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p.
...부모를 잃은 친구가 말하길 "부모를 여읜다는 것은 죽음과 자신 사이에 놓여 있던 가로막이 없어지고 허허벌판에 내던져지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25p.
..사람은 죽고 썩어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흙색의 초벌구이 항아리는 곧 썩어 없어질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에 반해 백자 항아리는 주위의 모든 것이 썩은 뒤에도 홀로 사라지지 않고 거기에 남아 있을 것처럼 보였다. 부패에 대항하는 백자 항아리는 고독하고 비타협적인 아버지의 모습 같았고 나는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주위와 섞이지 못하도록 ‘벽‘을 만들어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27p.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최근에 수목장樹木葬이나 산골散骨 같은 것이 주목받듯이 ‘장례의 자유‘도 늘어난 듯하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확신을 가질 만큼 유물론자도 아니고, 영혼은 영생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앙이 깊지도 않은 나에게 무덤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저는 그곳에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신념은 있기 때문이다.

47p.
...그녀는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둘의 ‘낙차‘가 그녀의 연구 대상이다.

53p.
..고현학은 일본에서 태어난 학문이다. 외국에서 수입된 학문이 아니다. 땅속에서 파낸 토기 조각을 끼워 맞춰 전체 모습을 복원하는 고고학처럼, 눈앞에 맥락 없이 어질러진 단편적인 정보를 연결해 ‘현재‘ 시대의 전체상을 부각시키는 것이 고현학의 목표다. 때문에 ‘고현학‘이라고 한다. 고현학에 대응하는 서양의 언어가 없어서 고고학을 의미하는 ‘archaeology‘에서 따와 고현학을 ‘modernology‘라고 불렀다.

62~63p.
..남의 기억 속에 있는 나는 내가 모르는 나이지만, 그 사람이 나를 허락하고 있다면 나도 나를 허락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을 소중히하고 싶다.

72p.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나도 이 감각은 알 수 있다. 생각의 씨앗을 품에 안고 가만히 기다린다. 시간의 퇴적 속에서 발효가 진행되고 성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못된 아이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품고 낳은 작품이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부패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7p.
..이런 경관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는 어렸을 적부터 사람에게 친절한 자연보다 사람을 거부하는 자연을 더 좋아했다. 나와는 상관없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 내가 있기 전부터 있고 내가 사라진 뒤에도 있다는 사실, 내가 있어도 없어도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나는 잠시 머물 수 있지만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 아주 잠시, 자연의 변덕이 허락하는 동안에만 그것이 아낌없이 주는 풍요로움과 혹독함을 경험할 수 있다....

96p.
..인간의 머리는 99퍼센트가 남의 말과 아이디어로 되어 있다고 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이 무엇을 읽었는가를 통해 그의 머릿속을 꿰뚫을 수 있게 된다.

118p.
..애완동물 이야기를 남에게서 듣거나 들려줄 때 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순수 무고한 사랑 이야기라서가 아니다.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야기 속에 드러나 있는 나의 감출 수 없는 이기주의다.

177~178p.
..갈등이 있는 가족 속에서 성장한 사람에게 가정은 쉬는 곳이 아니라 불안과 긴장의 장소다. 아이는 긴장에 맞서기 위해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기 때문에 마치 강풍을 온몸으로 맞을 때같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것이 평상시의 자세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도 그 자세를 버리지 못한다. 바람이 멎으면 고꾸라지기 때문에 익숙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긴장도가 높은 상황을 스스로 초래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상대방의 깊숙한 곳에 발을 들여놓기도 한다. 자신에게는 당연한 풍압이 다른 환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196p.
..사람은 혼자서 태어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혼자가 된다. 배우자를 잃고, 아이들이 자립하고, 손자들도 어른이 되어간다. 누구나 싱글이 되기까지 길고 긴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책을 쓰기 위해 현역 싱글들을 취재할 때였다. 현재의 싱글 생활에 관해 물을 때마다 혼자가 되기까지의 길고 긴 상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혼자가 되어간다, 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210p.
..결혼은 사회계약, ‘커플‘은 번식기 행동, 부부는 육아를 함께하는 전우. 하지만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일대 사업이 끝난 후에는 일단 계약을 해제하고 더 완만한 관계를 맺고 살아도 좋지 않을까. 물론 같은 상대와 재계약을 해도 좋다.
..내가 그리는 ‘싱글의 미래‘는 가족의 의무에서 해방된 초고령화 사회의 남녀 싱글들이 ‘남녀공학적 친구 교제‘를 하는 모습이다. 인생 팔십 년. 커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것의 약 사분의 일. 인생 백 년이면 오분의 일이다. ‘커플‘이 최종 목적지라는 생각을 이제 버려도 좋지 않을까.

