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p.
..다만 나는 유감스러운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태연한 척했지만, 끝내 태연할 수 없었던 거짓말이, 유감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리가 없다. 분명, 이럴 리가 없다. 작가란 「한심함」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임을, 당신은, 더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46p.
..『사람은 평생, 동일한 수준의 작품밖에 쓰지 못한다.』 장 콕토Jean Cocteau가 했던 말로 기억한다. 오늘의 나 또한, 이 말을 구실로 삼는다. 한 편 더 보여 주시오, 딱 한 편만 더 보여 주시오, 떠들썩한 시장의 외침에 나는 대답한다. 『똑같소. —멍석을 깔아 주시오. —마음에 들 것이오. —그리워지면 찾아오시오. 나는 봉투 안에서 견본 일곱 편을 꺼내, 다시 한 번 보여주면 그만이오. 나는 그 일곱 편에 들이부은 내 피와 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소. 보면 알 것이오. 이미 벌써 나에게는 선택받을 자격이 있소.』 사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지?

48p.
..그렇지만, 어느 날 문득,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봤더니, 웬걸, 이 문장은 참으로 평범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 후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문학에 있어서 「난해함」은 있을 수 없다. 「난해함」은 「자연」 안에만 있는 것이다. 문학이란, 그 난해한 자연을, 각각 자기 스타일의 각도에서 데꺽 자르(는 척 하)고, 그 절단면의 깨끗함을 뽐내는 행위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79~80p.
..배니티vanity. 그 강인함을 얕봐서는 안 된다. 허영은, 어디에나 있다. 절 안에도 있다. 감옥 안에도 있다. 무덤에도 있다.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 똑바로 뒤돌아서서, 자신의 배니티를 마주하고 이야기해 보는 게 좋다. 나는, 타인의 허영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자신의 배니티를 거울에 비추어 잘 살펴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살펴본, 결과는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말할 필요 없다. 그러나, 한 번은, 똑똑히, 거울 앞에 서서 확인해 둘 필요는, 있다. 한번 본 사람은, 그 사람은,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겸손해질 것이다. 신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168~169p.
..사정이 그러하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할 말이, 하나도 없다. 딱 하나, 좁쌀만 한 프라이드가 있다고, 조금 전에 썼는데, 그것도 지금은 지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쓸데없는 고생은, 자랑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지푸라기 한 가닥에 매달리는 기분으로, 여태껏 어리석은 고생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한다. 만약 할 말이 있다면, 단 하나, 그것뿐이다. 나는 이런 쓸데없는 고생을 하고도, 그러고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므로, 적어도 여러분만이라도, 자중하여 이런 바보짓은 하지 말라는 지극히 소극적이고 무력한 충고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등대가 도도하게 밝은 빛을 내뿜는 것은, 등대가 자기를 뽐내기 위함이 아니라, 여기는 위험한 곳이니 다가오면 안 된다는 충고의 의미인 것이다.

199~200p.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의 구별을, 필자는, 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덕적 능력」이라고나 할까, 그걸 아직까지 터득하지 못한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있다. 진정, 말하고 싶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네, 결국에는 자네의 자기변호가 아닌가.』

200~201p.
...친구 사이에서는, 내 이름은, 「곰손」으로 통한다. 쓰다듬어 위로해 준답시고, 할퀸다....

