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내게 보여 준 새로운 세계는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이상하면서도 놀라운 것이어서, 이 세계 속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기 위해 현재와 관련된 무엇인가를 느껴야 한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책에서 고개를 들고 내 방이나 옷장, 침대 혹은 창밖을 보았을 때 내가 알던 세상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이 여행을 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내 앞에 나타날 것 같다가도 사라져 버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더 찾고 싶게 만드는 시선을, 오랜 세월 동안 죄악이나 불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던 부드러운 시선을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되고 싶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날에, 주머니 속에는 사용한 극장표와 담배꽁초가 들어 있고, 머릿속에서는 신문기사와 자동차 소음, 구슬픈 말들이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 매일매일의 일과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갑자기 자신이 엉뚱한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발을 내디뎠던 그곳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유리창 뒤에 서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옅은 색보다도 더 옅은 색 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그다음엔 베이올루 시립 병원에 들렀다. 그런데 아까 저쪽 병원에서 보았던, 서로를 칼로 찌른 친구들과 옥도정기(요오드팅크)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한 여자들, 팔이 기계에 끼거나 손가락이 바늘에 찍힌 견습생들, 버스와 정류장 사이에, 혹은 배와 부두 사이에 끼여서 실려 온 승객들이 여기에도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굉장히 조심해 가며 경찰에 진술을 했다. 내가 품고 있는 의혹을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한 경찰관을 위해 비공식적인 진술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산부인과가 있는 위층에 올라가자, 이제 막 행복한 아기 아빠가 된 사내가 친절하게 우리 모두의 손에 라벤더 화장수를 뿌려 주었는데, 그 향기를 맡고 나는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불이 밝혀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상상했다. 너무나 간절히 소원하며 상상했기 때문에,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지저분한 하얀 벽 앞 희미한 오렌지색 전등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한순간 본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너무나 가슴 벅찬 자유의 느낌이 밀어닥쳐서, 난 너무나 놀랐다. ‘모든 게 이렇게나 단순한 거였어.’라고 생각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 내 방의 남자는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방으로부터, 집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어머니의 냄새로부터, 내 침대로부터, 22년 동안 살아온 내 인생으로부터 달아나야만 했다. 새로운 인생은 그 방을 떠나야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침마다 그 방을 나와서 밤마다 그 방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한, 자난이나 그 나라, 둘 중 어느 쪽에도 가까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버스에 올라탔고, 수많은 버스에서 내렸다. 수없이 많은 터미널을 돌아다니며 버스에 올랐고, 버스에서 잠을 잤다. 밤낮으로 버스를 탔다. 작은 마을에서 버스에 타고 내렸다. 며칠 동안 어둠 속을 달리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젊은 여행자는 미지의 영역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나 확고해서, 그를 새로운 세계의 입구로 데려다줄 길에서 쉼 없이 이동하는구나.
...의치를 한 어느 중년 남자는 "내 시계는 모바도라 절대 틀리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가 입을 벌리고 자고 있을 때, 나는 그 정확한 시계가 똑딱이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시간은 무엇인가? 사고다! 인생은 무엇인가? 시간이다! 사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 새로운 인생이다! 지금껏 이런 것을 생각해 낸 사람이 없었다는 데 놀라워하며, 나는 이 단순한 논리에 굴복하여 버스 터미널로 가는 대신, 오 천사여, 곧장 사고 현장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천사에 관해, 그리고 그의 성숙하고 진지한 의붓오빠처럼 보이는 죽음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자난이 노점에서, 모퉁이 철물상에서, 한가한 잡화상에서 흥정 끝에 산 후 잠시 좋아하며 만지작거리다가 터미널 찻집이나 버스 좌석에 놓고 내린 허름한 물건처럼, 연약하고 허약한 말들로 이어 나갔다. 죽음은 모든 곳에 있었다. 그곳에 가장 많았다. 바로 그곳에서 죽음이 모든 장소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화면 안에 또 다른 텔레비전의 모습이 보였다. 그 화면 안에 또 다른 화면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푸른빛을 보았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그 무엇. 그렇지만 죽음은 아주 멀리 있었다. 빛은 우리가 탄 버스들이 돌아다녔던 광활한 벌판에서 하릴없이 맴돌았다. 그리고 아침, 달력에서 많이 보았던, 동트는 장면이 보였다. 이것은 천지가 창조되던 그 여명의 순간처럼 보였다. 낯선 마을에서 술에 취해, 애인은 호텔 방에서 자고 있고, 인생이 무엇인지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친구들과 양복점에 앉아, 갑자기 인생이 무엇인가를 화면으로 보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미적미적거리는 해가 채 다 내리쬐지 못한 언덕을 오를 때, 나린 박사는 내게 물건들도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물들도 그들이 경험한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들을 저장해 두는 부분을 갖고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물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 이해하고 속삭이며 서로 간에 비밀스러운 하모니를 만든다네. 그 음악이 바로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고 있지." 하고 나린 박사는 말했다.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있어." 땅에서 주운 마른 나뭇가지에 석회질이 묻은 것을 보고 그는 이곳에 개똥지빠귀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것을, 진흙의 흔적을 보곤 이 주 전에 내렸던 비에 나뭇가지가 어떻게 부러졌을지를 내게 설명했다.
