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
..그것은 그의 기질이다. 그의 기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 그의 기질은 고착되어 있다. 기질과 두개골은 몸에서 가장 딱딱한 두 부분이다.
..기질을 따르라.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그렇게 고차원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것은 베네딕트회의 법칙처럼, 하나의 법칙이다.
..그의 몸은 건강하고 정신은 맑다. 직업상, 그는 학자다. 혹은 그래왔다. 가끔씩 그의 중심부는 학문적인 일에 관련돼 있다. 그는 그의 수입과 기질과 감정의 반경 내에서 살아간다. 그는 행복한가? 대부분의 척도로 보자면 그렇다. 그는 그렇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후렴구를 잊은 건 아니다. 죽기 전에 누구도 행복하다 말하지 말라.

11p.
..그는 새로 맡은 과목의 강의 준비에 하루에 몇 시간씩 할애하지만, 커뮤니케이션 101 안내서를 보고 그 과목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 사회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도를 서로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언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겉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말은 노래에서 시작됐으며, 노래는 지나치게 크면서도 다소 텅빈 인간의 영혼을 소리로 채우기 위해 생겼다고 생각한다.

12p.
..그는 계속 가르친다. 그렇게 하면 기운이 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주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실감케 해주기 때문이다. 배우러 온 학생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데, 가르치러 온 교수는 가르치면서 가장 예리한 교훈들을 얻는다. 그가 그 아이러니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소라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상황에 비춰볼 때, 거기엔 아이러니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87p.
..고백, 사과. 왜 이렇게 굴욕감을 주려고 난리인 걸까? 조용해진다. 그들은 이상한 짐승을 구석에 몰아놓고 어떻게 끝낼지 모르는 사냥꾼들처럼,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93p.
.."개들이 있어요. 개들은 아직 쓸모가 있어요. 개가 많을수록, 더 도움이 되죠. 여하튼 도둑이 들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없어요."
.."그 말은 아주 철학적인데."
.."예.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철학적이 될 수밖에 없죠."

109p.
...그는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전에 루시의 친구들을 못마땅해한 이유다. 자랑스러워할 건 없다.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편견이니까. 그의 마음은 나태하고 빈곤하며 정처없는 낡은 생각들의 도피처가 되어 있다. 그는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깨끗하게 쓸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만한 관심이 없다.

111p.
.."그렇다면 썩 좋은 일이다. 얘야,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는 게 피곤하다. 너나 베브가 하는 일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동물복지에 관계된 사람들이 특이한 종류의 기독교인들 같아 보인다. 모든 사람이 너무 즐겁고 선의가 지나쳐, 얼마 후에는 몸이 근질거려 밖으로 나가 강간을 하고 약탈을 하고 싶겠어. 아니면b고양이를 발로 차버리든가."

112p.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그들은 나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지 않아요. 그 이유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유일한 삶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동물들과 공유하는 거예요. 베브같은 사람들이 모범을 보이는 겁니다. 저는 그 모범을 따르려고 해요.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일부를 동물들과 공유하려는 거예요. 저는 개나 돼지와 같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면 우리 밑에서 사는 개나 돼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얘야, 화내지 말아라. 그래, 나는 이것이 유일한 삶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동물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하지만 균형을 잃지는 말자. 우리는 동물과는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면, 죄의식을 느끼거나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단순한 아량에서 그렇게 하자."

148p.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에 따르는 위험. 차 한 대, 구두 한 켤레, 담배 한 보루. 너무 많은 사람들에 너무 적은 물건들. 모든 사람이 하루동안 행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게 순환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론이다. 이론을 따르고, 이론이 주는 위안을 따르고. 인간의 사악함이 아니라 거대한 순환 시스템일 뿐이다. 동정이나 두려움은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과 아무 관련도 없다. 그런 식으로 이 나라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 도식적인 방식으로 그걸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이다. 차들, 구두들, 그리고 여자들. 그 시스템 안에는 여자들과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위한 자리가 있어야 한다.

