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p.
..아케미는 명함을 받아들고 그 빳빳한 네 모퉁이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다. 앗코 씨가 사소한 일에 동요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을 통해 온갖 사람과 접하기 때문에 사안을 여러 각도로 보는 것이다. 이타와에서 폐쇄된 세계밖에 모르는 아케미에게 나아갈 길은 한 가지이고, 그 길을 벗어나면 마지막, 인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녀처럼 될 수 있다면, 그러나 바라는 것조차 무리였다....

57p.
.."그렇지.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실제로 지금까지 파란 조명을 켜놓은 다른 노선에서도 투신 자살이 훨씬 줄었대. 파란 빛의 효과야. 그것도 이 세상의 진실 중 하나. 사람의 일생을 늘리는 것도 줄이는 것도 그런 별것 아닌, 한심하고, 사소하고, 없어도 아무도 곤란해 하지 않을 것들이지."

107~108p.
..그래. 이건 싸움이 아냐. 토론이야.
..부장을 나쁜 사람 취급하고 전근대적이라고 단정짓고 그 존재에 주눅들면서, 자신이 선량한 약자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부장은 진심으로 크리스마스는 화려하게 보내야 하는 날, 사치를 부리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는 나쁜 마음도 교만도 없다. 착각한 채 지금까지 온 것은 그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아무도 그에게 의견을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뿐이다. 다른 의견이 서로 충돌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회의인데. 회의가 가져야 할 모습인데. 이럴 때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서야. 부장을 묶고 있는 것, 부장을 가두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무역회사의 화려한 시절을 당신의 눈으로 보고 일조했다는 자부심이다. 그것은 필시 그의 핵核이다. 그것을 부정하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미치코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듣기 좋고 이해하기 쉽게 얘기해보기로 했다.

198p.
..한신 백화점을 나와 인파 사이를 누비며 사에는 차츰 기운이 났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뭐든 먹으면 이 비참한 하루도 작은 여행이 된다. 관광할 기력은 없어도 시간과 식욕만은 있는 지금, 이 지하상가는 제격이었다. 꼬치 튀김에 오코노미야키에 어묵. 오사카의 명물이라는 명물이 이곳에 다 모여 있었다.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전부 없었던 일로 하자고 생각했다.

211p.
..결국, 자신의 인생 최대의 불행도 지나가는 누군가에게는 재미있고 웃긴 한 페이지일 뿐이다. 조금 전이었더라면 그 사실을 깨닫고 울컥하거나 비참했겠지만, 지금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되레 , 뭔가 유쾌하다.

211~212p.
..자리 하나를 둘러싸고 싸우는 것이 취업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이거나 누군가를 제치는 일이 생겨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일에만 신경 쓰느라, 자신이 골라야 할 의자의 크기나 색을 제대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할머니 곁에서 일하고 싶다. 가능하면 정해진 장소만 다니는 내근직. 자신이 내세우는 캐릭터는 ‘할머니 껌딱지 손녀.‘ 영업 포인트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 조건을 한정하는 것과 응석은 다르다. 자신을 알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과 포기도 역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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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젊었을 적에 가정했던 만약의 규모는 더욱 컸다. ‘이렇게 안 했더라면 내 인생이 싹 달라졌을 텐데‘ 하고 인생을 좌우하는 가정만 했다. 하지만 살아가는 시간이 늘면서 ‘만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자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 줄었다. 지금 가정하는 것은 ‘체육관에 다니지 않았거나 러닝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정도이며, 그것은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나를 적극 긍정하기 위한 가정이다.
..이럴 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체력은 돈과 같지 않을까. 흔히 큰 부자가 되면 돈을 쓰는 데 인색해진다고들 하지 않는가. 가득 채워져 있으면 쓰고 싶어지는 게 아니라 쓰고 싶어지지 않나 보다. 그것과 마찬가지지 않을까? 젊을 적에는 남아도는 체력을 어쨌거나 소중히 아껴두고 싶다. 아까워서 도무지 쓸 수가 없다.
..하지만 돈과 달리 쓰지 않아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줄어 있다. 자꾸만 줄어간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아, 쓰지 않으면 줄어드는구나. 그래서 다급히 사용하기 시작한다.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하기 시작한다.

