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p.
..그는 결코 비밀을 엽서 따위에 적어 모르는 사람에게 보내거나 술김에 친구에게 털어놓거나 종교에 기대어 고해성사를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비밀은 비밀인 채로, 그만의 것으로 남았다.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결국 자신 뿐이라는 사실이. 엽서를 보낸 사람도 아마 그런 두려움 때문에 비밀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는 엽서에 비밀을 적어 보낸 사람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이 세상에 자신과 비밀이 같은 사람이 있고 그가 뭔가 털어놓고 싶어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에 화가 났다. 이제껏 비밀을 담은 엽서가 그를 외롭지 않게 해줬다면 앞으로는 비밀의 동조자 때문에, 비밀의 유일성이 깨진 것 때문에 두고두고 외로울 것 같았다.

218p.
...가족 가운데 누구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윤희는 반드시 필요한 말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 생겨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윤희의 가슴 밑바닥에는 발설되지 못한 말들이 하역된 채 녹슬었다....

222p.
...가능하다면나는 단번에 노인이 되고 싶었다. 노인이 겪었을 삶은 생략한 채 우아하고 세련되게 단번에 늙어서 감히 나를 어쩌지 못한 이 험난한 세상을 부드럽게 조롱하다 죽고 싶었다.

246p.
..말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여행자인 그녀와 나는 이쪽에 있고, 여행지의 풍경과 사람들이 저쪽에 있다. 이쪽과 저쪽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유리막 같은 게 있다. 우리는 유리막 저편의 세계를 구경하고 저편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수수료를 받는다. 여행이든 관광이든, 우리가 그 풍경 속에서 살아간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중간에 하루오가 슥 들어와 양쪽의 경계를 흩트려놓는다. 유리막 같은 것이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바깥의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그런 것이다.

302p.
...돈을 벌고, 또 돈을 쓰는 일이 왜 이다지도 피로하고, 고단하고, 외로운 일일까 생각하면요, 그냥, 자꾸만 모든 게 다 의심스러워져요. 결국에는 꿈꾸지만 않으면 되었던 것을요. 꿈을 가져서, 나는 어느 순간 거대한 맨홀 아래로 빠져버린 기분이에요. 맨홀 뚜껑을 들어올려주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은 결코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게 아녜요.
..그럼요?
..손을 벌리죠.

328p.
...어쩔 수 없다는 건 언제나 한계를 마주하는 일이었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도망칠 데가 없다는 의미였고, 도망쳐서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