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 ..사물들, 사람들의 얼굴, 행동, 감정, 세상의 질서를 명명하는 데 쓰인 수천 개의 단어들이 갑자기 무효화될 것이라는 것은 심장을 뛰게 하고 성기를 젖게 만든다.
93~94p.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줄에 있는 여자아이에게는 어떤 기억이 적합할까? 어쩌면 그녀에게는 지난여름의 기억 외에 다른 기억은 없는 게 아닐까. 그녀 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육체, 남자의 몸, 상(像)이 거의 없는 그 기억. 그녀는 미래를 위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 1) 날씬해지고 금발 머리가 되는 것, 2) 자유롭고 독립적인,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밀렌느 드몽죠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보며 꿈꾸기.
95p. ...미래는 연장해야할 경험들의 합(合)일뿐이었다. 24개월의 군 복무, 일, 결혼, 아이들. 사람들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계승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했고, 우리는 정해진 이 미래 앞에서 막연히 오랫동안 젊음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연설과 제도는 우리들의 욕망보다 뒤처졌고, 사회가 말로 표현하는 것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격차는 당연했으며, 그것은 메울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단지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각자가 마음속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을 뿐.
104p.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들이 소스를 찍어 먹는 방식과 설탕을 녹이기 위해 찻잔을 흔들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며 말하는 방식을 주목하게 됐고, 단번에 외부적인 시선으로 가정을 바라보며 더는 우리의 것이 아닌 닫힌 세계라고 지각하게 됐다....
124p. ..시대마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행동과 말, 책이나 지하철 포스터만큼이나 웃기는 이야기들이 권장하는 사고에서 빗겨나간 곳에, 이 사회가 자신도 모르게 침묵하는 모든 것들이 있다. 사회는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고독한 불편함을 안겨 준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조금씩 깨진 침묵과 무언가에 대해 터져 나온 말들은 결국 인정받게 되지만, 반면 그 아래로 또 다른 침묵이 형성된다.
141p. ..동유럽으로 휴가를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보도블록이 깨진 잿빛 거리, 커다란 종이에 둘둘 말려 있는 상표 없는 알뜰한 상품들을 파는 정부가 운영하는 상점 앞에서, 아파트 천장에 매달린 장식 없는 전구 앞에서, 그들은 우아함이 없는, 전쟁 후 줄곧 열악했던 느린 세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은 감정이었지만, 결코 그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수를 놓은 블라우스와 증류주를 가져왔고,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 미개발된 나라가 있어서 그들을 이렇게 과거로 데려가줄 수 있기를 바랐다.
178p.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지는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197~198p. ...사랑을 나눈 후, 그녀는 그에게 묵직한 몸을 포갠 채, 자동차들의 소음 속에 반쯤 잠이 들며 이렇게 낮잠을 잤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 어릴 적 이브토의 일요일, 책을 읽다가 어머니의 등에 기대어 잠든 낮잠, 영국에서 오페어로 머물 때 전기난로 옆에서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잤던 낮잠, 팜플로니나의 메종나브 호텔에서의 낮잠. 그녀는 매번 이 달콤한 무감각 상태에서 빠져나와 일어나 숙제를 하고, 거리로 나오고, 일을 하고, 사회적으로 존재해야 했다. 이 순간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두 개의 축이 교차하는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매 순간에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그녀가 보고 들은 것들을 지탱하는 수평선, 또 다른 하나는 몇 개의 이미지가 동반된, 밤을 향해 빠져드는 수직선이다.
213p. ...소비의 경험이 없는 그들은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며, 물질적인 재산에 대한 자제도 분별도 없는 이 집단적인 굶주림의 광경은 우리를 언짢게 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떠올리며 꾸며낸, 순수하고 추상적인 자유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멍에를 쓴>> 민족에 대해 습관처럼 느꼈던 비탄은, 그들이 자유를 쓰는 사용법에 대한 비난 섞인 관찰로 바뀌었다. 우리는 행복과 <<자유로운 세상>>을 가졌다는 우월감을 만끽하기 위해 소시지와 책을 위해 줄을 섰던, 모든 것을 박탈당했던 그들을 더 좋아했다.
225p.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나>>와 <<그녀>> 사이의 선택이다. <<나>> 안에는 너무도 확고부동한 것들, 편협하고 숨 막히는 무언가가 있고, <<그녀>> 안에는 너무 많은 외재성과 거리감이 있다.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책의 모습과 그 책이 남겨야 하는 것은 얼굴 위로 흐르는 빛과 그림자이며, 12살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그 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최근에 ‘삶과 운명‘을 읽으며 그녀가 간직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방법이 아니라면 깨달음, 적어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차에 적신 마들렌처럼 우연이 가져다주는 어떤 신호를 기대하고 있다.
255~256p. ...그녀는 하나씩 차례로 떠다니는 인생의 여러 순간 속의 자신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의식과 그녀의 육체를 사로잡는 낯선 본성의 시간이며, 그녀였던 모든 존재의 형태들이 순식간에 되돌아오는 듯한, 현재와 과거가 뒤섞임 없이 겹쳐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미 가끔씩 느껴 본 적이 있었던 감각으로 — 마약으로 이런 감각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마약을 한 적은 없다. 무엇보다 온전한 정신상태의 쾌락이 최고라고 여긴다 — 이제는 일종의 확장과 지연 속에서 그것을 포착한다. 그녀는 이 감각에 이름을 부여한다. ‘지우고 다시 쓰는 감각‘(palimpseste),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새로 쓰기 위하여 긁어서 지운 수사본>>이므로 완벽히 들어맞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녀는 여기에서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거의 과학적인, 어쩌면 지식으로 쓸 수 있는 — 무엇에 대한 지식인지는 알지 못한다 — 도구를 본다. 1940년부터 오늘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다는 설움에 죄책감마저 더해져 점점 더 그녀를 붙잡는다. 분명 프루스트의 영향이겠지만, 실질적인 경험을 토대로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으므로, 그녀는 이 감각이 시작점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278p. ..뒤섞인 개념 속에서 자신만을 위한 문장,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외치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문장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301p. ..그것은 연속적이고 절대적이며, 삶의 마지막 장면까지 점차 현재를 집어삼키는 반과거 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일시적으로 중단된 흐름, 그러나 그녀의 존재의 실질적인 형체와 사회적인 위치를 포착할 사진과 영화 속 장면들이 군데군데 들어갈 것이다 — 기억의 정지이자 동시에 그녀의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삶의 요소들의 본성, 외부적인 것들(사회적인 경력, 직업) 혹은 내부적인 것들(생각과 동경,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이 아니라, 저마다 하나뿐인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이다. 글 속에서의 <<그녀>>는 거울 속, 사진 속의 끊임없는 타인에 해당될 것이다. ..그녀가 일종의 비개인적인 자서전으로 보는 이 글에는 어떤 <<나>>도 없다 — 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사람들>>과 <<우리>>가 있다 — 마치 이번에는 그녀가 지난날의 서사를 얘기하는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