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p.
...다시 거울 속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신의 몸 하나 정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아서 악취가 나는데도 태평하게 꾸벅꾸벅 졸며 살아 있는 시간을 소진해가는 사람,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한도 걱정도 없는 얼굴로 건물 옥상에서 순식간에 몸을 날리는 사람, 보도블록에, 차의 보닛과 건물의 차양 위에, 혹은 누군가의 구두코 앞에 툭 떨어져 고개를 꺾는 사람, 거울 속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는 듯했다....
184p.
...무서움, HN0034는 제작 당시에는 입력되지 않은 그 감정을 1293번에 걸친 로딩을 통해 새롭게 배운 셈이다. 그건 한계를 알면서도 그 한계에 저항할 능력이나 방법을 갖고 있지 않을 때의 감정이란 것을 말이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전체 수명에서 또 그만큼의 시간이 차감되며 폐기의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은 모든 수행원에게 적용되는 공평한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