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들의 착각이 사실이었다면 아주 좋았으리라. 1년 정도 다자이를 숨겨두었다가 불쑥 되살아나게 한다면, 신문기자와 세상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가끔은 그런 일이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진짜 자살보다 자살극을 꾸밀 만큼의 장난을 칠 수 있었다면 다자이의 문학은 훨씬 더 뛰어난 것이 되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숙취의, 혹은 숙취적(熟醉的)인 자책이나 추회의 괴로움, 안타까움을 문학의 문제로 삼아서도 안 되고, 인생의 문제로 삼아서도 안 된다.

..프로이드가 ‘오류의 정정‘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그만 말실수를 하면 그것을 정정하려는 의미에서 무의식중에 유사한 잘못을 범해 합리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숙취적 · 쇠약적인 심리에서는 이것이 특히 심해져 수치와 울화에서 오는 혼란과 고통에 더해 오류의 정정적 발광상태가 일어나는 법이다.
..다자이는 이를 문학에서 행했다.

..아쿠타가와도 그렇고 다자이도 그렇고, 그들의 소설은 심리적 · 인간적인 작품으로 사상성은 거의 없다. 허무라는 것은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에 부속된 생리적인 정신내용이며, 사상이라는 것은 훨씬 더 한심하고 경박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상이 아니라인간 그 자체다.
..인간성(허무는 인간성의 부속품이다)은 영원불변한 것으로 인간 일반의 것이지만, 개인이라는 것은 50 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 그러한 점에서 유일하고 특별한 인간이기에 인간 일반과는 다르다. 사상이란 이 개인에 속해 있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생성, 그리고 소멸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부터 경박한 것이다.

..애초부터 다자이는 인간에 실격하지 않았다. 숙취에 수치와 울화를 느끼는 것만 해도, 수치와 울화를 느끼지 않는 놈들보다 얼마나 온전하게 인간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마흔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량소년으로, 불량청년도 불량노년도 되지 못했던 사내였다.
..불량소년은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훌륭하게 보이고 싶다. 목을 매달아 죽어서라도 훌륭하게 보이고 싶다. 황족이나 천황의 아들이고 싶은 것처럼, 죽어서도 훌륭하게 보이고 싶다. 마흔이 되어서도 다자이의 은밀한 심리는 그것이 전부인 불량소년의 심리였고, 그 어리석은 짓을 정말로 저질러버렸으니 , 터무니없는 녀석이다.
..문학자의 죽음, 그런 것이 아니다. 마흔이 되어서도 불량소년이었던, 기묘한 불량품이 정신없이 혼란스러워져서 마침내 저질러버린 것이다.

..이겨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길 리가 없지 않은가. 누구에게, 어떤 자에게 이길 생각이란 말인가.

..원자폭탄을 발견하는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놀이입니다. 그것을 컨트롤해서 적절하게 이용하고, 전쟁 같은거 하지 말고 평화로운 질서를 생각하고, 그런 한도를 발견하는 것이 학문입니다.
..자살은 학문이 아니야. 어린아이의 놀이입니다. 처음부터 우선 한도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전쟁 덕분에 원자폭탄은 학문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놀이는 학문이 아니다, 전쟁도 학문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배웠다. 과장스러운 것을 과대평가했던 것이다.
..학문은 한도의 발견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서 싸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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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그의 신체의 더러움과 그라고 하는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판자에 들러붙은 더러움과 같다. 공원 벤치 위에서 부랑자와 섞여 노숙을 해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머릿속이 새카만 와중에 이런 한 줄기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오늘은 만우절이잖아."
..그래 , 만우절이다. 이건 다케다 씨 일생일대의 헛소문이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그토록 헛소문을 퍼트리던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고 메마르고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문에 실린 사진 속 다케다 씨는 그러나 결연한 모습으로 하늘 한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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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점잔을 빼면서도 자기애가 드러나는 바람에 거의 패러디에 가까운 그의 말들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의 말에서 용서와 구원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무의식적인 것이리라. 그런데 니콜라는 대체 무엇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아마 자기 자신과 자신을 과장하는 데에만 온통 바쳐온 허울뿐인 삶에 대한 것이겠지. 나는 거기에 타인을 파괴한 죄를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독신이기에 아내도, 나를 빼닮은 아이도 없다. 내 이름으로 발표된 문학작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남자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죽음은 무화과 열매가 땅에 떨어져 말라빠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내 비서만 눈물 몇 방울을 흘리겠지. 어쩌면 니콜라의 아들, 내가 사랑하는 피터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피터는 나를 필요로 한다. 나는 피터가 나를 필요로 하도록 최선을 다해왔다.

