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p.
...게다가 나는 지난번 그 사건 이후 어둠이라는 것에 매우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정말이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한순간에 눈을 잃는다든가 해서 빛의 존재를 잊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순식간에 모든 ‘형태‘에 화해가 성립된다. 삼각 빵도, 둥근 빵도 요컨대 ‘빵은 빵이다‘라는 것을 만인이 납득한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 여자아이도 눈을 감은 채 내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랬다면 우리는 함께 놀이공원으로 가서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설픈 빛 때문에 아이는 삼각 빵을 빵이 아니라 삼각형으로 잘못 인식해버린다. 빛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투명하다 하더라도 비추는 대상을 모조리 불투명하게 바꿔버리는 것 같다.

16p.
...육체를 옷으로 덮은 것이 문명의 진보라면, 앞으로 복면이 상식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까지도 중요한 의식이나 축제 같은 데서 종종 실제로 사용되어 왔다. 제대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복면은 타인과의 관계를 맨얼굴일 때 이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주는 것은 아닐까.

82~83p.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에 관한 소설은 흥미롭다. 보통 괴물이 접시를 깨면 그것은 괴물의 파괴 본능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이 작가는 반대로 접시가 깨지기 쉬운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괴물로서는 단지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뿐이었는데 희생자의 나약함이 어쩔 수 없이 그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깨지는 것, 부서지는 것, 타버리는 것, 피를 흘리는 것, 숨이 끊기는 것......이러한 모든 행위가 존재하는 한, 괴물은 그 모든 것을 끝없이 계속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애초에 괴물의 행위에 발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희생자들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104~105p.
...맨얼굴이 아니라고 해서 가면을 복면 취급하는 것은 흰 것을 검다고 싸잡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면을 통로의 확대라고 한다면 복면은 통로의 차단이고 오히려 대립적인 관계다. 그것도 아니면 복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이렇게 가면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나 자신은 너무나도 우스꽝스런 광대가 되어버린다.
..덧붙여서 한 가지 지금 막 떠오른 것을 써둔다면, 가면은 오로지 피해자에게 필요하고 복면은 반대로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167p.
...미래라는 것은 항상 과거의 연산(演算)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나서 아직 스물네 시간밖에 살지 않은 가면에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행동 예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인간의 사회적 방정식이라 함은 요컨대 연령의 함수 그 자체이며 한 살 난 가면이 지니는 가능성은 실로 갓난아이와 같이 너무나 자유로웠다.

180p.
..나는 문득 그 거실의 불빛에 질투 같은 것을 느꼈다. 누군가 손님이 와서 나 대신 그곳을 점령하고 있을는지 모른다는 식의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는 여느 때처럼 변함없이 거실이 있고 날이 저물면 불이 켜진다는 그 사실 자체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여느 때라면 그 불빛 아래에서 식사를 기다리며 석간신문을 보고 있을 내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창밖을 서성이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이 너무나 부당하여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그 빛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태연자약한 거실의 불빛...... 마치 당신과 꼭 닮았다.......

195~196p.
..그 소리들을 합산해보면 이 감옥의 거대함은 아무래도 예삿일은 아닌 것 같다.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다. 그들의 죄명이 얼굴을 잃은 죄, 타인과의 통로를 차단한 죄, 타인의 슬픔이나 즐거움에 대해 이해를 잃은 죄, 타인 속에 있는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두려움과 즐거움을 잃은 죄, 타인을 위해 창조할 의무를 잊은 죄, 같이 들을 음악을 잃어버린 죄, 그러한 현대의 인간관계 그 자체를 나타낸 죄인 이상, 이 세계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라는 섬을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갇힌 몸이라는 점에는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다. 또 그들이 영혼의 얼굴밖에 잃지 않은 데 비해, 나는 생리적으로까지 잃어버렸기 때문에 유폐되었다는 그 정도에도 자연히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희망이 느껴진다. 혼자 생매장당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상황에서는 확실히 뭔가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이 있다. 가면 없이는 노래할 수도 없고, 적과 싸울 수도 없으며, 치한이 될 수도 없고, 꿈을 꿀 수도 없다는 어중간한 부담감이 나 한 사람의 죄상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통 화제가 되어준 탓일까. 그럴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분명 그러한 것임에 틀림없다.

220~221p.
...개인은 죽음에 대해서 항상 피해자이지만 완벽한 집단에 있어서 죽음은 단지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한 집단이란 근본적으로 가해자적 성격을 띤다. 완벽한 집단의 예로서 군대를, 완벽한 익명의 예로서 군사를 각각 예를 든다면 우선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보면 내 공상에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군대 제복 자체를 모살죄와 같은 것으로 판정할 수 없는 법정이 왜 똑같은 가면을 뒤집어쓴 우익집단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엄격한 태도를 취할까. 국가가 가면을 질서에 배반하는 악이라고 보았다기보다, 의외로 국가 자신이 하나의 거대한 가면이며, 내부에 다른 가면이 중복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해가 없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라는 셈이되겠는데.......

253~254p.
...당신과 가면이 짜고 짓부수어버린 그 금기의 성채의 뚫어진 틈으로 당신의 불결함을 들여다본다는 식으로밖에 당신과의 관계가 용납되지 않는다면, 좋다, 평생 동안이라도 들여다볼 용의는 있다. 그리고 복수는 그러한 도착상태의 지속 그 자체로서 충분히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나의 분열에 맞추어서라도 당신 자신도 또 같은 분열을 끝도 없이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까...... 사랑도 증오도 아니다....... 가면도 맨얼굴도 아니다....... 오직 농밀한 회색 속에서 아무래도 나는 일종의 균형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75~276p.
...가면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무장해제나 다름없다. 아니 그것으로 당신을 대등한 장소로까지 끌어내릴 수가 있다면 무장해제해도 좋다. 그러나 이 차감정산은 비율이 너무 좋지 않다. 아무리 당신의 위선을 벗겨낸다 하더라도 당신의 가면은 천 장이나 겹쳐져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가면이 나타나는데, 내 가면은 한 장뿐이어서 그 뒤에는 평범한 맨얼굴 한 장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283p.
..그때 가장 격려가 되어준 것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비상계단 그늘에서 혼자 가만히 요요를 하고 있는 그 딸아이를 쳐다보는 일이었다. 자신의 불행을 명확히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불행을 짊어진 이 어린아이는 그러나 불행에 고뇌하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보다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아마도 그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자세가 저 직관을 기르게 되었을 것이다. 나도 저 어린아이처럼 잃는 것에 대해 견뎌내고 싶다.

312p.
.."전쟁, 아직 당분간은 일어날 것 같지 않지."
..그러나 그 아가씨의 어투에는 타인을 원망하는 듯한 투는 추호도 없다. 특별히 상처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꺼낸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전쟁이 일어나면 한꺼번에 사물의 가치기준이 전복되고, 얼굴보다도 위장이, 외형보다도 생명 그 자체가 훨씬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될 터라고 소박한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320p.
...물론 이것이 가면만의 책임은 아니고, 문제는 차라리 나의 내부에 있다는 것쯤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그 내부는 뭐 반드시 나 혼자만의 내부는 아니고 모든 타인에게 공통되어 있는 내부이기 때문에, 나 혼자서 그 문제를 짊어질 리는 없다....... 아무렴,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사양하겠다....... 나는 인간을 미워할 테다....... 누구라도 변명할 필요 같은 거, 일체 인정할 것 같은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그러나 앞으로는 결코 쓴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쓴다는 행위는 아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경우에만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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