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면 일이 줄어들까 봐 무리해서 수락한 탓에 바쁠 때에는 힘들도록 바쁘고, 일이 없을 때는 바다 밑바닥까지 주저앉는 생계의 파도. 그 말에 슬프게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북적거리는 열차에 오른 후 시간이 흐르자 금방 한산해졌다. 점점 사람이 줄어들며 어딘가에 도착하는 걸 좋아한다. 도쿄는 그 감각이 사방으로 가능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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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하고 다르거나 좀 나은 점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를 거의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물론 나는 인간이지, 경험치와 레벨에 비례한 능력값이 딱 떨어지게 수치화되어 있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므로, 체력과 정신력이 현재 몇 퍼센트 남았는지, 얼마나 쉬어야 완전히 회복되는지 같은 것은 당연히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나의 한계다.

..자려고 누웠더니 눈물이 났다. 똑바로 눕는 것이 어색했다. 경아가 입관할 때의 이미지를 뇌리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돌아누우면 돌아눕는 대로 눈물이 오른쪽, 왼쪽으로 흘러내렸다. 뒤척이는 기색이 옆방까지 들렸는지 벽에서 쿵쿵 주먹질 소리가 났다.
..미친년이 또 지랄이네.
..늘 하던 것처럼 속으로 욕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이런 것이 일상이겠지, 또는 이런 것이 일상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똑바로 누웠다.

...어찌어찌 사람 행세를 하고는 있지만 사람으로서의 본질적인 기능,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상실된 것 같은 느낌을 가누어가며 부랴부랴 카페를 빠져나왔다.

..일요일에 늦잠을 자고 교회에 간 엄마와 경아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가끔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어느 날 예수가 그 자매의 집에 방문했는데, 언니인 마르타가 예수와 다른 손님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할 동안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 앞에 앉아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는 이야기.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이리와서 언니의 일을 도와달라고 했더니 예수는 오히려 마르타를 나무라며, 마리아가 지금 하는 일이 마르타 당신의 일보다 덜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던가. 그런 식이다. 신데렐라의, 콩쥐의, 마리아의 자매는 나쁜 사람으로 기록된다. 선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르고 시샘이 많은 자매가 있다. 그렇다고들 한다.

..경아가 보내준 사진들을 생각하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최후를 맞을까 자문하게 되곤 했다. 대단히 영예롭거나 기억할 만한 죽음 같은 건 상상하기도 어렵고 딱히 끌리지도 않았다. 조용하고 평범한 시체가 되는 일에도 사실은 상당한 운이 필요했다. 재수가 없으면 끔찍하게, 우스꽝스럽게, 원치 않는 장소에서 믿을 수 없이 민망한 상태로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대해 나는 필요 이상으로 자주,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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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누나가 죽은 뒤 왠지 나를 대하는 두 분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나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것 같았다. 살아남았으니까. 또한 그때 이후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계속 부모님을 실망시켰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금에 쌓이는 이자처럼 작은 실망들이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였다. 이자가 많이 쌓이면 우리는 그 이자를 믿고 편안히 은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남이었다...

...나의 과거는 결핍과 학대로 얼룩지지 않았다. 나는 그 손길이 반가웠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나는 그 손길을 원하고, 갈망하고, 반가워했다. 내가 그토록 깊은 상처를 입고 어쩔 수 없이 방랑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순전히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 뼈가 너무 크게 자라버려서. 난 버림받았다. 아이들은 영원히 어린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글래든은 구체적인 이름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다른 놈들처럼 학대당했다는 핑계는 내놓았지. 어렸을 때 성적 학대를 당했대. 반복적으로. 학대당할 당시 그놈의 나이는, 나중에 그놈이 탬파에서 피해자로 삼은 아이들의 나이와 같았어. 이렇게 일이 돌고 도는 거야. 이런 패턴을 자주 봐. 자기 삶이… 파괴된 그 순간에 고착돼 있는 거지."

..나는 여기서 말을 멈췄다. 이 이야기를 계속할수록 내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 힘에 도취하기 쉬운 법이다. 나는 여러 사실들을 묶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내 능력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밤이 되면, 내가 가장 원하는 사람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내 마음속 망령이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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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p.
...Then, pressing the keys into my hand, she, gave me a strange look and said, "Be careful!" It was that look my mother would give us when we were children, to warn us that life held unsuspected traps that were far deeper and more treacherous than, for instance, any consequence of failing to take proper care of a key.