..눈부신 태양도 한껏 물오르는 봄날의 푸르름도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마치 내 피가 얼어붙은 듯했다. 나를 감동시키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드물게나마 환희를 느끼는 일도 없었으며, 어떤 일에 대해서도 광적인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숨을 쉬고, 나 자신, 즉 내 자아가 진정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알게 되기를 두려워하면서 나 자신 속에 침잠되어 지낼 뿐이었다....

..혼자 길을 걸어가다보면 나에게 길을 묻는 사람이 많다. 길을 묻는 사람들은 흐릿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흐릿하고 생기 없는 사람들은 거리의 표지판만큼이나 중용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보다.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세계에 속하고 요정들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내 요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나의 길을 걸었고 나의 하루하루는 수난이나 다름없었다. 활기가 배제된 영혼의 수난이었다.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빛이 꺼진 사람들도 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후자에 속했다.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마키아벨리적이고 한없는 내 고통은 복수를 지향하는 은밀한 음모 속에 미묘하게 녹아들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덜커덕하는 소리가 나면서 기억의 저장고 속에 보관되어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시절에 공부한 인도-유럽어의 어근에 관한 기억이었다. ‘카드(kad)’라는 단어는 증오와 고통을 동시에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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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이륙한 뒤였고 우린 비행기 여행이라는 특별한 거품 속에 있었다. 혹한의 고도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동하지만 탁한 공기와 푹신한 의자, 엔진의 지속적인 소음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내가 살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했죠? 사람들 생각처럼 살인이 비도덕적인 일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난 정말 그렇다고 믿어요. 사람들은 생명이 존엄하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이 세상에는 생명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누군가 권력을 남용하거나, 미란다처럼 자신을 향한 상대의 사랑을 남용한다면 그 사람은 죽여 마땅해요. 너무 극단적인 처벌처럼 들리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모든 사람의 삶은 다 충만해요. 설사 짧게 끝날지라도요.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경험이라고요. T. S. 엘리엇의 유명한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어떤 거요?"
.."‘장미의 한순간과 주목朱木의 한순간은 똑같이 지속된다.’ 살인을 정당화한 말은 아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래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강조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이용당할 때까지 살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기네스를 다 마신 후, 나는 살인자로서 내 경력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살인에 흥미를 잃어서가 아니라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누구도 나와 그렇게 가까워지도록, 에릭처럼 내게 상처를 입히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성인이다. 상처받기 쉬운 어린 시절과 위험한 첫사랑의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 다시는 그런 처지에 놓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 이제부터 내 행복을 책임지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나는 한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불이 모두 꺼진 어두운 집 안에서 투명인간이 된 기분으로 내가 차지한 도시의 모퉁이를 내다보았다. 차 한 대가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다가 물 웅덩이를 지나가며 물을 쫙 튀겼다....

...다시 트럭을 타고 돌아가기 전에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서 오로지 어둠과 자연에 둘러싸인 채 잠시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런 희귀종 같으니." 한때 아빠는 날 그렇게 불렀는데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랬다. 생생하게 살아 있고, 생생하게 혼자인 기분. 이 순간 내 유일한 동반자는 어린 나, 쳇을 우물에 밀어 넣은 아이뿐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고 우린 서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였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여러모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표현이었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어린 나는 사라지더니 내 안으로 들어왔고, 우린 함께 뉴욕 시로 향했다.

...하지만 이젠 끝났다. 완전히. 앞으로는 조용히 살면서 다시는 누구도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는 계속 생존할 것이다. 초원에서의 그날 밤, 쏟아지는 별빛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간직한 채. 그것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고, 남과 다른 도덕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깨달음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동물, 소나 여우, 올빼미의 도덕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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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잘못 키워서 그래."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 귀국하여 고생이 심했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피로하면 그만둬버리고, 조그만 장애가 있어도 하던 일을 놓아버리고, 편한 쪽으로만 하염없이 흘러가려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다.

..달빛이 무척 밝게 느껴졌다. 학교에 이르는 길이 무척 신선했다. 시간과 목적이 달라지면 풍경을 느끼는 감정도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다.

..가게로 들어선다. 아다마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가게에는 미국 냄새가 가득했다. 아다마는 그게 싫었던 것이다. 미국 냄새라 해도 실제로 미국에는 그런 냄새가 없다. 그러나 그 냄새는 기지촌의 단독주택에도 혼혈아의 머리카락에도 기지의 PX에도 있다. 인간의 지방 냄새다. 나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영양이 가득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다마, 그건 아니야. 내 자신이 싫어졌을 뿐이야."
..나와 아다마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신이 싫어졌다. 그것은 열일곱 살 소년이 여고생에게 사랑을 구걸할 때 이외에는 결코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대사다. 누구든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경제력도 없고 아내도 없는 지방도시의 이름 없는 열일곱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선별되어 가축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귀로에 선 순간이므로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면, 그 후의 인생이 어두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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