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이 프로젝트는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바로 주변에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노력이 있다면, 치매 환자도 얼마든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치매 환자를 과소평가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점이다.
..치매 환자를 대할 때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이해하려는 관용과 배려만 있다면 우리 사회는 소중한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들도 저마다 개성을 갖고 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가득 채워졌을 때는 상대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요시코 할머니는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 ‘아직은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간병이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살아가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필요한 곳에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온전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살아가고, 더 이상 그 힘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게 되면 치매가 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사용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닐까요."

.."치매 환자는 평생 자신의 의사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억제당해 온 역사 그 자체인 거지. 하지만 인간이 왜 멋진 존재인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인간이, 자신의 뇌가 무너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가장 멋진 것을 빼앗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최대한 그것을 지켜주는 것, 그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우리에게 스스로 선행을 한다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틈새를 비집고 응석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좋은 일 하는 건데 약간의 빈틈은 용서되겠지’라는 생각은 절대 안 된다. 그런 응석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타협이 생기고 질 떨어지는 요리가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껏 틀린다는 행위 또는 치매라는 병은 사회적으로 볼 때 ‘비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비용’으로 여기던 것이 돌변하여 어마어마한 ‘가치’로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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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골라준 음식이었다면, 영어 메뉴를 보고 고른 것이었다면, 비싼 코스 요리의 일부로 나온 것이었다면, 이렇게 평생 기억할 만한 추억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준비의 가장 큰 장점은 여행이 풍성해지는 게 아니라 추억이 풍성해지는 거다. 여행을 앞두고 그 나라 말을 조금만 공부하면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메뉴판을 읽고 원하는 걸 주문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익히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나는 한국인의 영어 실력을 세 단계로 나눈다. 돈 쓰는 데 필요한 영어가 가능한 사람은 중간 레벨이다. 이 책의 독자 대부분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나도 여기에 속한다. 영어를 사용하며 돈을 쓸 수는 있는데, 돈을 벌지는 못한다. 돈 버는 데 필요한 영어까지 가능한 사람이 상위 레벨에 있고, 영어가 잘 안 통해서 돈을 쓰는 데도 적지 않은 불편함을 겪는 사람이 하위 레벨이다.

..부모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의 최대 장점은 여행 이후에 드러난다. 겨우 며칠의 여행이 최소 몇 년 동안의 대화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 간의 대화 소재도 되고, 두 분의 대화 소재도 되며, 부모님이 친구들에게 은근히 자랑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도 된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여행 상품을 사드리는 것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함께한 시간’이고 ‘함께 만든 추억’이다. 함께 한 여행은 눈에 보이는 비용보다 더 귀중한 ‘시간’이 투입된 것이라, 당연히 더 오랫동안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향기가 오래가는 꽃처럼.

..『질문이 답을 바꾼다』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두 가지다. 인정받는 것, 그리고 상대가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 (…) 상대가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있어도, 너무 많이 들어준다고 불평할 사람은 없다."

..물론 잊어버린다. 한가할 때 가끔씩 그 별들을 이것저것 눌러보는데, 도대체 내가 무슨 이유로 별을 붙여놓았는지 알 수 없는 장소들도 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 나중에 돌이켜보면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에 쓸데없이 마음을 빼앗겨 연연했던 것처럼, 그때 그곳에 별을 붙인 사람도 나고, 지금 다시 보며 이 별을 지우는 사람도 나다. 그렇게 별들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유난히 오랫동안 유별나게 반짝이는 별도 있고, 한동안 별이었다가 소리 소문 없이 먼지가 되는 별도 있다.

..대신 언젠가 꼭 가보겠다고 마음먹은 경기장은 참 많다. 그중에서도 다음 세 곳은 정말 가고 싶은데, 접근성이 워낙 떨어지는 곳들이라 언제쯤 꿈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노르웨이 로포텐 제도에 있는 헤닝스베르 스타디움Henningsvaer Stadium, 크로아티아 이모트스키에 있는 스타디온 고스핀 돌라치Stadion Gospin Dolac, 그리고 아이슬란드 베스트만나에이야르에 있는 하스테인스뵐루르 스타디움Hasteinsvollur Stadium.