217~218p.
..그러나 나는, 여기를 떠나, 다른 고장으로 갈 생각은 없다. 어딜 가든, 마찬가지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틀려먹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플로베르의 한탄인데, 『나는 언제나 눈앞에 있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어린아이를 보면, 그 아이가 노인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고, 요람을 보면 묘비를 생각한다. 여자의 알몸을 보는 동안, 그 해골을 공상한다. 즐거운 것을 보면 슬퍼지고, 슬픈 것을 보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나 마음속으로 울어서, 밖으로 눈물을 흘릴 수가 없다』는 둥 말하면, 좀 야단스럽고, 중학생의 센티멘털한 악취미를 드러내는 셈이 되어 버리지만, 내가 여행을 하면서 풍경에도 인정에도, 별로 감동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은, 그 고장의 사람들의 삶을, 곧바로, 알아채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분위기 깰 정도로, 아등바등 산다. 시냇가 외딴 찻집에도, 조상 몇 대에 걸친 암투가 있을 것이다. 찻집 걸상 하나 새로 만드는 데에도, 한 집안의 남다른 각오가 있었을 것이다. 하루 매상이, 어떻게 집안사람들에게 분배되고, 일희일비가 되풀이될 것인가. 풍경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산에 나무 한 그루, 시냇가 돌멩이 하나가 전부 생활과 직접 이어져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풍경은 없다. 일용할 양식이 보일 뿐이다.

248p.
...의심하다 실패하는 것만큼 추한 삶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믿습니다. 한 치 벌레한테도, 다섯 푼 진심이 있습니다. 억지로 웃어서는, 안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믿는 자만이, 근심이 없습니다. 저는 문학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믿어서 성공할 겁니다. 부디 안심하시길.

262p.
..『요즘 나는, 사람을 너무 막다른 곳에 몰아세우지 않으려고 하네. 도망칠 구멍을 하나, 만들어 주지 않으면—』하고, 앞서 말한 그 눈을 껌벅거리면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요즘, 이부세 씨는, 남의 아픈 곳을 그다지 건드리지 않으려 하시는 것 같다.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어서, 오히려,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부세 씨를 보고, 이부세 씨를 물러 터졌구만, 하고 얕봤다간,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280p.
..거참, 모두들, 아름다운 말을 너무 많이 쓰십니다. 미사여구를 남용하는 감이 있습니다. 모리 오가이가 멋진 말을 했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효모를 홀짝거리지는 말 것.』
..고로, 나는 좋아하는 말이 없다.

329p.
..나의 현재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좋은 친구를 원해 마지않지만, 아무도 나와 어울려 주지 않기에, 자연히 「고저」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건, 그건 거짓말이고, 나는 내 나름대로 「패거리」의 괴로움이 예감되어, 차라리 「고저」를 택하는 편이, 물론 그것도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차라리 「고저」한 쪽에서 사는 편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되어, 애써 사교활동을 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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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p.
..이런 맥락에서 사치는 막연한 도덕적 악이 아니라 주요한 ‘정치적 악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당시 유럽 사회는 "이성, 최고의 효율성, 자기 계발, 물질주의적 개인"이라는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근대라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사치는 부패, 무정부 상태, 여성적인 것 혹은 전제정치와 동일시되거나 그러한 것을 동반하는 사회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지배층이란 모름지기 그런 악덕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영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존 칼 플뤼겔John Carl Flügel, 1884~1955이 명명한 바 있는 ‘위대한 남성적 금욕Great Masculine Renunciation‘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사치의 상징인 호화로운 옷을 입는 여성은 자연히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2등 시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도에서 보자면 여성들을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52p.
..1899년 베블런은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을 통해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이 힘 있는 자들에게 소유되면서 트로피처럼 간주되었다고 전제했다. 근대 세계에서는 그처럼 명백하게 남성의 노예로 취급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여성의 신분이란 결혼으로 인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 소비사회는 여성을 남성이 생산하는 물건에 대한 ‘의례적 소비자Ceremonial Consumer‘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제 여성은 자신의 직업이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부유한 남성의 부인으로서 ‘과시적‘으로 소비해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계층을 구별 짓는 행위가 되었다는 말이다. 고대 노예와는 달리 근대 여성에게는 ‘소비하는 일‘이 허락되었지만, 그 소비는 언제나 대리적代理的, Vicarious일 뿐 여성의 본질이 될 수는 없었다....