28p.
...She looked out the window; in her eyes was the light that you see only in children arriving at a new place, or in young people still open to new influences, still curious about the world because they have not yet been scarred by life....

75p.
..Istanbul‘s streets, bridges, hills, cinemas, buses, crowded squares, and isolated corners were filled with these shadowy Uncles Sleaze, Shithead, and Ugly, who, though they appeared like dark specters in her dreams, she could not bring herself to hate as individuals ("Perhaps it was because none of them ever really shook me to the core")....

98p.
...But to designate this as my happiest moment is to acknowledge that it is far in the past, that it will never return, and that awareness, therefore, of that very moment is painful. We can bear the pain only by possessing something that belongs to that instant. These mementos preserve the colors, textures, images, and delights as they were more faithfully, in fact, than can those who accompanied us through those moments.

134p.
..At times like this what matters is not our words but our demeanor, not the magnitude or elegance of our grief but the degree to which we can express fellowship with those around us. I sometimes think that our love of cigarettes owes nothing to the nicotine, and everything to their ability to fill the meaningless void and offer an easy way of feeling as if we are doing something purposeful....

195p.
.."That same night I was at home and looking through my drawers for a missing glove, and I found a handkerchief that Necdet had given me as a present many years before. Maybe it was a coincidence. But I don‘t think so. I learned a lesson from this. When we lose people we love, we should never disturb their souls, whether living or dead. Instead, we should find consolation in an object that reminds you of them, something... I don‘t know... even an earring."..

303p.
.."In Europe the rich are refined enough to act as if they‘re not wealthy. That is how civilized people behave. If you ask me, being cultured and civilized is not about everyone being free and equal; it‘s about everyone being refined enough to act as if they were. Then no one has to feel guilty."

315p.
..To readers and museum visitors who are curious to know whether the pain I endured that day was owing to the death of my father or to Füsun‘s absence, I would like to say that the pain of love is indivisible. The pains of true love reside at the heart of our existence; they catch hold of our most vulnerable point, rooting themselves deeper than the root of any other pain, and branching to every part of our bodies and our lives. For the hopelessly in love, the pain can be triggered by anything, whether as profound as the death of a father or as mundane as a piece of bad luck, like losing a key; such elemental pain can be flamed by any sort of spark. People whose lives have, like mine, been turned upside down by love can become convinced that all other problems will be resolved once the pain of love is gone, but in ignoring these problems they only allow them to fester.

331p.
..The blue glare of a lightning bolt flashed between us like a swath of silk in the wind.

353p.
...One evening, when I had placated the djinns of love and found peace in Yani‘s Place, just by sitting across from Füsun, I recall being struck by the simple, ineluctable formula: Happiness means being close to the one you love, that‘s all. (Taking immediate possession is not necessary.)....

396p.
..My life has taught me that remembering Time—that line connecting all the moments that Aristotle called the present—is for most of us a rather painful business. When we try to conjure up the line connecting these moments, or, as in our museum, the line connecting all the objects that carry those moments inside them, we are forced to remember that the line comes to an end, and to contemplate death. As we get older and come to the painful realization that this line per se has no real meaning—a sense that comes to us cumulatively in intimations we struggle to ignore—we are brought to sorrow. But sometimes these moments we call the "present" can bring us enough happiness to last a century, as they did if Füsun smiled, in the days when I was going to Çukurcuma for supper. I knew from the beginning that I was going to the Keskin house hoping to harvest enough happiness to last me the rest of my life, and it was to preserve these happy moments for the future that I picked up so many objects large and small that Füsun had touched, and took them away with me.

462p.
...After all, isn‘t the purpose of the novel, or of a museum, for that matter, to relate our memories with such sincerity as to transform individual happiness into a happiness all can share?....

510p.
..We looked at the views of the city that served as backgrounds for Füsun‘s paintings of Istanbul birds, but far from lifting my heart, this exercise brought me sorrow. We loved our world very much, we belonged to it, and that meant we ourselves were part of the picture‘s innocence.

573p.
..Those last words came out of my mouth of their own accord. Suddenly I felt as if Zaim was regarding me from a great distance; he had already given up on me a long time ago, and was only now accepting that he couldn‘t be alone with me anymore. As he listened to me he was thinking not of me, but of what he would tell his friends. I could read his absence in his face now. And because Zaim was an intelligent man such signals as I had just given were not lost on him, and I could tell that he was angry at me in return. And so the distance was perceptible from either perspective: Suddenly I, too, was seeing Zaim, and my entire past, from a point very far away.