..짧은 여행 중에 그 나라의 독특한 시스템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뭔가 특이한 점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연원을 깊이 이해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러니 여행 전후에 여행지에 관한 책을 읽거나 여행 중에 그들이 사는 방식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그런 맥락을 이해하는 데, 나아가 우리 생활에 필요한 교훈이나 아이디어를 얻는 데,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며 쓸데없이 우기거나 타인에게 간섭하는 행위를 줄이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된다. 여행자는 호기심이 많고 고집은 적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시가키에서 배를 타고 4시간을 더 가면, 요나구니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일본의 최서단. 비행기로 갈 수도 있다. 나하에서는 1시간 20분, 이시가키에서는 30분 거리다. 이 섬은 1986년에 우연히 발견된 해저 지형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인공적으로 만든 것인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인지 아직 규명되지 않은 매우 이상한 형상들이 수심 3미터에서 25미터 사이에 퍼져 있다. 사진을 봐서는 도저히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워 보이는데,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게 어떻게 바닷속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이빙이 가능하면 직접 들어가서 볼 수 있고, 나처럼 수영도 못하는 사람들은 글라스보트나 반잠수정을 타고 둘러볼 수 있다. 가깝지만 먼 곳. 여기도 언젠가 가볼 수 있을까?

..외교관 출신의 우동집 사장님인 신상목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를 일본 여행 전이나 후에 읽으면, 아, 그게 다 역사적 맥락이 있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 사람이라면, 다음번 도쿄를 방문할 때 ‘에도도쿄박물관’이라는 곳에 가보기를 추천한다. 그 책의 실사판이 그곳에 구현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실용적인 제품을 사는 것만으로 여행 중의 쇼핑 욕구가 전부 채워지지는 않는다. 쓸모는 없더라도, 오로지 추억을 만들고 그 여행을 기념하기 위한 물건도 사야 한다. 여행은 결국 즐거운 기억을 더 많이 남기기 위해서 가는 거 아닌가. 우리의 한정된 기억 공간에 즐거운 기억을 꾸역꾸역 집어넣어서, 어느 날 랜덤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맛이 씁쓸하지 않고 달콤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쓰는 거 아닌가. 사진도 그래서 찍는 거고. 아무 기념품도 사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사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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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송영호 군이 마악 하숙집 문앞을 나서는데, 마침 그의 단짝 강선필 군이 딸딸거리고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에구, 저 망나니를 또 만났으니!"
..사람 좋은 송영호 군은, 속으로 이렇게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송영호 군은 친구 강선필 군이 싫거나 미운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반가왔을지언정.
.."비금속 외출야?"
..강선필 군이 빙긋 웃으면서 건네는 인사다. 비금속(非金屬)이란, 돈이 없단 뜻이다.

.."비싸나마나 영호야?"
.."…"
.."‘말똥거리’ 이야기 못 들었늬?"
.."고만둬!"
.."아, 말똥거리란 놈이 말똥거리라껀 솔개미의 일종이야. 그 말똥거리란 놈이, 아침 일찌감치 공중에 가 뚜둥뚱 떠선 한닷 소리가, 꽁이나! 까투리나! 꽁이나 까두리나!"
.."먹구 싶단 말잉가?"
..S가 묻던 것이고, 강선필 군은 고개를 끄떡.
.."아므렴! 그렇지만 제가 어데, 꽁을 잡을 재주가 있나! 그래 오 때가 되자 속은 출출하구, 하니깐 이번엔 한닷 소리가, 까지나! 참새나! 까치나! 참새나! 아, 그렇지만 제 재주에 까치나 참샌 또 잡나? 해가 그만 저물었다. 해가 저무니깐 그땐 한닷 소리가 내 주제에 무슨! 인전 가서 말똥구이나 허부적거리지! 그러면서 말똥을 찾어가드란다. 그래서 그 짐승이 이름이 말똥거리야!"