218p.
...그러나 사람이 사귀는 것은 그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인품이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와는 식탁을 같이하고 싶지 않다. 과거의 지위나 실적이 현재 이곳에서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면죄하지 않는다.
..그의 풍채를 통해 그 사람이 과거에 헤쳐온 전쟁과 수많은 고뇌를 추측해본다. 자세히 묻지는 않지만, 이러하고 저러한 일이 있은 결과로 그 사람의 ‘지금‘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그리고 문득, 그때 당시에 만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감개가 스친다. 경험과 시간으로 단련된, 닳고 닳은 가죽 수첩의 표지처럼 둔한 광택을 띤 채로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 나는 다만 그것을 마음껏 향유하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242p.
...우선 참을성이 생겼다. 그리고 관용적이 되었다. 타인에 대한 상상력도 예전에 비해서 깊이가 생겼다. 예전에 ‘성숙이라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타인의 흘수선吃水線이 오른다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분명히 그만큼 어른이 되었다. 환갑을 넘어 ‘어른이 되었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지만.

267p.
..우에노 씨의 짧은 머리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하늘로 떠올라 우주 너머로 날아갈 것 같은 자유로움, 결단력, 명랑함, 공격성, 집착 없음, 유연함, 타인에 대한 공감을 우에노 씨는 소바주 머리와 함께 갖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그 헤어스타일 그대로의 우에노 씨를 우리는 이 책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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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레이코를 렌즈 너머로만 이해해왔던 그는 그녀의 죽음도 렌즈를 통하지 않고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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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p. (해제 中)
..복지야말로 질문의 전환이 가장 시급한 영역이다. 우리는 ‘복지(welfare)‘라는 명명에서 사전적 정의대로 안녕, 행복, 건강을 떠올리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 의존성‘을 비난할 채비를 서두른다. 빈곤 통치의 역사란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 온 과정이다 보니 멀쩡한 노동자라면 복지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통념이 똬리를 틀었다....

121p.
..착취는 숱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것의 가치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을 때 노동착취를 경험한다. 그리고 소비자는 구입하는 것의 가치에 비해 많은 돈을 지불할 때 소비자 착취를 경험한다. 우리에게 마음껏 쓸 수 있는 자원이 없을 때 우리의 경제적 자유가 제한된다. 우리에게 재산이나 신용이 없을 때는 그게 있는 사람들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러면 착취하기 좋은 조건이 형성된다. 다른 사람의 불운은 나의 행운이므로, 누군가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을 때 우리는 그들의 처분에 맡겨진다.

142p.
...우리 사회의 많은 요소는 기능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어떤 이들에게 주택은 재산을 증식시켜 주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재산을 탕진시킨다. 어떤 이들에게 신용에 대한 접근은 금융 권력을 강화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금융 권력을 망가뜨린다....

173~174p.
..우리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백인이거나,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를 두거나, 연줄이 있으면 유리하다는 것도 알고있다. 우리는 자수성가는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는 걸, 근성과 극기 정신으로 각고의 노력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진부한 이야기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괜찮은 충고이지만 그걸로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엄청난 부유함 바로 옆에 가난이 존재하는 한, 승자들은 이런 모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지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거라고. 복지가 장기적인 의존성을 만들어 낸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확대하는 건 사회주의와 독재로 이어지는 파멸 행위라고. 이런 선동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은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삶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서로 맞물려 있다는 뼈아픈 진실을 외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낡은 비유와 고정관념은 수명이 다해 가고 있다. 우리는 그 속을 이미 간파했다. 오늘날 민주당원 대부분과 공화당원 대다수가 가난이 노동윤리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부당한 환경 때문이라고 믿는다.

182~183p.
...그의 주요 관심은 민간의 부가 학교, 공원, 사회안전망 프로그램 같은 공공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상당한 속도로 앞지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과정은 서서히 시작되다가 어느 순간 자체적인 탄력이 붙어서 가속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들이 돈을 많이 축적하면 할수록 공공재에 대한 의존도는 낮아지고, 그러면 공공재를 유지하는 데에 대한 관심도 줄어든다. 사람들이 세금 감면 혜택 등의 수단을 통해 원하는 바를 손에 넣으면 공공재는 방치되어 악화하는 반면 개인의 부는 커져 간다. 공공주택, 공교육, 대중교통이 점점 부실해질수록, 그것은 점점, 그러다가 거의 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된다.

195~196p.
..부유한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지지하는 진보적인 정책들은 그들의 부에 실제적인 위협을 전혀 가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민권운동 기간 동안 백인 엘리트들이 공원과 공설 수영장의 인종 분리 철폐를 지지했던 것은 어차피 자기들은 그 공간을 사용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들은 사적인 클럽이 있으니까. 이는 백인 노동계급의 분노를 샀고 성난 백인 노동계급은 인종 분리 철폐를 "부자를 뺀 나머지 모든 사람의 통합"이라고 불렀다....

