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p.
...다시 거울 속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신의 몸 하나 정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아서 악취가 나는데도 태평하게 꾸벅꾸벅 졸며 살아 있는 시간을 소진해가는 사람,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한도 걱정도 없는 얼굴로 건물 옥상에서 순식간에 몸을 날리는 사람, 보도블록에, 차의 보닛과 건물의 차양 위에, 혹은 누군가의 구두코 앞에 툭 떨어져 고개를 꺾는 사람, 거울 속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는 듯했다....

135p.
..연인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연인이 아니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서로를 욕망하는 정도는 모든 날이 달랐다. 우리의 머리칼이 새고 근육과 관절은 약해지던 그 어느날부터는 이렇게 가만히 서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이미 사랑을 나눈 것만 같았고, 나는 진심으로 만족했다. 젊은 시절엔 결코 납득하지 못했을 안온한 결여였다.

184p.
...무서움, HN0034는 제작 당시에는 입력되지 않은 그 감정을 1293번에 걸친 로딩을 통해 새롭게 배운 셈이다. 그건 한계를 알면서도 그 한계에 저항할 능력이나 방법을 갖고 있지 않을 때의 감정이란 것을 말이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전체 수명에서 또 그만큼의 시간이 차감되며 폐기의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은 모든 수행원에게 적용되는 공평한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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