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점잔을 빼면서도 자기애가 드러나는 바람에 거의 패러디에 가까운 그의 말들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의 말에서 용서와 구원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무의식적인 것이리라. 그런데 니콜라는 대체 무엇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아마 자기 자신과 자신을 과장하는 데에만 온통 바쳐온 허울뿐인 삶에 대한 것이겠지. 나는 거기에 타인을 파괴한 죄를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독신이기에 아내도, 나를 빼닮은 아이도 없다. 내 이름으로 발표된 문학작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남자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죽음은 무화과 열매가 땅에 떨어져 말라빠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내 비서만 눈물 몇 방울을 흘리겠지. 어쩌면 니콜라의 아들, 내가 사랑하는 피터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피터는 나를 필요로 한다. 나는 피터가 나를 필요로 하도록 최선을 다해왔다.
..눈부신 태양도 한껏 물오르는 봄날의 푸르름도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마치 내 피가 얼어붙은 듯했다. 나를 감동시키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드물게나마 환희를 느끼는 일도 없었으며, 어떤 일에 대해서도 광적인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숨을 쉬고, 나 자신, 즉 내 자아가 진정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알게 되기를 두려워하면서 나 자신 속에 침잠되어 지낼 뿐이었다....
..혼자 길을 걸어가다보면 나에게 길을 묻는 사람이 많다. 길을 묻는 사람들은 흐릿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흐릿하고 생기 없는 사람들은 거리의 표지판만큼이나 중용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보다.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세계에 속하고 요정들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내 요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나의 길을 걸었고 나의 하루하루는 수난이나 다름없었다. 활기가 배제된 영혼의 수난이었다.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빛이 꺼진 사람들도 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후자에 속했다.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마키아벨리적이고 한없는 내 고통은 복수를 지향하는 은밀한 음모 속에 미묘하게 녹아들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덜커덕하는 소리가 나면서 기억의 저장고 속에 보관되어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시절에 공부한 인도-유럽어의 어근에 관한 기억이었다. ‘카드(kad)’라는 단어는 증오와 고통을 동시에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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