62p.
..유럽의 엘리트들은 도자기 같은 중국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중국 문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역사학자 안토니 파그덴Anthony Pagden은 타문화권의 물건을 애호하는 현상이 타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던 중국도자기의 물질적 가치 뒤에는 중국 문화가 표상하는 ‘상징가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중국도자기를 사들이는 일은 말콤 워터스Malcolm Waters의 주장처럼 "단순히 물질가치만이 아니라 상징가치의 형태로 소비"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68~69p.
..유럽이 원하던 도자기는 형태며 크기가 전통적인 중국도자기와는 달라서 별도의 가마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63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중국도자 주문서에는 겨자를 담는 단지며 촛대 등 네덜란드의 식탁용 그릇과 장식품 들이 기재되어 있다. 1777년의 주문서는 매우 구체적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려진 접시, 넵튠Neptune이 그려진 초콜릿 컵, 파슬리가 장식된 팔각형 컵받침, 버찌 따는 사람이 그려진 과일 바구니처럼 지극히 유럽적인 양식의 도자기를 주문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문서가 아무리 구체적이었다 할지라도 다른 문화권의 생산자에게는 주문 사항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또한 이미지의 물질화란 전혀 다른 문화권을 거치는 동안 왜곡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전체의 과정, 즉 미지의 먼 곳에 사는 소비자의 취향을 염두에 두고 물건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전파나 인적 교류뿐 아니라 그 과정에 스며 있는 상상력을 통해 두 세계가 연결되었다. 도자기라는 물건을 통해 보이지 않는 상상의 네트워크가 글로벌한 차원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112p.
..돌팔이 의사에게는 다분히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었다. 마술이나 점을 치는 행위도 그렇지만 마치 샤먼과 흡사한 태도와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돌팔이의 세계는 마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스런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 이들은 의사보다는 약제사에 가까웠고, 약제사보다는 연금술사에 가까웠다. 이들은 또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관심을 적극 이용했다. 오스만튀르크나 러시아 혹은 다른 나라의 복장을 하거나, 아예 영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을 내세워 알 수 없는 외국어를 지껄이게 했다. 그런 경우에는 ‘바커Barker‘라 불린 사람이 나서서 대신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117p.
...특효약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질병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없던 병도 갑자기 생겨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영국 의회의 특별위원회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특허약 광고의 핵심은 "광고를 읽는 순간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 특별한 병의 징후처럼 느끼게 하는데" 있었다.

187p.
..베블런은 이처럼 경쟁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습관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산업적으로 발달한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정생활에 관해 공개하지 않으려는 배타성이 생겨난다. 그 사회의 정점에 있는 상류층 사이에는 프라이버시 개념과 과묵의 습관이 필수적인 예법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서두에서 언급한, 집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친구들이 모르게 하라는 금지령은 노동계급 나름의 프라이버시 예법일 수 있었다.

199p.
..어떤 학자는 수집 행위를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사물 속으로 은거하는 행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수집 행위는 개인이라는 주체의 고양과 혼자만의 기쁨을 만끽하는 궁극적인 순간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255~256p.
..백화점 관계자에게 왜 노인 전문관이 없느냐고 문의했더니 대답은 두 가지로 돌아왔다. 우선, 노인은 자신이 노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심리가 강하기 때문에 노인 전용 상품관을 만들어봤자 손님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대답은 좀 더 흥미로운데, 주로 의류 쇼핑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구입해온 브랜드의 옷을 계속 입기 때문에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굳이 노인용 전문 브랜드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40대 후반이 되어서도 어릴 적 입던 영 캐주얼 브랜드를 계속 입으려 하고, 70대 할머니도 오랫동안 단골로 다닌 ‘여성 정장‘ 섹션의 브랜드에 지속적인 충성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브랜드는 고객과 함께 늙어가는 셈이다.

