나 슬픔, 분노, 그런 건 태풍이나 소나기, 봄이 되면 매년 어김없이 피는 벚꽃 같은 거지. 인간은 매일 그런 것에 휘둘리면서 결국 모두 비슷한 곳으로 흘러가. 아무도, 아무것도 될수 없지.

284p.
..아파트를 나갔을 때 다시 한번 건물을 돌아보았다. 이때의 기분은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씁쓸하면서 어린 시절에 장난하다가 들킨 기분이 떠올랐다. 한 인간의 일생을 뒤쫓는 것은 일종의 엿보기이며, 인간에 대한 모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51p.
.."이 얼마나 기만인가!"
..미타라이는 계속했다.
.."도카이도를 메뚜기처럼 뛰어서, 이렇게나 불면의 밤을 거듭했는데, 어째서 다들 아침 인사를 할 때 그렇게나 먼 어제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을까!"

454p.
"...한 사람이 몇십 년이나 살아오다가, 그 전부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했어. 별의별,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사정이 있겠지. 그걸 이런 무책임한 태도로 벼르고 있는 패거리에게 뭐라고 설명할 거야? 과연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조용히 죽는 걸로 충분해! 너라고 예외일 것 같아? 죽는 방법을 운운할 정도니까 자살한 이유는 이미 알고 있겠네?"

504p.
..세상일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글쓰기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사실 없다. 나이가 얼마든 모르는 것은 있고, 젊을 때 잘 알다가 점점 잃어버리는 세계나 지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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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p.
..오트밀은 1670년대 스웨덴 악마 숭배자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기도 했다. 유럽을 휩쓴 마녀 열풍이 끝나갈 무렵인 1681년, 영국 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조지프 글랜빌Joseph Glanvill은 자신의 저서 《사두키스무스 트리움파투스Sadducismus Triumphatus》에 스웨덴 블로쿨러Blockula에서 열린 악마적인 광란의 섹스 파티를 기록했다. 그는 "사탄이 손수 마녀들을 위해 베이컨과 양배추로 끓인 수프와 오트밀, 버터 바른 빵, 우유와 치즈로 차린 사악한 연회를 베풀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식사가 끝난 뒤에는 광란의 춤과 섹스가 이어졌다.

124p.
..튀긴 빵은 아시아 전역의 아침식사 메뉴로, 대개 콘지라는 죽에 곁들여 먹었다. 달지 않은 튀긴 빵 유탸오油條는 11세기 중국 송나라 때부터 먹던 음식이다. 대만에서는 달콤한 연유와 커피를 곁들인 쫄깃한 유탸오가 직장인의 보편적 아침식사이다. 유탸오는 광둥어로 ‘기름에 튀긴 악마‘라는 뜻이다. 송나라의 뛰어난 장수 악비를 독살한 재상 진회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기다란 반죽 두 가닥이 가운데에서 합쳐지는 모양은 진회가 사악했던 부인과 섹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반죽을 튀겨 먹는다는 것은 진회 부부에 대한 상징적인 응징이라고 할 수 있다.

184p.
..고대 영어에서 브론(brawn, 소나 돼지의 머리 부위 고기를 삶아서 젤리처럼 압축한 음식 _옮긴이)은 삶거나 초절임한 돼지고기를 의미했다. 이는 15세기 노섬벌랜드 공작 부부의 아침식사용 육류 목록이나 1660년대 새뮤얼 피프스의 일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후 브론은 헤드 치즈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 헤드 치즈는 실제 치즈와는 전혀 상관없는, 돼지 머리로 만든 차가운 젤리 형태의 테린을 말한다. 필리스 브라운은 브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리한 요리사라면 어떤 재료로든 브론을 만들 수 있다. 단, 절대적으로 맛있는 재료만 넣어야 한다."

284p.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성을 위한 요리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스테이크 같은 ‘남성적인‘ 요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이름부터 남성적인 브릭 고든Brick Gordon이라는 사람은1947년에 쓴 글에서 "남자가 비스킷을 구워야 한다면 밀방망이 대신 맥주병을 사용하라."고 주장했다. 달걀 프라이를 만들 때에도 사내답게 버터를 왕창 사용할 것을 권했다.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해결하던 시대는 지나갔으며 진정한 사내라면 아내의 도움이 있든 없든 베이컨과 달걀 프라이 정도는 먹어 줘야 한다고도 했다....