..삶은 분명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일이지만 경험을 통해 현명해진다기보다 경험함으로써 ‘자제하지 않아도 무탈하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요리를 오래 하다 보면 어느 과정을 생략해도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건 결점을 없애려 들기보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결점이 얼굴을 드러낸 오랜 친구들은 다들 하나같이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목소리가 크든 아무리 제멋대로 굴든 아무리 자기애가 강하든 미워할 수가 없다. 더구나 그런 부분이 그 사람의 본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흔이 넘어서도 목청을 한껏 높여서는 "나야 잘 알지"라고 자꾸만 말하는 것이, 예순이 지나서도 "주문한 와인이 너무 늦는데 어떻게 말 좀 해봐"라고 5분에 한 번꼴로 재촉하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 ‘미워할 수 없는 마법‘ 덕분에 그들은 이렇게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들의 매력적인 단점을 무럭무럭 키워나가고 있다.
..3월에 또다시 한 살을 더 먹은 나도 앞으로 점점 자제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나가게 될 것이다. 자신의 결점이 이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다. 결점을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다. 그러니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삶을 깨우치거나 현명해지려는 것보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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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p.
...게다가 나는 지난번 그 사건 이후 어둠이라는 것에 매우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정말이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한순간에 눈을 잃는다든가 해서 빛의 존재를 잊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순식간에 모든 ‘형태‘에 화해가 성립된다. 삼각 빵도, 둥근 빵도 요컨대 ‘빵은 빵이다‘라는 것을 만인이 납득한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 여자아이도 눈을 감은 채 내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랬다면 우리는 함께 놀이공원으로 가서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설픈 빛 때문에 아이는 삼각 빵을 빵이 아니라 삼각형으로 잘못 인식해버린다. 빛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투명하다 하더라도 비추는 대상을 모조리 불투명하게 바꿔버리는 것 같다.

16p.
...육체를 옷으로 덮은 것이 문명의 진보라면, 앞으로 복면이 상식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까지도 중요한 의식이나 축제 같은 데서 종종 실제로 사용되어 왔다. 제대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복면은 타인과의 관계를 맨얼굴일 때 이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주는 것은 아닐까.

82~83p.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에 관한 소설은 흥미롭다. 보통 괴물이 접시를 깨면 그것은 괴물의 파괴 본능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이 작가는 반대로 접시가 깨지기 쉬운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괴물로서는 단지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뿐이었는데 희생자의 나약함이 어쩔 수 없이 그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깨지는 것, 부서지는 것, 타버리는 것, 피를 흘리는 것, 숨이 끊기는 것......이러한 모든 행위가 존재하는 한, 괴물은 그 모든 것을 끝없이 계속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애초에 괴물의 행위에 발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희생자들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104~105p.
...맨얼굴이 아니라고 해서 가면을 복면 취급하는 것은 흰 것을 검다고 싸잡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면을 통로의 확대라고 한다면 복면은 통로의 차단이고 오히려 대립적인 관계다. 그것도 아니면 복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이렇게 가면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나 자신은 너무나도 우스꽝스런 광대가 되어버린다.
..덧붙여서 한 가지 지금 막 떠오른 것을 써둔다면, 가면은 오로지 피해자에게 필요하고 복면은 반대로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167p.
...미래라는 것은 항상 과거의 연산(演算)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나서 아직 스물네 시간밖에 살지 않은 가면에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행동 예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인간의 사회적 방정식이라 함은 요컨대 연령의 함수 그 자체이며 한 살 난 가면이 지니는 가능성은 실로 갓난아이와 같이 너무나 자유로웠다.

