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젊었을 적에 가정했던 만약의 규모는 더욱 컸다. ‘이렇게 안 했더라면 내 인생이 싹 달라졌을 텐데‘ 하고 인생을 좌우하는 가정만 했다. 하지만 살아가는 시간이 늘면서 ‘만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자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 줄었다. 지금 가정하는 것은 ‘체육관에 다니지 않았거나 러닝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정도이며, 그것은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나를 적극 긍정하기 위한 가정이다. ..이럴 때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체력은 돈과 같지 않을까. 흔히 큰 부자가 되면 돈을 쓰는 데 인색해진다고들 하지 않는가. 가득 채워져 있으면 쓰고 싶어지는 게 아니라 쓰고 싶어지지 않나 보다. 그것과 마찬가지지 않을까? 젊을 적에는 남아도는 체력을 어쨌거나 소중히 아껴두고 싶다. 아까워서 도무지 쓸 수가 없다. ..하지만 돈과 달리 쓰지 않아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줄어 있다. 자꾸만 줄어간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아, 쓰지 않으면 줄어드는구나. 그래서 다급히 사용하기 시작한다.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하기 시작한다.
..삶은 분명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일이지만 경험을 통해 현명해진다기보다 경험함으로써 ‘자제하지 않아도 무탈하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요리를 오래 하다 보면 어느 과정을 생략해도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건 결점을 없애려 들기보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결점이 얼굴을 드러낸 오랜 친구들은 다들 하나같이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목소리가 크든 아무리 제멋대로 굴든 아무리 자기애가 강하든 미워할 수가 없다. 더구나 그런 부분이 그 사람의 본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흔이 넘어서도 목청을 한껏 높여서는 "나야 잘 알지"라고 자꾸만 말하는 것이, 예순이 지나서도 "주문한 와인이 너무 늦는데 어떻게 말 좀 해봐"라고 5분에 한 번꼴로 재촉하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 ‘미워할 수 없는 마법‘ 덕분에 그들은 이렇게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들의 매력적인 단점을 무럭무럭 키워나가고 있다. ..3월에 또다시 한 살을 더 먹은 나도 앞으로 점점 자제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나가게 될 것이다. 자신의 결점이 이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다. 결점을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다. 그러니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삶을 깨우치거나 현명해지려는 것보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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