305p.
..성性과 음식은 오래전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30년대 영화에서부터 일찌감치 등장한 남녀의 아침식사 장면은 두 사람이 전날 밤을 함께 보냈다는 은유적 표현이었다. 아침을 같이 먹자는 요청은 밤을 함께 보내자는 수줍은 유혹이다. 침실에 함께 들어갔지만 아침을 먹고 가지 않았다면, 그날 밤의 관계가 썩 인상적이지 않았거나(이 경우 아마 상대가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 일로 감정적 친밀감까지 쌓으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자기 집에 가서 아침을 먹을지, 혹은 상대의 집에서 먹게 될지는 대개 상황에 따라, 개인 취향에 따라, 운에 따라 결정되었다.

338p.
..1870년대 철도 여행을 통해 최초로 계층 간 평등이 이루어졌다. 에이미 리히터 Amy Richter는 2005년에 출간된 《철도 위의 집Home On The Rails》에서 "이민 노동자들은 기차에서 판매하는 10센트짜리 소책자를 통해 기본적인 예의범절을 배울 수 있었다. 흑인 여성들은 공립학교에서, 중산층 여성이라면 호화 장정된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었다."고 밝혔다....

352~353p.
...캘리포니아 플레이서빌에서 횡재를 축하하는 최고의 방법은 행타운 프라이(행타운은 플레이서빌의 별명이었다)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속설에 따르면, 행타운 프라이는 황금을 발견한 사람이 호기롭게 캐리 하우스 호텔(플레이서빌의 유명한 호텔_옮긴이)에 들어가 제일 비싼 아침식사 메뉴를 주문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호텔에서는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를 총동원해 오믈렛, 베이컨, 굴튀김을 한 접시에 담아 내왔다. 당시 이 음식의 가격은 7~8달러(현재 가치로는 175달러)였다.
..이 특별한 아침식사 요리는 곧 시에라네바다 산맥 일대의 금광촌에서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퍼져 나갔다. 사내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 돌아다니며 이 음식을 사 먹는 것으로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 특별히 잘나가던 사람들은 ‘치즈케이크를 곁들인‘ 행타운 프라이를 주문했는데, 이는 오믈렛과 매춘부가 함께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388~389p.
..인간의 자기 통제 능력은 혈당 수치와 관련되는데, 이 수치는 아침을 먹기 전에 가장 낮다. 아침을 건너뛰는 경우 그 영향은 다양한 사회적 행동에서 나타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적 행동에는 "주의력 조절, 감정 조절, 금연, 스트레스 관리, 충동 자제, 공격적 범죄 행동 억제 등 수많은 자기 통제 행동이 방해를 받는다."고 한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서 범죄자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이들은 제대로 된 아침식사를 하기 힘들 만큼 가난했거나, 너무 바빠서 아침을 챙겨 주지 못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을 것이다.

430p.
..식당에서 원하는 메뉴를 주문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은 누구든 겪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 첫 식사부터 이렇게 된다면 정말 화나는 일이다. 식당의 아침식사는 하루를 활기차게 할 수도, 망쳐 버릴 수도 있다. 또한 아침식사는 영화를 살릴 수도, 망칠 수도 있다. 영화 속 아침식사 장면은 조용한 일상의 순간, 인물의 특징 등 정상적인 상태를 설정하는 역할이고 여기서부터 일탈이 일어난다. 아침식사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끼니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영화 속 아침식사의 역할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449~450p.
...빅토리아 시대를 풍자하며 문학과 저널리즘의 차이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했던 작가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는 1880년에 출간한 《노트북Note-Books》에서 베이컨이 안겨 주는 순수한 기쁨을 묘사했다. 문제는 해외에 나갔을 때 어느 가난한 집에 묵으면서 발생했다. 독신자였던 그는 아침마다 직접 베이컨을 구워 먹었는데 장성한 네 딸이 있는 그 집은 고기라고는 구경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 집에는 딸들은 있지만 베이컨이 없고, 나는 딸은 없지만 베이컨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로 하늘에 조언을 구하면 늘 자신을 속이지 말고 좋아하는 베이컨을 먹으라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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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p.
..리셉션 겸 카페테리아는 모든 것이 반듯반듯하고 깔끔하다. 테이블보는 이중이고, 화분이 곳곳에 놓여 있는데 척 보기에도 손질이 잘되어 파릇파릇하다. 주위를 둘러보며 앉아 있으려니 새하얀 리넨이 깔린 쟁반에다 받침에 얹은 도기로 된 커피포트와 잔 받침에 엎어놓은 커피 잔, 자그마한 유리 피처에 담긴 주스와 유리잔, 접시에 냅킨을 깔고 얹은 일회용 잼과 버터, 따끈하게 데운 우유 포트, 햄치즈 샌드위치와 잘게 썬 빵들 그리고 토스터에서 빵을 집어낼 앙증맞은 집게까지 주신다. 나는 이런 것들이 없어도 잘 살지만 있으면 참 좋아한다.