225p.
...아무리 암담한 시기라도 우리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상상하고 거기에 경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현 상황에 대한 불만과 그것의 비영구성이 모두 드러나므로. "우리는 그것이 현실적인지 실제적인지 성공 가능한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 가능한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부르그먼은 썼다. "우리의 의식과 상상력이" 기존 질서에 "너무 공격당하고 포섭되어서 대안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용기나 힘을 빼앗긴 건 아닌지를 질문해야 한다".

278p.
..여기에는 중대한 사회학적 통찰이 있다. 발밑의 땅이 불안정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살피기보다는 무엇을 잃을 수 있는가에 더 마음을 쏟으며 방어적인 태도로 우리 것을 지키려고 한다. 숱한 사회심리학적 증거에 따르면 우리는 자원이 부족하다고 또는 부족해질 수 있다고 느낄 때, 우리의 지위(또는 우리가 속한 인종 집단의 지위)가 하락하고 있다고 느낄 때 타인의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려는 노력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다....

291~292p.
..한마디로 빈곤이 사라지면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빈곤을 종식시키는 데 진심인 나라는 진정으로, 강박적으로 자유에 헌신하는 나라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옳았다. "진정한 개인의 자유는 경제적 안정과 독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궁핍한 인간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빈곤에 포위된 나라는 자유국가가 아니다. 은행 계좌가 좌우하는 자유—부자들의 자유—에 비해 공동의 책임, 공동의 목적과 성취, 공동의 풍요와 헌신에서 비롯되는 자유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 해방이라는 인상을 준다. 더 깊이 있고 따뜻하고 풍성한. 이런 종류의 자유는 로빈 월 킴머의 표현을 빌리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것은 당신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든다". "모든 번영은 상호적이다". 어째서일까? 빈곤은 어디에 있든 모든 곳의 번영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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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p.
..이 연배의 남자들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서로 얼마나 늙었는지를 비교한다. 얼굴 주름과 군살은 비슷했고, 머리숱은 마쓰다가 이겼다. 그러나 기름으로 쓸어 올린 고참 형사의 머리는 아직 거뭇거뭇했다.

121p.
...즉 인간의 혼이란 마치 한 편의 이야기나 음악, 혹은 살아있는 인간의 의식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 속에서만 발현되는 무언가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듯 영혼과 교감할 수 있지 않을까?

155p.
..마쓰다는 유군기자 시절의 감각을 떠올렸다. 취재하여 긁어모은 단편적인 정보들이 준동하듯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들이 한데 이어지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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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p.
...그리그의 매력은 어린아이 같은 매력, 흠씬 얻어맞고 결국 다리를 절게 된 어린아이의 매력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해 오두막에서 나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살아가고 있다....

49p.
...사상, 그것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사상들 따위는 곧장 치워 버려. 철학하려고 하지 마. 이론을 만드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걸 이쪽으로 끌고 오지 말라고. 너는 조류학자가 아니야. 너는 새야. 그러니 노래를 불러. 물론 그걸 요구한 사람은 없지만. 네 가시덤불로 돌아가.

72p.
...나는 도망치는 일이 가져다주는 끝없는 쾌락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다. 도망치는 것, 그것은 소설가로서 나의 기저를 이루었다.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나는 여우 꼬리에 매달리듯 도망치는 일에 매달렸다. 고대 프랑스어 guerpir에 접두사 de가 붙은 형태의 단어 déguerpir는 ‘포기하다‘라는 의미이다. 독일어로는 ‘던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werfen이며, 스웨덴어로는 verpa, 고트어로는 vairpan, 왈롱어로는diwerpi, 프로방스어로는 degurpir이다. 나는 이 단어 위에 나 자신을 세웠다. 있을 법하지 않은 어떤 공간 때문에 다른 공간을 억지로 포기하는 일. 이번에 그 공간은 부아바니였다. 우리는 책 상자들과 암탕나귀 한 마리와 함께 이듬해 봄에 그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적응했다. 그리그는 곧바로 지붕 아래에 서재를 꾸몄고, 창문은 그의 책들로 완전히 막혀 버렸다. 내 방 창문에서는 지척의 초원이 바라다보였다.

79p.
..분명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사람이었다. 이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감동과 살아남으려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원초적이면서도 정열적이고, 진하면서도 미묘하며, 가벼우면서도 과묵한 충실함을 영원히 경험하려는 욕망, 최소한의 타자성도 없이 나를 둘러싼 환희에 찬 것이나 전율하는 것 안에 거하려는 욕망 말이다. 그렇다, 하지만 나를 보았다는 이유로, 내게서 인간의 속성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던 새의 날갯짓이 갑자기 분주해지고 빨라지는 것은 뭐라고 묘사하지? 공포? 나는 단번에 둘로 분열되어, 도망가는 동시에 바라보는 존재가 된다.