180p.
..나는 문득 그 거실의 불빛에 질투 같은 것을 느꼈다. 누군가 손님이 와서 나 대신 그곳을 점령하고 있을는지 모른다는 식의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는 여느 때처럼 변함없이 거실이 있고 날이 저물면 불이 켜진다는 그 사실 자체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여느 때라면 그 불빛 아래에서 식사를 기다리며 석간신문을 보고 있을 내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창밖을 서성이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이 너무나 부당하여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그 빛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태연자약한 거실의 불빛...... 마치 당신과 꼭 닮았다.......

195~196p.
..그 소리들을 합산해보면 이 감옥의 거대함은 아무래도 예삿일은 아닌 것 같다.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다. 그들의 죄명이 얼굴을 잃은 죄, 타인과의 통로를 차단한 죄, 타인의 슬픔이나 즐거움에 대해 이해를 잃은 죄, 타인 속에 있는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두려움과 즐거움을 잃은 죄, 타인을 위해 창조할 의무를 잊은 죄, 같이 들을 음악을 잃어버린 죄, 그러한 현대의 인간관계 그 자체를 나타낸 죄인 이상, 이 세계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라는 섬을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갇힌 몸이라는 점에는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다. 또 그들이 영혼의 얼굴밖에 잃지 않은 데 비해, 나는 생리적으로까지 잃어버렸기 때문에 유폐되었다는 그 정도에도 자연히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희망이 느껴진다. 혼자 생매장당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상황에서는 확실히 뭔가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이 있다. 가면 없이는 노래할 수도 없고, 적과 싸울 수도 없으며, 치한이 될 수도 없고, 꿈을 꿀 수도 없다는 어중간한 부담감이 나 한 사람의 죄상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통 화제가 되어준 탓일까. 그럴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분명 그러한 것임에 틀림없다.

220~221p.
...개인은 죽음에 대해서 항상 피해자이지만 완벽한 집단에 있어서 죽음은 단지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한 집단이란 근본적으로 가해자적 성격을 띤다. 완벽한 집단의 예로서 군대를, 완벽한 익명의 예로서 군사를 각각 예를 든다면 우선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보면 내 공상에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군대 제복 자체를 모살죄와 같은 것으로 판정할 수 없는 법정이 왜 똑같은 가면을 뒤집어쓴 우익집단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엄격한 태도를 취할까. 국가가 가면을 질서에 배반하는 악이라고 보았다기보다, 의외로 국가 자신이 하나의 거대한 가면이며, 내부에 다른 가면이 중복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해가 없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라는 셈이되겠는데.......

253~254p.
...당신과 가면이 짜고 짓부수어버린 그 금기의 성채의 뚫어진 틈으로 당신의 불결함을 들여다본다는 식으로밖에 당신과의 관계가 용납되지 않는다면, 좋다, 평생 동안이라도 들여다볼 용의는 있다. 그리고 복수는 그러한 도착상태의 지속 그 자체로서 충분히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나의 분열에 맞추어서라도 당신 자신도 또 같은 분열을 끝도 없이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까...... 사랑도 증오도 아니다....... 가면도 맨얼굴도 아니다....... 오직 농밀한 회색 속에서 아무래도 나는 일종의 균형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75~276p.
...가면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무장해제나 다름없다. 아니 그것으로 당신을 대등한 장소로까지 끌어내릴 수가 있다면 무장해제해도 좋다. 그러나 이 차감정산은 비율이 너무 좋지 않다. 아무리 당신의 위선을 벗겨낸다 하더라도 당신의 가면은 천 장이나 겹쳐져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가면이 나타나는데, 내 가면은 한 장뿐이어서 그 뒤에는 평범한 맨얼굴 한 장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283p.
..그때 가장 격려가 되어준 것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비상계단 그늘에서 혼자 가만히 요요를 하고 있는 그 딸아이를 쳐다보는 일이었다. 자신의 불행을 명확히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불행을 짊어진 이 어린아이는 그러나 불행에 고뇌하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보다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아마도 그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자세가 저 직관을 기르게 되었을 것이다. 나도 저 어린아이처럼 잃는 것에 대해 견뎌내고 싶다.