177p.
.."그리고 그때, 뭔가가 일어났어요. 뭐라 설명하기 힘든 것이었죠. 내 직장과 내가 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다른 나라에 그렇게 앉아 있는데, 어떤 느낌이 내게로 다가온 거예요. 뭔가를 기억해낸 것 같기도 했어요. 내가 한 번도 알았던 적 없지만 내내 기다려온 뭔가를. 하지만 난 그게 뭔지 몰랐어요. 내가 잊어버렸던 무엇일 수도 있겠죠. 아님 내가 평생을 그리워한 무엇일 수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는 거예요. 하지만 너무 슬픈 느낌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난 살아 있음을 느꼈거든요. 그래요. 살아 있음을요.
..그게 바로 내가 파리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에요. 또한 그 순간, 파리도 나와 사랑에 빠졌단 걸 느꼈죠."

195p.
..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실로 이와 같다. 수전 손택을 인용하면 ‘사진을 찍는 것은 구도를 잡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 것은 뭔가를 배제하는 것이다.‘....

206p.
..면 수건도 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습해서 수건이 잘 마르지 않고 늘 방 안에 수건이 널려 있는 것도 싫어서 배낭여행객의 필수품인 스포츠 타월을 쓰는데, 이 몸에 척척 붙는 고무 같은 질감은 끝내 적응이 안 된다. 여행에서 싫은 점 중 하나는 생활의 디테일이 너무 떨어진다는 거다. 서울 내 집에서라면 샤워 후 선반에서 뽀송한 새 타월을 꺼내 머리를 닦고 까슬한 샤워 가운을 입겠지. 몸이 어느 정도 마르면 잘 다린 파자마로 갈아입을 테고, 그 모든 것에선 내가 좋아하는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날 것이다.

208p.
..그렇게 당신은, 점점 ‘전문화 과정‘을 거쳐, 당신만의 지도를 갖게 된다. 당신의 취향과 감정의 축척에 따라 왜곡된 지도를, 재조립된 도시나 마을을 갖게 되는 셈이다. 당신이 전문가가 되면 될수록 왜곡은 더 커진다. 지도의 어느 곳은 더 크게 부풀고 어느 곳은 휠 것이며 어느 곳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230p.
...잘 말린 속옷을 갖춰 입고 포장도로를 밟고 다니던 사람들이 팬티가 홈빡 젖도록 물세례를 받고는 깔깔 웃으며 "한 번 더! 한 번더!"를 외치는 걸 보니 아, 인간의 몸이란 어떤 감각을 그리워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길 원하는 수많은 감각들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키고 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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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p.
...이 책에는 내가 어떤 것들에 대해, 어떨 때, 어떤 날에 생각한 것들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보여 주는 책일 수 있다. 내 안에는 통괄적인, 다시 말해 확고한 사유의 지층이 없다. 나는 그 화근을 피했다.

23~24p.
..그는 정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루아르 강변의 호텔에서 잤다. 그런 뒤에 며칠 동안 강 근처를 맴돌았다. 오후 늦게까지 방에 있었다.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시러 나갔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밤에 다시 나갔다. 열려 있는 카페를 찾아다녔다. 광기였다. 우리는 루아르 강을, 그 장소를 떠나지 못했다. 무엇을 찾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두려웠다. 깊은 고통에 짓눌렸다. 울었다.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말을 했다. 우리의 삶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임을 알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상한 욕망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겨울 동안 광기가 이어졌다. 그런 뒤에는 조금 가라앉아서, 그냥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모데라토 칸타빌레(Moderato Cantabile)』를 썼다.