575p.
...In those days I‘d ceased to think of my life as something I lived in wakeful consciousness of what I was doing: I‘d begun instead to think of it as something imagined, something—just like love—that issued from my dreams, and as I had no wish either to fight my growing pessimism about the world or to surrender myself to it unconditionally, I acted as if no such thoughts had entered my mind. It might be said that I had decided to leave everything as it was....

599p.
..It was as if I were looking at a panoramic miniature painting, not just of the Bosphorus and the city, but of the life I‘d left behind. It felt like a dream, this sense I had of being far from the city and my own past. To have reached the middle of the city, in the middle of the Bosphorus, to be so distant from everyone else but together with Füsun, felt like the chill of death. When a wave larger than the others hit Füsun unexpectedly and she let out a shriek, and wrapped her arms around my neck and shoulders to hold on, I knew then that only death would part us.

679p.
..But as soon as I had boarded the plane, I realized that I had set out on this voyage both to forget and to dream. Every corner of Istanbul was teeming with reminders of her. The moment we were airborne, I noticed that outside Istanbul, I was able to think about Füsun and our story more profoundly. In IstanbulI‘d always seen Füsun through the prism of my obsession; but in the plane I could see my obsession, and Füsun, from the outside.

687p.
...One could gather up anything and everything, with wit and acumen, out of a positive need to collect all objects connecting us to our most beloved, every aspect of their being, and even in the absence of a house, a proper museum, the poetry of our collection would be home enough for its objects.

691~692p.
..But the Bashful collect purely for the sake of collecting. Like the Proud, they begin—as readers will have noticed in my own case—in pursuit of an answer, a consolation, even a palliative for a pain, a resolution of difficulty, or simply out of a dark compulsion. But living in societies where collecting is not a reputable act that contributes to learning or knowledge, the Bashful regard their compulsion as an embarrassment that must be hidden. Because in the lands of the Bashful, collections point not to a bit of useful information but rather to a wound the bashful collector bears.

700p.
...I could pass the night in the company of each and every object in my collection—commune with the entire edifice. Real museums are places where Time is transformed into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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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내게 보여 준 새로운 세계는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이상하면서도 놀라운 것이어서, 이 세계 속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기 위해 현재와 관련된 무엇인가를 느껴야 한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책에서 고개를 들고 내 방이나 옷장, 침대 혹은 창밖을 보았을 때 내가 알던 세상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이 여행을 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내 앞에 나타날 것 같다가도 사라져 버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더 찾고 싶게 만드는 시선을, 오랜 세월 동안 죄악이나 불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던 부드러운 시선을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되고 싶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날에, 주머니 속에는 사용한 극장표와 담배꽁초가 들어 있고, 머릿속에서는 신문기사와 자동차 소음, 구슬픈 말들이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 매일매일의 일과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갑자기 자신이 엉뚱한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발을 내디뎠던 그곳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유리창 뒤에 서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옅은 색보다도 더 옅은 색 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그다음엔 베이올루 시립 병원에 들렀다. 그런데 아까 저쪽 병원에서 보았던, 서로를 칼로 찌른 친구들과 옥도정기(요오드팅크)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한 여자들, 팔이 기계에 끼거나 손가락이 바늘에 찍힌 견습생들, 버스와 정류장 사이에, 혹은 배와 부두 사이에 끼여서 실려 온 승객들이 여기에도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굉장히 조심해 가며 경찰에 진술을 했다. 내가 품고 있는 의혹을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한 경찰관을 위해 비공식적인 진술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산부인과가 있는 위층에 올라가자, 이제 막 행복한 아기 아빠가 된 사내가 친절하게 우리 모두의 손에 라벤더 화장수를 뿌려 주었는데, 그 향기를 맡고 나는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불이 밝혀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상상했다. 너무나 간절히 소원하며 상상했기 때문에,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지저분한 하얀 벽 앞 희미한 오렌지색 전등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한순간 본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너무나 가슴 벅찬 자유의 느낌이 밀어닥쳐서, 난 너무나 놀랐다. ‘모든 게 이렇게나 단순한 거였어.’라고 생각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 내 방의 남자는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방으로부터, 집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어머니의 냄새로부터, 내 침대로부터, 22년 동안 살아온 내 인생으로부터 달아나야만 했다. 새로운 인생은 그 방을 떠나야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침마다 그 방을 나와서 밤마다 그 방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한, 자난이나 그 나라, 둘 중 어느 쪽에도 가까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버스에 올라탔고, 수많은 버스에서 내렸다. 수없이 많은 터미널을 돌아다니며 버스에 올랐고, 버스에서 잠을 잤다. 밤낮으로 버스를 탔다. 작은 마을에서 버스에 타고 내렸다. 며칠 동안 어둠 속을 달리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젊은 여행자는 미지의 영역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나 확고해서, 그를 새로운 세계의 입구로 데려다줄 길에서 쉼 없이 이동하는구나.