312p.
.."전쟁, 아직 당분간은 일어날 것 같지 않지."
..그러나 그 아가씨의 어투에는 타인을 원망하는 듯한 투는 추호도 없다. 특별히 상처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꺼낸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전쟁이 일어나면 한꺼번에 사물의 가치기준이 전복되고, 얼굴보다도 위장이, 외형보다도 생명 그 자체가 훨씬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될 터라고 소박한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320p.
...물론 이것이 가면만의 책임은 아니고, 문제는 차라리 나의 내부에 있다는 것쯤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그 내부는 뭐 반드시 나 혼자만의 내부는 아니고 모든 타인에게 공통되어 있는 내부이기 때문에, 나 혼자서 그 문제를 짊어질 리는 없다....... 아무렴,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사양하겠다....... 나는 인간을 미워할 테다....... 누구라도 변명할 필요 같은 거, 일체 인정할 것 같은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그러나 앞으로는 결코 쓴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쓴다는 행위는 아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경우에만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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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p.
..사물들, 사람들의 얼굴, 행동, 감정, 세상의 질서를 명명하는 데 쓰인 수천 개의 단어들이 갑자기 무효화될 것이라는 것은 심장을 뛰게 하고 성기를 젖게 만든다.

93~94p.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줄에 있는 여자아이에게는 어떤 기억이 적합할까? 어쩌면 그녀에게는 지난여름의 기억 외에 다른 기억은 없는 게 아닐까. 그녀 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육체, 남자의 몸, 상(像)이 거의 없는 그 기억. 그녀는 미래를 위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 1) 날씬해지고 금발 머리가 되는 것, 2) 자유롭고 독립적인,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밀렌느 드몽죠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보며 꿈꾸기.

95p.
...미래는 연장해야할 경험들의 합(合)일뿐이었다. 24개월의 군 복무, 일, 결혼, 아이들. 사람들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계승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했고, 우리는 정해진 이 미래 앞에서 막연히 오랫동안 젊음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연설과 제도는 우리들의 욕망보다 뒤처졌고, 사회가 말로 표현하는 것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격차는 당연했으며, 그것은 메울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단지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각자가 마음속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을 뿐.

104p.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들이 소스를 찍어 먹는 방식과 설탕을 녹이기 위해 찻잔을 흔들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며 말하는 방식을 주목하게 됐고, 단번에 외부적인 시선으로 가정을 바라보며 더는 우리의 것이 아닌 닫힌 세계라고 지각하게 됐다....

124p.
..시대마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행동과 말, 책이나 지하철 포스터만큼이나 웃기는 이야기들이 권장하는 사고에서 빗겨나간 곳에, 이 사회가 자신도 모르게 침묵하는 모든 것들이 있다. 사회는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고독한 불편함을 안겨 준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조금씩 깨진 침묵과 무언가에 대해 터져 나온 말들은 결국 인정받게 되지만, 반면 그 아래로 또 다른 침묵이 형성된다.

141p.
..동유럽으로 휴가를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보도블록이 깨진 잿빛 거리, 커다란 종이에 둘둘 말려 있는 상표 없는 알뜰한 상품들을 파는 정부가 운영하는 상점 앞에서, 아파트 천장에 매달린 장식 없는 전구 앞에서, 그들은 우아함이 없는, 전쟁 후 줄곧 열악했던 느린 세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은 감정이었지만, 결코 그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수를 놓은 블라우스와 증류주를 가져왔고,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 미개발된 나라가 있어서 그들을 이렇게 과거로 데려가줄 수 있기를 바랐다.