323p.
..상품으로 채워진 수정궁은 그야말로 거대한 박물관이자 시장이었다. 나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스펙터클한 새로운 물질세계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만들어졌지만 난생 처음 보는 물건들과 지구 저 먼 곳으로부터 가져온 다양하고 신기한 상품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 엄청난 가짓수와 규모는 상품 각각의 쓰임새와는 별도로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상품이라는 것 자체를 ‘새로운 근대적인 기호‘로 각인시켰다. 비록 관람하는 시간은 달라도 수정궁에서는 왕족부터 노동자까지 모두 같은 상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토머스 리처즈Thomas Richards, 1878~1962의 말처럼 그 경험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진귀하고 고급스런 물건들 하나하나가 언젠가는 누구나의 손에 평등하게 쥐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했던 것이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소비자‘라는 새로운, 하나의 집단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340p.
..카탈로그는 이 세상에 어떤 물건들이 팔리고 있는지를 소비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카탈로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 안에 담긴 상품은 무엇이든 원한다면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상품들 하나하나를 ‘공부‘하는 동안 사람들은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성장사회‘의 특성이 소비의 영역에 투영된 결과물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성장사회를 재화를 생산하는 사회이기 이전에 특권을 생산하는 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빈곤을 수반하지 않는 특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의 진보가 성장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권 계급, 즉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필요성이 곧 성장을 생산해낸다는 통찰이다. 결국 성장사회의 지속은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끊임없이 불평등 구조가 재생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소비라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학습되며 실행되는 것이다.

373p.
..18세기 후반 영국의 설탕거부운동은 윤리적 소비의 역사적 출발점이었다. 오늘날에는 ‘착한 소비‘ 운동처럼 소비 행위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의식을 투영하는 경향이 범세계적으로 뚜렷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윤리적 소비는 그 자체가 ‘빅 비즈니스‘가 되어가는 측면이 있다. 다른 빅 비즈니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문제가 되었던 비윤리적인 요소를 제거했다는 이유만으로 대안적 생산방식이 미화되기도 하고, 정치적 이유를 앞세워 그 이면에 놓인 문제들이 은폐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의 윤리적 소비운동인 설탕거부운동에 동인도제도산 설탕이 불러온 반전은 눈여겨봐야 한다. 정치성을 필수조건으로 삼는 윤리적 소비운동이 왜 반드시 정치성과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이기 때문이다.

434p.
...한 경제학자는 사회적 진보란 "사치품이 편의품으로, 편의품이 필수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일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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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p.
..그는 결코 비밀을 엽서 따위에 적어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거나 술김에 친구에게 털어놓거나 종교에 기대어 고해성사를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비밀은 비밀인 채로, 그만의 것으로 남았다.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결국 자신 뿐이라는 사실이. 엽서를 보낸 사람도 아마 그런 두려움 때문에 비밀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는 엽서에 비밀을 적어 보낸 사람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이 세상에 자신과 비밀이 같은 사람이 있고 그가 뭔가 털어놓고 싶어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에 화가 났다. 이제껏 비밀을 담은 엽서가 그를 외롭지 않게 해줬다면 앞으로는 비밀의 동조자 때문에, 비밀의 유일성이 깨진 것 때문에 두고두고 외로울 것 같았다.

218p.
...가족 가운데 누구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윤희는 반드시 필요한 말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 생겨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윤희의 가슴 밑바닥에는 발설되지 못한 말들이 하역된 채 녹슬었다....

222p.
...가능하다면나는 단번에 노인이 되고 싶었다. 노인이 겪었을 삶은 생략한 채 우아하고 세련되게 단번에 늙어서 감히 나를 어쩌지 못한 이 험난한 세상을 부드럽게 조롱하다 죽고 싶었다.

246p.
..말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여행자인 그녀와 나는 이쪽에 있고, 여행지의 풍경과 사람들이 저쪽에 있다. 이쪽과 저쪽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유리막 같은 게 있다. 우리는 유리막 저편의 세계를 구경하고 저편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수수료를 받는다. 여행이든 관광이든, 우리가 그 풍경 속에서 살아간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중간에 하루오가 슥 들어와 양쪽의 경계를 흩트려놓는다. 유리막 같은 것이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바깥의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그런 것이다.