...의치를 한 어느 중년 남자는 "내 시계는 모바도라 절대 틀리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가 입을 벌리고 자고 있을 때, 나는 그 정확한 시계가 똑딱이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시간은 무엇인가? 사고다! 인생은 무엇인가? 시간이다! 사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 새로운 인생이다! 지금껏 이런 것을 생각해 낸 사람이 없었다는 데 놀라워하며, 나는 이 단순한 논리에 굴복하여 버스 터미널로 가는 대신, 오 천사여, 곧장 사고 현장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천사에 관해, 그리고 그의 성숙하고 진지한 의붓오빠처럼 보이는 죽음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자난이 노점에서, 모퉁이 철물상에서, 한가한 잡화상에서 흥정 끝에 산 후 잠시 좋아하며 만지작거리다가 터미널 찻집이나 버스 좌석에 놓고 내린 허름한 물건처럼, 연약하고 허약한 말들로 이어 나갔다. 죽음은 모든 곳에 있었다. 그곳에 가장 많았다. 바로 그곳에서 죽음이 모든 장소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화면 안에 또 다른 텔레비전의 모습이 보였다. 그 화면 안에 또 다른 화면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푸른빛을 보았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그 무엇. 그렇지만 죽음은 아주 멀리 있었다. 빛은 우리가 탄 버스들이 돌아다녔던 광활한 벌판에서 하릴없이 맴돌았다. 그리고 아침, 달력에서 많이 보았던, 동트는 장면이 보였다. 이것은 천지가 창조되던 그 여명의 순간처럼 보였다. 낯선 마을에서 술에 취해, 애인은 호텔 방에서 자고 있고, 인생이 무엇인지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친구들과 양복점에 앉아, 갑자기 인생이 무엇인가를 화면으로 보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미적미적거리는 해가 채 다 내리쬐지 못한 언덕을 오를 때, 나린 박사는 내게 물건들도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물들도 그들이 경험한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들을 저장해 두는 부분을 갖고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물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 이해하고 속삭이며 서로 간에 비밀스러운 하모니를 만든다네. 그 음악이 바로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고 있지." 하고 나린 박사는 말했다.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있어." 땅에서 주운 마른 나뭇가지에 석회질이 묻은 것을 보고 그는 이곳에 개똥지빠귀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것을, 진흙의 흔적을 보곤 이 주 전에 내렸던 비에 나뭇가지가 어떻게 부러졌을지를 내게 설명했다.

..천사여, 두 개의 산 사이에 끼어 있는 아마시아시에서, 한밤중에 진열장 앞에 선 채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어. 아이들에게 묻곤 하잖아. 얘야, 왜 우니 하고. 사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울면서도, 아이는 물어 보는 아저씨에게 파란색 연필깎이를 잃어버려서 운다고 말하지. 그와 비슷한 슬픔이 진열장에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던 나를 덮친 거야. 무심코 살인자가 되고 싶었을 때 내게 엄습했던 그 느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이제 나는 영혼 깊은 곳에서 이 무시무시한 고통을 느끼면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걸까? 건과 가게에서 해바라기 씨를 살 때, 아니면 나 자신을 비춰 볼 거울 몇 개를 식료품점에서 살펴볼 때, 아니면 냉장고와 난로들로 가득한 행복한 삶을 볼 때, 내 속에 있는 저주스럽고 사악한 목소리가 (봐, 이빨을 드러내는 비열한 검은 늑대를) 으르렁대면서 너는 유죄라고 외쳐 댄다. 하지만 천사여, 나도 한때는 인생을, 선행을 믿었어.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믿을 수 없는 자난과, 내가 믿는다면 내가 곧 죽여 버려야 할 메흐메트 사이에 끼어서, 발터 권총과 행복한 삶에 관한 환상 외에는 달리 매달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 불신과 불안이 극단적으로 얽혀 있는 계획에 바탕을 둔 오리무중의 상상 말이야. 내 마음속에는 냉장고들, 오렌지 짜는 기계들, 월부로 판매하는 안락의자들의 이미지가 소리 없는 통곡을 반주로 해서 차례로 흘러 지나갔어.