169p.
..저녁이 온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먹는다. 먹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일을 더 쉽게 만든다.

220p.
..자신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죽은 개를 위해 봉사하다니 신기하다. 세상에, 혹은 세상에 대한 생각에, 자기를 바치는 더 생산적인 다른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더 오랫 동안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아이들한테 몸에 독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타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더 다부지게 먹고 앉아서 바이런 대본을 쓰는 것조차 아쉬운 대로 인류에 대한 봉사로 쳐줄 수 있을지 모른다.
..동물 복지, 재활, 심지어 바이런에 관한 일—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다. 동물의 시체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한다. 그는 그처럼 어리석고, 미치고, 비뚤어진 인간이 돼가고 있다.

261p.
.."당신은 미안하며, 당신에게 서정적인 게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한테 서정적인 게 있었다면, 우리가 오늘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발각이 되면 미안해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아주 미안해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안해 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안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309p.
.."정말로 굴욕적이구나. 그토록 원대했던 희망이 이렇게 끝나다니."
.."그래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굴욕적이죠. 그러나 어쩌면 다시 시작하기에는 좋은 지점일 거예요. 어쩌면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걸 배워야 할 거예요.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워야죠. 아무 것도 없이. 어떤 것밖에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이. 카드도 없고, 무기도 없고, 재산도 없고, 권리도 없고, 위엄도 없고."
.."개처럼."
.."그래요, 개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18p.
..나는 신사 본당이 아닌 큰 은행나무 밑동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백 살 넘은 그 나무가 지난 봄 큰 태풍을 이기지 못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직접 와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있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설령 자신과 별 상관없는 존재였더라도 상실의 충격은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 그랬다.

183p.
..나는 가와바타의 집에 있던 개집을 떠올렸다. 아마 영화에 나온 ‘친구의 집‘을 말하는 것이리라.
..외톨이들이 모이는 집. 모두 힘을 합쳐 집을 지었지만 결국 쓸모없어진 집. 토비크와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이었던 것이다.
.."네, 이 책에서 따왔어요."
..시노부의 목소리는 묘하게 밝고 건조했다.
.."그 얘기, 처음 묻네요. 아빠는 나하고 말도 하지 않았고, 엄마는 항상 혼내기만 했으니까. 우리 집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나는 숨을 삼켰다.
..버려진 개를 주워와 외톨이들이 모이는 ‘단짝의 집‘ 에서 키우던 시노부. 그 마음이 어땠는지 절절하리만치 전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4p.
.."버지스가 어느 판본을 정통으로 여기는지 불분명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불완전판의 출판을 막을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어쩌면 버지스 자신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건지도 몰라요.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완전판에 수록된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거든요. ‘우리는 자신의 글을 삭제할 수는 있지만,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3p.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삭줍기」의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허공을 바라본 채 그녀는 유려하게 그 구절을 낭송했다.
.."‘나는 가능하다면 빨리 나이를 먹고 싶다. 허리가 조금 구부정해진들 별수 있나. 어쩌면 그때쯤에는 병아리를 키워 입에 풀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늙은이란 존재가 반드시 세상을 원망하라는 법은 없다.‘"

159p.
.."그 이야기는 작가의 꿈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처음에는 이런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보니 작가도 꿈이라는 걸 알고 썼더라고요. 그게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나도 모르게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 책에 실린 다른 이야기도 지금 읽고 있는데, 모두 비슷한 느낌이더라고요."

321~322p.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나에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지금 당장 이야기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물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조금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았다. 『만년』이 들어갈 만한 거리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8p.
..‘청춘‘ 이란 지난 뒤에도 어딘가 가까이 있다가 이따금 얼굴을 내미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41p.
..현관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밝고 명랑하게 인사를 했다. 밝고 명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은 처세이며 방어다. 잘 모르는 곳에 있을 때는 타인이 친절을 베풀도록 행동하는것이 최고다.