178p.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지는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197~198p.
...사랑을 나눈 후, 그녀는 그에게 묵직한 몸을 포갠 채, 자동차들의 소음 속에 반쯤 잠이 들며 이렇게 낮잠을 잤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 어릴 적 이브토의 일요일, 책을 읽다가 어머니의 등에 기대어 잠든 낮잠, 영국에서 오페어로 머물 때 전기난로 옆에서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잤던 낮잠, 팜플로니나의 메종나브 호텔에서의 낮잠. 그녀는 매번 이 달콤한 무감각 상태에서 빠져나와 일어나 숙제를 하고, 거리로 나오고, 일을 하고, 사회적으로 존재해야 했다. 이 순간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두 개의 축이 교차하는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매 순간에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그녀가 보고 들은 것들을 지탱하는 수평선, 또 다른 하나는 몇 개의 이미지가 동반된, 밤을 향해 빠져드는 수직선이다.

213p.
...소비의 경험이 없는 그들은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며, 물질적인 재산에 대한 자제도 분별도 없는 이 집단적인 굶주림의 광경은 우리를 언짢게 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떠올리며 꾸며낸, 순수하고 추상적인 자유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멍에를 쓴>> 민족에 대해 습관처럼 느꼈던 비탄은, 그들이 자유를 쓰는 사용법에 대한 비난 섞인 관찰로 바뀌었다. 우리는 행복과 <<자유로운 세상>>을 가졌다는 우월감을 만끽하기 위해 소시지와 책을 위해 줄을 섰던, 모든 것을 박탈당했던 그들을 더 좋아했다.

225p.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나>>와 <<그녀>> 사이의 선택이다. <<나>> 안에는 너무도 확고부동한 것들, 편협하고 숨 막히는 무언가가 있고, <<그녀>> 안에는 너무 많은 외재성과 거리감이 있다.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책의 모습과 그 책이 남겨야 하는 것은 얼굴 위로 흐르는 빛과 그림자이며, 12살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그 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최근에 ‘삶과 운명‘을 읽으며 그녀가 간직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방법이 아니라면 깨달음, 적어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차에 적신 마들렌처럼 우연이 가져다주는 어떤 신호를 기대하고 있다.

255~256p.
...그녀는 하나씩 차례로 떠다니는 인생의 여러 순간 속의 자신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의식과 그녀의 육체를 사로잡는 낯선 본성의 시간이며, 그녀였던 모든 존재의 형태들이 순식간에 되돌아오는 듯한, 현재와 과거가 뒤섞임 없이 겹쳐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미 가끔씩 느껴 본 적이 있었던 감각으로 — 마약으로 이런 감각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마약을 한 적은 없다. 무엇보다 온전한 정신상태의 쾌락이 최고라고 여긴다 — 이제는 일종의 확장과 지연 속에서 그것을 포착한다. 그녀는 이 감각에 이름을 부여한다. ‘지우고 다시 쓰는 감각‘(palimpseste),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새로 쓰기 위하여 긁어서 지운 수사본>>이므로 완벽히 들어맞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녀는 여기에서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거의 과학적인, 어쩌면 지식으로 쓸 수 있는 — 무엇에 대한 지식인지는 알지 못한다 — 도구를 본다. 1940년부터 오늘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다는 설움에 죄책감마저 더해져 점점 더 그녀를 붙잡는다. 분명 프루스트의 영향이겠지만, 실질적인 경험을 토대로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으므로, 그녀는 이 감각이 시작점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278p.
..뒤섞인 개념 속에서 자신만을 위한 문장,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외치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문장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301p.
..그것은 연속적이고 절대적이며, 삶의 마지막 장면까지 점차 현재를 집어삼키는 반과거 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일시적으로 중단된 흐름, 그러나 그녀의 존재의 실질적인 형체와 사회적인 위치를 포착할 사진과 영화 속 장면들이 군데군데 들어갈 것이다 — 기억의 정지이자 동시에 그녀의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삶의 요소들의 본성, 외부적인 것들(사회적인 경력, 직업) 혹은 내부적인 것들(생각과 동경,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이 아니라, 저마다 하나뿐인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이다. 글 속에서의 <<그녀>>는 거울 속, 사진 속의 끊임없는 타인에 해당될 것이다.
..그녀가 일종의 비개인적인 자서전으로 보는 이 글에는 어떤 <<나>>도 없다 — 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사람들>>과 <<우리>>가 있다 — 마치 이번에는 그녀가 지난날의 서사를 얘기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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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p.
...각각의 당인산 뼈대를 따라 달콤하게, 시큼하게. 그것이 내 본질적 자아의 레시피다. 나는 몽상 속에서도 존과 트루디를 하나로 섞는다—부모가 별거중인 모든 아이가 그러하듯 나는 그들을, 이 기본 쌍을 재결합시켜 내 환경이 게놈에 합치되기를 갈망한다.