..한순간 마음속에서 질투심이, 사악한 짓을 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났다. 그러나 나는 더욱더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아챘다. 내가 지금 총을 꺼내서 그의 눈동자를 쏜다 해도, 그는 책을 베끼는 행위를 통해 이미 영원한 시간의 균형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지한 시간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계속 존재해 나갈 것이다. 쉼 없이 불안에 떠는 나의 영혼은 목적지를 잊어버린 버스 운전사처럼 어디로든 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책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어쩌면 모든 책이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세상의 정적 또는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그 무엇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적과 소음도 그것 자체는 아니야."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내가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봐 다시 한번 다른 말로 설명하고자 했다. "좋은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종의 무(無), 일종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지…… 그렇지만 단어들 너머에 존재하는 나라를 글과 책 밖에서 찾는 것은 헛일이야." 그는 이것을 책을 반복해 쓰면서 알았고, 충분히 배웠다고 말했다. 새로운 인생과 나라를 글 밖에서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나를 죽이려 했던 살인자는 서툴렀어. 어깨에만 상처를 입혔거든."

..나는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단지 내 온 인생을 바꾸어 버린 책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러나 책을 읽을 때, 나는 상처 입은 내 인생에 깊은 어떠한 의미를 주려고도, 위안을 찾으려고도, 더욱이 슬픔의 아름답고 존중할 만한 부분을 찾으려고도 절대 시도하지 않았다. 체홉에게, 폐렴에 시달리는 그 재능 있고 겸손한 러시아인에게 사랑과 경탄 이외에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헛되이 지나 버린 상처받고 슬픈 인생을 체홉주의라는 감성으로 미화시키고, 인생의 빈곤함에 대해 으스대면서 아름다움과 숭고한 감정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리고 위안을 구하는 이러한 독자들에 응하는 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약삭빠른 작가들을 혐오한다. 이 때문에 나는 많은 현대 소설들을 읽다가 말고 도중에 덮어 버리곤 한다. 아, 말[馬]과 대화하면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슬픔에 가득 찬 남자. 아, 자신의 사랑을 하염없이 물을 주던 화분 속 꽃들에게 바친 무력한 귀공자. 허름한 의자에 앉아서 절대 오지 않을 편지를, 옛날 애인을 또는 이해심 없는 딸을 기다리는 예민한 남자. 우리에게 계속해서 상처와 아픔을 전시하는 이 주인공들을, 체홉을 투박하게 모방하고 훔쳐서 다른 지형과 기후에서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작가들도 사실상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보시오, 우리를,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보시오, 우리는 얼마나 예민하고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특별한가요! 고통은 우리를 당신들보다 더 섬세하고 감성적이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되고 싶고, 당신의 불행을 승리로, 특히 우월함으로 바꾸고 싶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믿으십시오. 우리의 슬픔이 인생의 평범한 즐거움보다 더 멋지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사탕 그릇을 계속 쳐다보았다. 내가 왠지 모를 죄책감과 불편함을 느꼈다고 말한다면 독자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만 말해 두자. 내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기억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은제 사탕 그릇에 거울과 같이 방 전체와 나, 그리고 라티베 아주머니가 동그랗게 휘어져서 비쳐 있었다. 얼마나 마법 같은가. 한순간 세상을, 우리의 눈이라고 말하는 열쇠 구멍을 통해서가 아니라, 잠시 동안 일종의 다른 이성의 렌즈 체계를 통해 보는 것이. 영리한 아이들은 이것을 이해한다, 영리한 어른들은 이에 미소 짓는다. 독자여, 내 이성의 반은 다른 곳에 있었고, 나머지 반은 또 다른 곳에 신경 쓰고 있었다. 당신들에게도 무엇인가를 기억하려다가, 기억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기도 전에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기억하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 일어나는가.

...나처럼 인생을 망친 사람들에게 슬픔은 영리해지려고 노력하는 분노로 나타난다. 그리고 영리해지려는 열망은 결국 모든 것을 망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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