..오라는 사람은 없어도 꼭이 볼 일은 없어도, 가고 싶은 것이 종로였다. 더구나 며칠 여행으로 일참을 번진 차이니 한결 마음은 궁금했다.
..이쁜이?
..물론 보고 싶었다. 그러나 특별히, 이쁜이만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쁜이, 모리나가, 커피, S 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아는 친구들, 이렇게들이 있는 종로. 그 종로가 궁금한 것이고, 이쁜이가 보고 싶은 것도 그러한 종로가 궁금함의 일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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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 허나 꿈을 꿀 때면, 땀에 흠뻑 젖고는 놀라서 깬다. 이럴 때는 곧장 다시금 잠을 청하지 않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의 무방비한 마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다.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는 길몽도 흉몽도 꾸지 않았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지난 퇴적층으로부터 굳게 다져진 공포가 계속해서 나를 휘감았다. 그 꿈은 내가 겪어봤을 법한 것보다 훨씬 비극적인, 더 잘 짜여진 구성을 하고 있기에 더욱 공포스럽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그 꿈속의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에메렌츠는 헤라클레이토스(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하다—옮긴이)를 배우지는 않았으나,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사라져버린 것들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내 얼굴 어딘가에 드리워진 고향 집의 그늘을, 그리고 잃어버린 한때의 내 집을 찾아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떠나온 고향을 오갔다. 물론 물방울들 사이에서 내 인생의 조각들이 휘말려버린 그 강은 이미 굽이져 흘러버렸으니 그곳에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에메렌츠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현명했는데, 과거를 위해 미래에 그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에너지를 비축해두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인지하는 것은 아직 요원했다.

...에메렌츠는 몸을 정결하게 한 후 옷만 바꿔 입었지 절대 눕는 경우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침대가 없었고, ‘연인들의 의자’라고 불리는 작은 소파, 그 안락의자에서 선잠을 잤다. 누울 때면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머리에 떠오르기에 그녀는 오직 앉은 채 적당히 아픈 허리를 기댈 뿐이었다. 누우면 현기증이 나니까 침대는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네안데르계곡의 원시인이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잡은 들소를 집으로 끌고 왔으나, 사냥의 경험을 나눌 누군가도 없고 그 사냥감을 보여줄, 자신의 상처들을 보여줄 그 누군가가 없음을 처음으로 경험했을 그때, 그는 분명 눈물 흘리는 법을 배웠으리라....

..그녀는 구석으로 몸을 돌렸다. 중요한 일인 경우 에메렌츠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유가 있든 없든 나는 알 수 없겠지만, 누군가 그날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던 것은 분명했다. 모든 것에는 논리적이고 단순한 설명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에메렌츠만은 그 논리적이고 단순한 설명의 해석에 있어서 나와 달랐다. 다른 어떤 사람들도 감을 잡지 못한 것을 그녀는 단 1초 만에 파악하는 만큼, 반대로 그만큼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았다....

..또다시 한참이 지난 후 내 삶의 가장 비현실적인 순간들 중 한때인, 망자가 된 에메렌츠의 삶의 흔적들을 훑어보고 있었을 때, 얼굴 없이 아름다운 신체 형태로 만들어진 어머니의 그 옷걸이 마네킹을 정원의 풀밭에서 보았었다.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우기 전에, 나는 거기에서 세속을 가르는 에메렌츠의 성스러운 벽화를 보게 되었다. 그로스만 가족, 남편, 비올라, 총경, 조카, 빵집주인과 변호사의 아들, 그리고 반짝이는 금발에 머리 장식을 한 채 하녀 복장을 입고 팔에는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있던 그녀, 젊은 에메렌츠. 우리들 모두의 사진이 옷걸이 마네킹의 가슴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애정은 온화하고 규정된 틀에 맞게, 또한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대신해서도 그 애정의 형태를 내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비올라는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마치 내 속에 감히 에메렌츠에게 가고자 하는 그 정도의 용기가 있는지, 내 결정의 배경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우리는 어쨌든 창작의 평온함만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 정도만은 아닌지, 또는 이렇게 에메렌츠를 찾는 것으로 그녀의 인간적 존엄에 대한 의무를 내가 각성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런 인간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반反인텔리주의자, 그러니까 에메렌츠가 언젠가 그 자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고, 이 표현을 알거나 사용했을 법도 했으나 그랬던 기억은 없다. 하지만 반인텔리주의자, 그녀가 바로 그랬다. 에메렌츠는 반인텔리주의자였으며, 그녀의 의식 속에서 오직 그녀의 감정들만 가끔씩 예외를 행했다. 이른바 물렁한 양반 세상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독특하게 형성되었는데, 그녀의 눈에는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할 일을 수행하지 않고 타인이 그 일을 대신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즉시 인텔리겐치아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이 그 암소를 잡아서 고기 근을 매겼어요. 도살하고 토막 내는 광경을 나에게 끝까지 보여주었어요. 내 느낌이 어땠는지는 묻지 마세요. 누구도 죽음에 이를 정도로 사랑하지 말라는 교훈을 당신이 얻었으면 해요. 슬퍼하게 될 거예요. 지금 바로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라도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의 그 누군가를 도륙할 일도 없을 것이고, 그 대상 또한 열차에서 어디로 뛰쳐나갈 필요가 없겠지요....

