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p.
..이런 맥락에서 사치는 막연한 도덕적 악이 아니라 주요한 ‘정치적 악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당시 유럽 사회는 "이성, 최고의 효율성, 자기 계발, 물질주의적 개인"이라는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근대라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사치는 부패, 무정부 상태, 여성적인 것 혹은 전제정치와 동일시되거나 그러한 것을 동반하는 사회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지배층이란 모름지기 그런 악덕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영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존 칼 플뤼겔John Carl Flügel, 1884~1955이 명명한 바 있는 ‘위대한 남성적 금욕Great Masculine Renunciation‘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사치의 상징인 호화로운 옷을 입는 여성은 자연히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2등 시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도에서 보자면 여성들을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52p.
..1899년 베블런은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을 통해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이 힘 있는 자들에게 소유되면서 트로피처럼 간주되었다고 전제했다. 근대 세계에서는 그처럼 명백하게 남성의 노예로 취급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여성의 신분이란 결혼으로 인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 소비사회는 여성을 남성이 생산하는 물건에 대한 ‘의례적 소비자Ceremonial Consumer‘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제 여성은 자신의 직업이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부유한 남성의 부인으로서 ‘과시적‘으로 소비해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계층을 구별 짓는 행위가 되었다는 말이다. 고대 노예와는 달리 근대 여성에게는 ‘소비하는 일‘이 허락되었지만, 그 소비는 언제나 대리적代理的, Vicarious일 뿐 여성의 본질이 될 수는 없었다....

62p.
..유럽의 엘리트들은 도자기 같은 중국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중국 문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역사학자 안토니 파그덴Anthony Pagden은 타문화권의 물건을 애호하는 현상이 타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던 중국도자기의 물질적 가치 뒤에는 중국 문화가 표상하는 ‘상징가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중국도자기를 사들이는 일은 말콤 워터스Malcolm Waters의 주장처럼 "단순히 물질가치만이 아니라 상징가치의 형태로 소비"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68~69p.
..유럽이 원하던 도자기는 형태며 크기가 전통적인 중국도자기와는 달라서 별도의 가마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63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중국도자 주문서에는 겨자를 담는 단지며 촛대 등 네덜란드의 식탁용 그릇과 장식품 들이 기재되어 있다. 1777년의 주문서는 매우 구체적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려진 접시, 넵튠Neptune이 그려진 초콜릿 컵, 파슬리가 장식된 팔각형 컵받침, 버찌 따는 사람이 그려진 과일 바구니처럼 지극히 유럽적인 양식의 도자기를 주문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문서가 아무리 구체적이었다 할지라도 다른 문화권의 생산자에게는 주문 사항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또한 이미지의 물질화란 전혀 다른 문화권을 거치는 동안 왜곡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전체의 과정, 즉 미지의 먼 곳에 사는 소비자의 취향을 염두에 두고 물건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전파나 인적 교류뿐 아니라 그 과정에 스며 있는 상상력을 통해 두 세계가 연결되었다. 도자기라는 물건을 통해 보이지 않는 상상의 네트워크가 글로벌한 차원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112p.
..돌팔이 의사에게는 다분히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었다. 마술이나 점을 치는 행위도 그렇지만 마치 샤먼과 흡사한 태도와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돌팔이의 세계는 마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스런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 이들은 의사보다는 약제사에 가까웠고, 약제사보다는 연금술사에 가까웠다. 이들은 또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관심을 적극 이용했다. 오스만튀르크나 러시아 혹은 다른 나라의 복장을 하거나, 아예 영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을 내세워 알 수 없는 외국어를 지껄이게 했다. 그런 경우에는 ‘바커Barker‘라 불린 사람이 나서서 대신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117p.
...특효약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질병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없던 병도 갑자기 생겨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영국 의회의 특별위원회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특허약 광고의 핵심은 "광고를 읽는 순간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 특별한 병의 징후처럼 느끼게 하는데" 있었다.