25p.
..몇 해 여름을 노플에서 혼자 술과 함께 살았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주중에는 큰 집에 나 혼자 있었다. 술은 그럴 때 온전한 의미를 띤다. 술은 고독이 울려 퍼지게 하고, 고독을 다른 어떤 것보다 좋아하게 한다. 술을 마신다고 꼭 죽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늘 자살 생각을 하게 된다. 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이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살을 막아 주는 것은, 죽고 나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34p.
..빈롱. 남자가 있는 곳에서 천 킬로미터 아래까지, 남자와여자를 이어 주는 강이 흘렀다. 아직 어렸던 그때 내 몸속에서 일어난 흥분이 기억난다. 나에게 아직 금지되어 있던 것을 알게 해 준 흥분이었다. 세상은 한없이 넓었고, 아주 명료하게 복잡했다. 이해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는 사실을 아주 명료하게 말해 줄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37p.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이행이 아니다. 발현이 아니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에 대한 해독이다. 당신의 삶이 잠든 동안, 당신의 삶이 유기체로 되풀이되는 동안 스스로 알지 못한 채로 당신이 이미 해 놓은 것에 대한 해독이다. 그것은 ‘이동‘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글을 쓰기 전에, 남들은 아직 읽을 수 없는 것을 미리 읽는 본능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써 놓은 것을, 남들은 아직 해독할 수 없는 자기 글의 첫 상태를 읽는 것이다....

47p.
..상상력은 그 어디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가장 강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나누는 것은 바로, 여자로서는 점점 더 강하게 호소하게 하고 여자를 탐하는 남자는 굳어 버리게 하는 것, 불감증이다. 여자 자신도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욕망을 앗아 가는 병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여자에게는 욕망이 무엇인지, 욕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지 못하게 될 때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있다. 여자는 다른 여자들처럼 욕망을 느끼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는다. 그 점에 대해 할 말은 단 한 가지뿐이다. 사람들이 흔히 상상이 부재한다고 믿는 지점이야말로 상상력이 가장 강한 장소다. 그게 바로 불감증이다. 불감증은 자기를 가지라고 내어주는 남자를 원하지 않는 여자가 상상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아직 여자에게 오지 않은, 아직 여자가 알지 못하는 남자를 향한 욕망의 불감증이다. 여자는 미지의 남자에게, 그의 소유가 되기 전에 미리 충실하다. 불감증은 그 남자가 아닌 대상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불감증의 결말은 예측 불가능하고 한계 지을 수 없는, 남자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개념이다. 그것은 오로지 여자가 자신의 연인에 대해서 가지는 욕망이다. 그남자가 누구든, 어떤 사회 계층 출신이든, 여자가 그를 향해 욕망을 느꼈다면 그는 여자의 연인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을 향하는 통제 불가능한 소명, 그것은 여자의 몫이다.

74p.
..집에는 아이들을 위한 자리가 부족하다. 언제나, 심지어 성처럼 넓은 저택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집을 쳐다보지 않지만, 집안 구석구석을 어머니보다 더 잘 안다. 아이들은 어디든 뒤진다. 들추면서 찾아다닌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할 때 자기를 둘러싼 자궁의 벽을 보지 않듯 아이들은 집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집을 잘 안다. 아이들은 집을 떠날 때 비로소 집을 본다.

80p.
...발코니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사치다. 폭격을 받은 도시는 폐허와 시체로 남지만, 바다에는 원자 폭탄이 떨어져도 십 분 후면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물은 모양을 만들 수 없다....

98p.
..책 속의 그들을 나는 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를 알지 못하듯이,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삶이 없다. 나의 이야기는 매일매일, 그리고 그 매일의 매 순간에 삶의 현재에 의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나는 사람들 각자가 ‘나의 삶‘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전혀 모르겠다. 흩어진 나를 한데 모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뿐이다....

115p.
..바로 거기, 수도국 직원이 물을 끊는 순간부터 여자가 카페에서 돌아온 순간까지, 나는 그사이에 놓인 이야기의 침묵을 되살린다. 그러니까, 깊은 침묵의 문학을 되살린다. 바로 그것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야기에 파고들도록 한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이야기 바깥에 머물고 만다. 그녀는 그냥 집에서 기다리다가 남편이 오면 죽기로 했다고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을로, 카페로 갔다.

153p.
..내 나이만큼 젊음에서 멀어지면, 여자가 자기 시간을 써서 하는 일들이 신비스럽다. 무척 무섭고 무척 신비스럽다. 각자의 경우가 늘 최악의 경우다. 아이가 있는 여자들만이 삶을 온전히 쓴다. 아이가 바로 그 여자들의 확신이다. 그녀들은 아이의 요구, 아이의 몸, 아이의 아름다움, 아이에게 쏟아부어야 할 정성과 사랑 때문에 다른 여유가 없다. 아이 하나하나가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고, 그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아이와 함께 있는 여자만이 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모습이다. 그 외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당신들과 그런 당신들한테서 또 떨어져 있는 나에게는, 그 어떤 삶도 의미가 없고 존재 이유도 없다. 모든 삶은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다. 건물마다 수직으로 차곡차곡 들어가 사는 사람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생각하면서 그 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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