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p. ...이 책에는 내가 어떤 것들에 대해, 어떨 때, 어떤 날에 생각한 것들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보여 주는 책일 수 있다. 내 안에는 통괄적인, 다시 말해 확고한 사유의 지층이 없다. 나는 그 화근을 피했다.
23~24p. ..그는 정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루아르 강변의 호텔에서 잤다. 그런 뒤에 며칠 동안 강 근처를 맴돌았다. 오후 늦게까지 방에 있었다.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시러 나갔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밤에 다시 나갔다. 열려 있는 카페를 찾아다녔다. 광기였다. 우리는 루아르 강을, 그 장소를 떠나지 못했다. 무엇을 찾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두려웠다. 깊은 고통에 짓눌렸다. 울었다.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말을 했다. 우리의 삶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임을 알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상한 욕망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겨울 동안 광기가 이어졌다. 그런 뒤에는 조금 가라앉아서, 그냥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모데라토 칸타빌레(Moderato Cantabile)』를 썼다.
25p. ..몇 해 여름을 노플에서 혼자 술과 함께 살았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주중에는 큰 집에 나 혼자 있었다. 술은 그럴 때 온전한 의미를 띤다. 술은 고독이 울려 퍼지게 하고, 고독을 다른 어떤 것보다 좋아하게 한다. 술을 마신다고 꼭 죽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늘 자살 생각을 하게 된다. 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이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살을 막아 주는 것은, 죽고 나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34p. ..빈롱. 남자가 있는 곳에서 천 킬로미터 아래까지, 남자와여자를 이어 주는 강이 흘렀다. 아직 어렸던 그때 내 몸속에서 일어난 흥분이 기억난다. 나에게 아직 금지되어 있던 것을 알게 해 준 흥분이었다. 세상은 한없이 넓었고, 아주 명료하게 복잡했다. 이해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는 사실을 아주 명료하게 말해 줄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37p.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이행이 아니다. 발현이 아니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에 대한 해독이다. 당신의 삶이 잠든 동안, 당신의 삶이 유기체로 되풀이되는 동안 스스로 알지 못한 채로 당신이 이미 해 놓은 것에 대한 해독이다. 그것은 ‘이동‘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글을 쓰기 전에, 남들은 아직 읽을 수 없는 것을 미리 읽는 본능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써 놓은 것을, 남들은 아직 해독할 수 없는 자기 글의 첫 상태를 읽는 것이다....
47p. ..상상력은 그 어디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가장 강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나누는 것은 바로, 여자로서는 점점 더 강하게 호소하게 하고 여자를 탐하는 남자는 굳어 버리게 하는 것, 불감증이다. 여자 자신도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욕망을 앗아 가는 병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여자에게는 욕망이 무엇인지, 욕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지 못하게 될 때가 생각보다 훨씬 자주 있다. 여자는 다른 여자들처럼 욕망을 느끼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는다. 그 점에 대해 할 말은 단 한 가지뿐이다. 사람들이 흔히 상상이 부재한다고 믿는 지점이야말로 상상력이 가장 강한 장소다. 그게 바로 불감증이다. 불감증은 자기를 가지라고 내어주는 남자를 원하지 않는 여자가 상상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아직 여자에게 오지 않은, 아직 여자가 알지 못하는 남자를 향한 욕망의 불감증이다. 여자는 미지의 남자에게, 그의 소유가 되기 전에 미리 충실하다. 불감증은 그 남자가 아닌 대상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불감증의 결말은 예측 불가능하고 한계 지을 수 없는, 남자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개념이다. 그것은 오로지 여자가 자신의 연인에 대해서 가지는 욕망이다. 그남자가 누구든, 어떤 사회 계층 출신이든, 여자가 그를 향해 욕망을 느꼈다면 그는 여자의 연인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을 향하는 통제 불가능한 소명, 그것은 여자의 몫이다.
74p. ..집에는 아이들을 위한 자리가 부족하다. 언제나, 심지어 성처럼 넓은 저택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집을 쳐다보지 않지만, 집안 구석구석을 어머니보다 더 잘 안다. 아이들은 어디든 뒤진다. 들추면서 찾아다닌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할 때 자기를 둘러싼 자궁의 벽을 보지 않듯 아이들은 집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집을 잘 안다. 아이들은 집을 떠날 때 비로소 집을 본다.
80p. ...발코니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사치다. 폭격을 받은 도시는 폐허와 시체로 남지만, 바다에는 원자 폭탄이 떨어져도 십 분 후면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물은 모양을 만들 수 없다....
98p. ..책 속의 그들을 나는 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를 알지 못하듯이,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삶이 없다. 나의 이야기는 매일매일, 그리고 그 매일의 매 순간에 삶의 현재에 의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나는 사람들 각자가 ‘나의 삶‘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전혀 모르겠다. 흩어진 나를 한데 모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뿐이다....
115p. ..바로 거기, 수도국 직원이 물을 끊는 순간부터 여자가 카페에서 돌아온 순간까지, 나는 그사이에 놓인 이야기의 침묵을 되살린다. 그러니까, 깊은 침묵의 문학을 되살린다. 바로 그것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야기에 파고들도록 한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이야기 바깥에 머물고 만다. 그녀는 그냥 집에서 기다리다가 남편이 오면 죽기로 했다고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을로, 카페로 갔다.
153p. ..내 나이만큼 젊음에서 멀어지면, 여자가 자기 시간을 써서 하는 일들이 신비스럽다. 무척 무섭고 무척 신비스럽다. 각자의 경우가 늘 최악의 경우다. 아이가 있는 여자들만이 삶을 온전히 쓴다. 아이가 바로 그 여자들의 확신이다. 그녀들은 아이의 요구, 아이의 몸, 아이의 아름다움, 아이에게 쏟아부어야 할 정성과 사랑 때문에 다른 여유가 없다. 아이 하나하나가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고, 그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아이와 함께 있는 여자만이 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모습이다. 그 외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당신들과 그런 당신들한테서 또 떨어져 있는 나에게는, 그 어떤 삶도 의미가 없고 존재 이유도 없다. 모든 삶은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다. 건물마다 수직으로 차곡차곡 들어가 사는 사람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생각하면서 그 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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