187p.
..베블런은 이처럼 경쟁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습관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산업적으로 발달한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정생활에 관해 공개하지 않으려는 배타성이 생겨난다. 그 사회의 정점에 있는 상류층 사이에는 프라이버시 개념과 과묵의 습관이 필수적인 예법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서두에서 언급한, 집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친구들이 모르게 하라는 금지령은 노동계급 나름의 프라이버시 예법일 수 있었다.

199p.
..어떤 학자는 수집 행위를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사물 속으로 은거하는 행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수집 행위는 개인이라는 주체의 고양과 혼자만의 기쁨을 만끽하는 궁극적인 순간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255~256p.
..백화점 관계자에게 왜 노인 전문관이 없느냐고 문의했더니 대답은 두 가지로 돌아왔다. 우선, 노인은 자신이 노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심리가 강하기 때문에 노인 전용 상품관을 만들어봤자 손님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대답은 좀 더 흥미로운데, 주로 의류 쇼핑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구입해온 브랜드의 옷을 계속 입기 때문에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굳이 노인용 전문 브랜드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40대 후반이 되어서도 어릴 적 입던 영 캐주얼 브랜드를 계속 입으려 하고, 70대 할머니도 오랫동안 단골로 다닌 ‘여성 정장‘ 섹션의 브랜드에 지속적인 충성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브랜드는 고객과 함께 늙어가는 셈이다.

323p.
..상품으로 채워진 수정궁은 그야말로 거대한 박물관이자 시장이었다. 나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스펙터클한 새로운 물질세계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만들어졌지만 난생 처음 보는 물건들과 지구 저 먼 곳으로부터 가져온 다양하고 신기한 상품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 엄청난 가짓수와 규모는 상품 각각의 쓰임새와는 별도로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상품이라는 것 자체를 ‘새로운 근대적인 기호‘로 각인시켰다. 비록 관람하는 시간은 달라도 수정궁에서는 왕족부터 노동자까지 모두 같은 상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역사학자 토머스 리처즈Thomas Richards, 1878~1962의 말처럼 그 경험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진귀하고 고급스런 물건들 하나하나가 언젠가는 누구나의 손에 평등하게 쥐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했던 것이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소비자‘라는 새로운, 하나의 집단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340p.
..카탈로그는 이 세상에 어떤 물건들이 팔리고 있는지를 소비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카탈로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 안에 담긴 상품은 무엇이든 원한다면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상품들 하나하나를 ‘공부‘하는 동안 사람들은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성장사회‘의 특성이 소비의 영역에 투영된 결과물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성장사회를 재화를 생산하는 사회이기 이전에 특권을 생산하는 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빈곤을 수반하지 않는 특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의 진보가 성장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권 계급, 즉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필요성이 곧 성장을 생산해낸다는 통찰이다. 결국 성장사회의 지속은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끊임없이 불평등 구조가 재생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소비라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학습되며 실행되는 것이다.

373p.
..18세기 후반 영국의 설탕거부운동은 윤리적 소비의 역사적 출발점이었다. 오늘날에는 ‘착한 소비‘ 운동처럼 소비 행위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의식을 투영하는 경향이 범세계적으로 뚜렷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윤리적 소비는 그 자체가 ‘빅 비즈니스‘가 되어가는 측면이 있다. 다른 빅 비즈니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문제가 되었던 비윤리적인 요소를 제거했다는 이유만으로 대안적 생산방식이 미화되기도 하고, 정치적 이유를 앞세워 그 이면에 놓인 문제들이 은폐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의 윤리적 소비운동인 설탕거부운동에 동인도제도산 설탕이 불러온 반전은 눈여겨봐야 한다. 정치성을 필수조건으로 삼는 윤리적 소비운동이 왜 반드시 정치성과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이기 때문이다.

434p.
...한 경제학자는 사회적 진보란 "사치품이 편의품으로, 편의품이 필수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일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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