...에메렌츠는 관대하고 좋은 사람, 기꺼이 자기 것을 남에게 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부정하지만, 행동으로 하느님을 존경하며 헌신적이다.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의식적으로 강제해야 하는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이에 대해 모르고 있다 해도 중요치 않다. 에메렌츠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 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나는 단지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 뿐이며, 일정한 윤리적 표준을 염두에 두고서 나중에 스스로를 옥죄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에메렌츠가 이 주제에 관해 한마디 말도 않고서, 내가 신앙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불교의 한 종류이며 전통에 대한 존중일 뿐이라는 것을 나에게 확인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윤리 또한 단지 훈육이며 어린 시절 집안에서, 내가 다닌 학교들에서, 지금의 가정에서, 그리고 나 자신이 부여한 훈련의 결과일 뿐임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성금요일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더 적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에메렌츠는 이미 그녀 자신도, 자신의 고양이들도 다른 누구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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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생양이 되기보다는 가해자가 되는 쪽을 택하겠다.

..나는 폭압에 익숙해졌다. 집에서의 학대가 일상생활이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몰랐다. 계속해서 경계하는 것이 나의 일반적인 행동이 되었고, 미친 소리 같지만 이런 상황이 편안해졌던 것이다. 이렇게 계속된 스트레스가 내 정신과 감각, 감정의 형태를 다듬었다. 이 가족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사용한 대응 기제가 내가 아는 전부가 되었다. 그게 나 자신이 되었다. 그래서 가족 내 체계가 사라지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변호사 선서식에 소냐 언니와 헤라르트 오빠, 엄마를 초대했다. 엄마는 딸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아들이 중범죄를 저지른 것이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었다. 엄마는 법의 올바른 쪽에 또 다른 자식을 두게 되었다. 내가 우리 가족 내에서 선과 악의 균형을 복구해준 것 같았고, 엄마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돼서 나도 기뻤다.

..내가 남자아이였으면 딱 오빠처럼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폭력과 허세에 빠지는 걸 막아주었던 건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대신에 내가 내 지적 능력을 사용해서 비슷한 삶을 걷는 것을 막았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우연을 갖고 내가 어떻게 오빠를 비난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과연 오빠한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오빠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꽤나 "똑같은" 사람들인데.

..그 애가 일어서서 옷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엄마 냄새를 간직해둬야겠어요. 엄마 냄새가 묻어 있는 물건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놔야겠어요. 그러면 최소한 엄마가 더 이상 여기 안 계셔도 냄새를 맡을 수 있잖아요."
..내 심장이 부서졌다. 이런 삶이라니. 죽음은 나에게 포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엄청난 슬픔을 남겨두고 가야 했다.

..데 분커르 법원까지 나를 데리고 갈 호송 차량에 타기 전에 나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흥분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 시절의 생존 기제를 일깨우고 압도적인 상황에서 어릴 때 내가 하던 행동을 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내 눈 뒤쪽에’ 앉았다. 물리적으로는 여기에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내 몸을 떠나 먼 곳에서 쳐다보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내 몸 안의 감정이 약화되고 안전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죽음을 갈망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사는 게 아니었다. 어깨의 짐이 너무 무거웠다. 그게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밖에 나갈 때마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오빠는 다시는 바깥에 나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근본적으로 우린 둘 다 이미 죽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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