126p.
...올가을 들어 어느 저녁엔 이런 생각이들기도 했다. 나는 나이 드는 걸 받아들이고 있어. 아무렴, 나는 노화를 겪고 있고 그 여파로 몸이 망가졌지. 하지만 노화에 어울리는 미지의 영역도 내 것이 되었잖아! 나는 그걸 놓치고 있었다. 미지의 영역을 잊어선 안 돼. 나는 내 앞에 놓인 미지의 영역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했고, 이제 노화는 일종의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일로 다가왔다. 그런 식으로 나는 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146p.
..물론 지식은 필요하다. 바깥에서 돌아오면 나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에서 사온 가이드북을 펼쳤다. 그런 다음 사물들이 가진 원래의 이름을 찾아 주었다. 그것은 미지의 구역을 탐험가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노화 대책 프로젝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점은 더 당기고, 시선은 더 정확하게.

243p.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삶의 끝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고, 그는 『신학 대전』에서 답했다. 시쿠트 팔레아라고. 그는 이 두 단어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말한 것이다. 그것은 귀리 껍질과도 같은 것이다. 씨앗은 없고 그걸 싸고 있는 것, 날려 흩어지는 것.

268p.
..얼마간 망각하고 있던,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일에 관해 생각해 보니, 내가 논리적이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때때로 내게 인간이란 나의 형제들이자 버림받고 굶주린 존재, 몸에 구멍이 뚫리고 불에 타고 고문당한 존재, 창문에서 떨어지고 처형당하고 톱과 음악으로 몸이 잘린 불쌍한 우리들이었다. 또 때로는 사악한 약탈자이자 강탈자, 살인자, 전투복을 입은 용병, 착취자였다. 나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모두 물리친 율리시스처럼 그들을 쓰러뜨려야 했다. 율리시스가 그들을 물리친 것처럼 그들 전부를. 그 전부라니, 상상할 수 없다. 모두 물리친 가운데, 제비 한 마리만 곁을 지키고 있다. 아주 작은 제비 한 마리. 세상의 현실과 신화들을 알고 있었다면, 그 제비가 날아가는 모습이 당겨진 활 모양이며 그것이 아테나 여신을 상징한다는 걸 알았으리라. 하나의 권력. 나무 한 그루로 만든 활은 권력을 드러낸다. 나무의 분노로 깎아 만들어진 사물에도 권력이 깃들어 있다. 게다가 모든 현실이 분노에 싸여 있다. 어마어마한 분노가 우리 종을 덮어 버렸다....

271p.
..무엇으로 변화된단 말인가?
..인간의 모습과 다른 것으로 변화된다면 좋을 텐데. 무엇보다 가족과 재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상실을 원한다. 극단적인 상실을. 세상에 그처럼 강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실은 존재가 지닌 매혹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의 수프로 변화되는 편을 택할 것이다.
..나를 수프로 변화시켜 주기를!

309p.
...내 손은 이제 손가락 다섯 개가 아니라 다섯 손가락 사이의 네 개의 공간이었다. 마치, 걸을 때가 아니어도 내 몸이 이미 나무 속 여러 겹의 속껍질과 한 몸이었던 것처럼.

371p.
...그래서 어느 날 밤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게 된다면, 잠에서 깬 나는 둘 중 누가 죽었는지, 죽은 게 당신인지 예스인지 알려고 하지 않을 거야. 모르고 있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나는 살아남은 쪽의 온기만 붙들고 그것이 세상인 것처럼 놓지 않을 거야....

376~377p.
..내 책상에 개를 데려왔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와 동시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가 글을 쓰는 건 타인이나 후손을 위해, 죽음에 대항하기 위해서나 영원에 다다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몸짓의 아름다움이나 우리가 겪은 상실을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언어에 불법점거당했으므로 글을 쓴다. 이것은 나에게 자명해 보였고, 거드름 피울 일도 아니었다. 나는 우리가 개집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개에게 속한 개집. 그 개는 내가 아니고,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말하는 것, ‘로고스‘라 불리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 단어들의 기저에서 말을 하고, 그것에 대항해 할 수 있는 건 없다. 지배하는 건 그것이다. 성서적이다. 그 단어들의 기저에서 독백하는 자에게 대항해 할 일이 있을까? 누가 우리를 이용하는가? 우리를 길들이는가? 말하기 위해서만 말하는 자에게 대항하여? 그의 다변에 대항하여? 우리가 과연 그 단어들의 기저, 우리 안에서 독백하는 언어의 개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할 자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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