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p....다시 거울 속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신의 몸 하나 정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아서 악취가 나는데도 태평하게 꾸벅꾸벅 졸며 살아 있는 시간을 소진해가는 사람,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한도 걱정도 없는 얼굴로 건물 옥상에서 순식간에 몸을 날리는 사람, 보도블록에, 차의 보닛과 건물의 차양 위에, 혹은 누군가의 구두코 앞에 툭 떨어져 고개를 꺾는 사람, 거울 속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는 듯했다....
135p...연인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연인이 아니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서로를 욕망하는 정도는 모든 날이 달랐다. 우리의 머리칼이 새고 근육과 관절은 약해지던 그 어느날부터는 이렇게 가만히 서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이미 사랑을 나눈 것만 같았고, 나는 진심으로 만족했다. 젊은 시절엔 결코 납득하지 못했을 안온한 결여였다.
184p....무서움, HN0034는 제작 당시에는 입력되지 않은 그 감정을 1293번에 걸친 로딩을 통해 새롭게 배운 셈이다. 그건 한계를 알면서도 그 한계에 저항할 능력이나 방법을 갖고 있지 않을 때의 감정이란 것을 말이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전체 수명에서 또 그만큼의 시간이 차감되며 폐기의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은 모든 수행원에게 적용되는 공평한 운명이었다.
85p...아침 죽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오래 살고 있다는 말은 나도 이해할 것 같았다. 라이온의 집에는 여기저기에 당근이 매달려 있다. 거기에는 작은 희망이 가득 박혀 있다.
138p..."이런 말들은 적 없으세요? 소보다 유(乳), 유보다 락(酪), 락보다 생소(生蘇), 생소보다 숙소(熟蘇), 숙소보다 제호(醍醐), 제호가 최상이니라. 락은 지금으로 말하면 요구르트, 생소는 생크림, 숙소는 버터, 제호는 다섯 가지 맛 중 마지막 맛, 우유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 최상의 맛입니다. 불교에서 최고의 진리라는 의미도 있어서 제호미라는 말도 여기서 생겨났답니다."
15p..."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그녀가 말했다. 벽에 적힌 글자를 낭독하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214p...궁극의 연애와 궁극의 고독—나는 그뒤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인생‘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작은 온천 마을의 허름한 료칸 다락방에서,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든 늙은 원숭이의 모습을 생각한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맥주를 마시면서 그와 함께 먹었던 감씨과자와 진미채를 생각한다.
223p...카운터 건너편에는 갖가지 술병이 늘어선 선반이 있었다. 그 뒷면의 벽은 커다란 거울이었고, 내 모습이 비쳤다. 가만히 바라보자니 당연히 거울 속의 나도 이쪽의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감각에 휩싸였다—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그 감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곳에 비친 이가—만약 나 자신이 아니라면—대체 누구란 말인가?
112~113p..."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143p...그럴 것이라 예상한 예고였다. 유나가 가진 독보적 기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름하여 ‘문간에 발 들여놓기‘. 사소한 부탁으로 시작해 뒷일까지 내맡겨버리는 수법이었다. 상대는 알면서도 당한다. 아주 잠깐 핸드백을 들어줬을 뿐인데, 어느 틈에 모든 짐을 이고진 채로 시녀처럼 뒤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39~240p...쪼는 자와 쪼이는 자가 결판나는 순간은 최초의 싸움에서 이겼을 때가 아니다. 최초로 복종을 끌어냈을 때다. 더하여 모든 관계는 서열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고착화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고 부부 사이에도 그렇다.
437p...타인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건 행동의 의미를 스스로 설명해내는 일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유나를 잘 안다고 자부해왔으나, 막상 까보니 착각이었다. 안다고 여겼던 건 유나가 아니었다. 유나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었다....
102p...그 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쇼카콜라도 점차 절망의 식품으로 바뀌었다.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여야 할 때 마지막 식품으로 지급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전 무렵 러시아군의 공격을 앞두고 핀란드 주둔 히틀러 친위부대인 SS 산악유격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쇼카콜라를 나눠주었다는 식이다. 그러니 쇼카콜라를 지급받았다는 것은 곧 패배가 뻔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쇼카콜라는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촉매제가 되고 말았다.
129p...『사기』의 「회음후 열전」에 실린 이야기다. 자기 옷을 벗어주고 자기 밥을 나누어줄 정도로 각별하게 챙기는 것을 ‘해의추식‘(解衣推食)이라고 한다. 한신의 충성 또한 밥 한 그릇, 옷 한 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주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알아주는 것이라고 한다. 보리밥 한 그릇이 알려주는 리더십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다.
378~379p...초밥을 만들어 팔 것이 아니라 쌀을 가져오는 사람에 한해 수수료를 받고 초밥을 만들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배급받은 쌀을 가져온 사람에게 생선을 얹어 초밥을 만들어주는 것이니, 양식을 과소비하는 것이 아니어서 긴급조치령의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고 손님이 가져 온 쌀로 밥을 짓고 거기에 생선을 얹어서 손님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니, 요식업이 아니라 위탁가공업에 해당했다. 때문에 음식점 영업 긴급조치령에도 저촉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초밥전문점 입장에서는 재료값과 요리사의 인건비를 수수료 형식으로 받는 것이니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다는 얘기였다...논리도 그럴듯했고, 수많은 초밥 전문점의 생계도 고려해야 했던 데다 시민들의 외식 욕구도 충족시켜야 했기에 도쿄 시청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다만 제한 조건을 만들었다. 1인당 쌀 한 홉으로 초밥 10개까지만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쌀 한 홉이면 대략 밥 한 그릇 정도의 분량이고, 이것으로 초밥을 만들면 지금 먹는 크기로 만들어야 10개 정도의 초밥이 만들어진다. 이전까지는 일본에 다양한 종류의 초밥이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초밥이 현재의 모습과 크기로 통일된 배경은 이러한 긴급조치령에 있었다.
398p...그리고 설탕 배급은 엉뚱하게 팝콘 산업의 호황으로 이어졌다. 영화관에서 팝콘의 강력한 경쟁자는 사탕이나 초콜릿, 과자, 그리고 콜라 같은 달달한 탄산음료다. 팝콘 값이 아무리 싸도 어떻게 경쟁조차 할 수 없는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설탕이 배급제로 바뀌면서 군납용을 제외한 모든 과자와 초콜릿, 탄산음료 등의 생산이 중단됐다. 심지어 설탕이 들어가는 추잉검의 생산까지 중단됐다...이럴 때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팝콘이었다. 영화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어줄 군것질거리가 팝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영화는 팝콘을 먹으며 보는 것으로 문화가 바뀌었다. 그리고 전후에 미국 문화와 미국 영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팝콘은 영화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됐다. 지금 우리가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데도 엉뚱한 역사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