30p.
...내 예측이 틀리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그는 이중으로 실패할 것 같다. 어머니는 나약한 그를 계속 경멸할 것이고 그는 필요 이상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그의 방문은 끝나지 않고조금씩 희미해져간다. 그는 공명하는 슬픔의 장을, 상상 속 모습을, 여전히 그의 의자를 차지한 채 실의에 잠긴 홀로그램을 서재에 남긴다.

54p.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한계요 진실은 이것이다—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때, 거기가 아니다....

67~68p.
..오래전 나는 고통이 의식을 낳았다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다. 단순한 생명체는 심각한 손상을 피하기 위해 주관적 순환고리, 즉 감각 경험이라는 채찍과 회초리를 진화시킬 필요가 있다. 머릿속에는 그저 경고의 빨간불만 있는 게 아니라—누가 거기서 그걸 보겠는가?—고통스러운 찌름과 쑤심, 욱신거림도 있다. 역경은 우리에게 의식을 강요했고, 우리가 불에 너무 가까이 갈 때, 무리하게 사랑할 때 그 의식이란 것이 작동해 우리를 깨문다. 그렇게 경험된 감각들은 자아 창조의 시작점이다....

104p.
...므시외 바르트가 말하기를, 권태는 희열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고 인간은 기쁨의 해안에서 권태를 바라본다. 바로 그렇다. 현대 태아의 상태. 생각해보라. 태아가 하는 일이라곤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뿐이고, 성장도 의식적인 행위라고 하긴 어렵다. 순수한 존재의 기쁨, 별다르지 않은 나날의 지루함, 연장된 희열은 곧 실존적 권태다. 여기 갇힌 시간이 감옥살이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여기서 고독의 특권과 사치를 누려야 한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말하지만 나는 영원히 이어지는 오르가슴을 떠올린다—그 절정의 영역에 권태가 기다리고 있다.

193p.
...생물학은 운명이고, 운명은 숫자로 표시되며, 이 경우 이진법이다. 절망적일 정도로 단순했다. 모든 출생의 핵심에 있는 이상한 필수 요건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이것이냐—저것이냐. 그외에는 없다. 눈부신 출생의 순간 아무도 사람이다!라고 외치지 않는다. 딸이다, 아들이다, 라고 외친다....

260p.
...내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이 뒤에서 탯줄이 풀린다. 나는 앞으로, 밖으로 나아간다. 냉혹한 자연의 힘이 나를 찌부러뜨리려 한다. 내가 지나는 곳은 삼촌의 일부가 반대쪽에서 너무도 자주 드나들었던 그 구간이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그의 날에 질이었던 것이 지금은 자랑스러운 산도, 나의 파나마운하고 나는 그보다 훨씬 크다. 아주 오래된 정보라는 화물을 싣고 위엄 있게 천천히 나아가는 위풍당당한 유전자의 배다. 뜨내기 남근과는 비교가 안 된다. 한동안 나는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고 온몸이 쑤신다. 하지만 지금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내 어머니다. 모든 어머니처럼 머리 크고 시끄러운 아기를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비명을 지르는 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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