46p.
..나는 ‘다양한 생물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왠지 무척 좋다. 어째서일까, 왠지 안심이 된다. 여러 가지가 다양하게 공존해서 좋구나, 하는 안도감이랄까? 진기한 사슴 ‘콘‘도 포함된다. 그런 하치조지마의 여름 여행이었다.

51p.
..아니, 그러나 만족, 대만족. ‘어떤 음식일까?‘ 상상했던 것을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른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62p.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어째서 이렇게 재미있을까?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서 기분 좋은 걸까. 자, 이거나 먹어라, 같은....... 아니면 단순히 먹는 걸 보는 것은 흐뭇하니까?

62~63p.
..여행에서 돌아오자 바로 언제나의 일상이다. 어제는 미야기 현에 있었지,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신기한 기분이 든다. 어린 시절에 곧잘 일어난 그 감각과 비슷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교실의내 자리로 돌아와서 조금 있다 보면,
..‘어? 나 방금 화장실에 갔었는데, 화장실 갔을 때의 나와 멀어진 기분이 들어.‘
..곧잘 그렇게 느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모르겠지만, 뭔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97p.
..공룡이란 게 정말 있었구나.
..그걸 지금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관내 전시물에 이런 한 구절이 있었다.
.."양식 있는 과학자는 그 가설이 옳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는다."
..몇 번이나 검증함으로써 증명해가는 세계.
..‘티라노사우루스의 등에는 깃털이 있었다!‘
..최근 그런 설이 부상한 것 같지만,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연구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평생을 바쳐 연구한 것이 고스란히 뒤집어지는 일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쓸모없는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열차에 흔들리며 돌아왔다.

121p.
..한없이 넓은 모래사장에 서 있으니 지구도 행성의 하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구상에 사람뿐이니, 가끔은 이런 걸 느껴보는 것도 좋다.

153p.
...좀 전에 마리메코에서 산 머플러가 아주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산 것을 바로 사용하거나 바로 먹는 것을 좋아한다. 어째서일까. 낭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166p.
..호텔에서 카페까지 걸어서 20분 이상 걸렸을까. 도중에 통근 통학하는 사람들과 스쳐지날 때마다 이국땅에 덩그러니 있는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 어른이 되었구나.
..그렇게 느낄 때, 어린 시절의 기분이 후욱 되살아났다. 헬싱키 골목을 걸으면서 나는 엄마 심부름으로 이웃 빵집에 가 있는 어린 내가 되었다.
..특별히 낯을 가리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심부름을 시키면 언제나 조금 긴장했다. 어른들의 ‘구조‘ 속에 있는 자신이 당혹스러웠던 거라고 생각한다. 어린 내가 돈을 낸다.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것이다. 그런데 내 것처럼 어른에게 건네고 물건을 산다. 그 행위가 몹시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일은 없어, 라고 어른은 생각하지만, 아이에게는 아이대로의 이론이 있다.

177p.
..아까 그 남자. 취해서, 백화점 지하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일본인 중년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결혼반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건 오른손이었다. 그는 한번도 "같이 바에 가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거절당하는 것이 싫어서 말하지 못한 게 아닐까.
..몹시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에 대해서가 아니라 뭔가 더 큰 것을 향한 쓸쓸함이었다. 인생이라든가, 시간이라든가, 생사라든가, 그런 것.

186p.
..멈춰서서 그 집단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 발견했다. 혼자 있는 아이. 어느 그룹과도 섞이지 못했다. 사슴도, 나라공원도, 예쁜 노을도, 토산품 가게도, 그 아이에게는 상관없는 것들이 아닐까. 이 일정을 무난히 넘기는 것만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빨리 ‘어른‘이라는 장소로 도망쳐 오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에게, 그녀에게 빔을 보냈다. 어른이 되면 좀 자유롭단다. 혼자 여행을 떠나도 괜찮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