302p.
...돈을 벌고, 또 돈을 쓰는 일이 왜 이다지도 피로하고, 고단하고, 외로운 일일까 생각하면요, 그냥, 자꾸만 모든 게 다 의심스러워져요. 결국에는 꿈꾸지만 않으면 되었던 것을요. 꿈을 가져서, 나는 어느 순간 거대한 맨홀 아래로 빠져버린 기분이에요. 맨홀 뚜껑을 들어올려주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은 결코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게 아녜요.
..그럼요?
..손을 벌리죠.

328p.
...어쩔 수 없다는 건 언제나 한계를 마주하는 일이었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도망칠 데가 없다는 의미였고, 도망쳐서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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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p.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관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를 인연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43p.
..호불호와는 별개로 마음에 맞는 장소가 있다. 그러한 장소에 방문해서야 호불호와 마음에 맞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감각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친구와의 관계나 연인 관계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139p.
..그렇게 나는 알게 되었다. 도시의 일상이 여행자에게 있어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자신이 그곳에 속해있지 않다는 사실을, 며칠 동안이지만 내 생활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사람이 사는 도시 하나하나가 그걸 실감하게 했다.

204p.
..뚜벅뚜벅 길을 걸으며 매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요소가 전혀 없는 미지의 장소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항상 신기한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말이다. 이곳도 나에게 용건이 없고 나도 이곳에 용건이 없다. 보통의 여행이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것만 같은 장소이다.

233~234p.
..이번에는 1박 2일이었는데, 시간이 여유로운 편이어서 취재와 촬영을 마친 후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알아‘라는 감각이 내 안에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플한 영상을 보고 생각한 ‘아는 경치‘와 처음으로 쇼도시마에서 실제로 보고 ‘아는 경치‘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봤다‘라는 의식을 하지 않았는데도 대단히 강하게 마음속에 남아있기에 ‘아는 경치‘이다.
..마지막 ‘알아‘가 가장 기묘하다. 예를 들면 국도변에 드문드문 있는 상점 중 한 곳, 굳게 닫힌 유리문 저편에 보이는 손수 만든 낡은 인형이나 플라스틱 컵, 헌 스웨터 등 맥락 없는 물건들이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다. 무슨 가게인지 알 수 없는 그곳의 광경을 본 기억이 없는데, 그것을 보고 ‘알아‘라고 느낀다. 그 광경에서 멀리 왔었다는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움으로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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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p.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는 엄살이었던 거고, 앞으로는 실제로 가난해질 확률이 너무나 높지. 그게 무서워."
..나는 우리가 느끼고 있는 빈곤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것은 과도한 징징거림일 수도 있고, 지극히 냉철한 현실 인식일 수도 있다.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사회가 안내하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지를 가지고 돌파해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고, 성장이 끝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체념하고 적응해야 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이 삶의 전반에서 부조화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제적인 형편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 앞에 준비된 명쾌한 조언이 있다. 분수에 맞게 살라.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에 취해 있는 우리들은 삶의 곳곳에 놓인 풍요의 파편들을 맛보며 살아간다.

71p.
..이 세계의 질서가 돈 많은 이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릴 때가 있다. 오롯이 부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애초부터 격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뒤섞인 채 정확히 돈을 낸 만큼의 서비스를 받는 공항처럼 적나라하게 계급을 인식시키는 장소도 드물다.

72p.
..키스 페인은 사람들이 실제적 가난보다 가난하다는 느낌을 더욱 참을 수 없어 하며, 이 느낌이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성급하게 선택하도록 부추긴다고 말한다....

73p.
..사회에서의 계층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공항이라는 위성 도시에서만큼은 부지런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한다. 긴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패스트 트랙에 서고, 라운지에 준비되어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음식들을 먹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쿵, 하고 닿는 순간 우리는 빠르게 현실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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