..천사여, 두 개의 산 사이에 끼어 있는 아마시아시에서, 한밤중에 진열장 앞에 선 채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어. 아이들에게 묻곤 하잖아. 얘야, 왜 우니 하고. 사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울면서도, 아이는 물어 보는 아저씨에게 파란색 연필깎이를 잃어버려서 운다고 말하지. 그와 비슷한 슬픔이 진열장에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던 나를 덮친 거야. 무심코 살인자가 되고 싶었을 때 내게 엄습했던 그 느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이제 나는 영혼 깊은 곳에서 이 무시무시한 고통을 느끼면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걸까? 건과 가게에서 해바라기 씨를 살 때, 아니면 나 자신을 비춰 볼 거울 몇 개를 식료품점에서 살펴볼 때, 아니면 냉장고와 난로들로 가득한 행복한 삶을 볼 때, 내 속에 있는 저주스럽고 사악한 목소리가 (봐, 이빨을 드러내는 비열한 검은 늑대를) 으르렁대면서 너는 유죄라고 외쳐 댄다. 하지만 천사여, 나도 한때는 인생을, 선행을 믿었어.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믿을 수 없는 자난과, 내가 믿는다면 내가 곧 죽여 버려야 할 메흐메트 사이에 끼어서, 발터 권총과 행복한 삶에 관한 환상 외에는 달리 매달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 불신과 불안이 극단적으로 얽혀 있는 계획에 바탕을 둔 오리무중의 상상 말이야. 내 마음속에는 냉장고들, 오렌지 짜는 기계들, 월부로 판매하는 안락의자들의 이미지가 소리 없는 통곡을 반주로 해서 차례로 흘러 지나갔어.
..한순간 마음속에서 질투심이, 사악한 짓을 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났다. 그러나 나는 더욱더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아챘다. 내가 지금 총을 꺼내서 그의 눈동자를 쏜다 해도, 그는 책을 베끼는 행위를 통해 이미 영원한 시간의 균형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지한 시간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계속 존재해 나갈 것이다. 쉼 없이 불안에 떠는 나의 영혼은 목적지를 잊어버린 버스 운전사처럼 어디로든 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책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어쩌면 모든 책이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세상의 정적 또는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그 무엇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적과 소음도 그것 자체는 아니야."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내가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봐 다시 한번 다른 말로 설명하고자 했다. "좋은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종의 무(無), 일종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지…… 그렇지만 단어들 너머에 존재하는 나라를 글과 책 밖에서 찾는 것은 헛일이야." 그는 이것을 책을 반복해 쓰면서 알았고, 충분히 배웠다고 말했다. 새로운 인생과 나라를 글 밖에서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나를 죽이려 했던 살인자는 서툴렀어. 어깨에만 상처를 입혔거든."
..나는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단지 내 온 인생을 바꾸어 버린 책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러나 책을 읽을 때, 나는 상처 입은 내 인생에 깊은 어떠한 의미를 주려고도, 위안을 찾으려고도, 더욱이 슬픔의 아름답고 존중할 만한 부분을 찾으려고도 절대 시도하지 않았다. 체홉에게, 폐렴에 시달리는 그 재능 있고 겸손한 러시아인에게 사랑과 경탄 이외에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헛되이 지나 버린 상처받고 슬픈 인생을 체홉주의라는 감성으로 미화시키고, 인생의 빈곤함에 대해 으스대면서 아름다움과 숭고한 감정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리고 위안을 구하는 이러한 독자들에 응하는 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약삭빠른 작가들을 혐오한다. 이 때문에 나는 많은 현대 소설들을 읽다가 말고 도중에 덮어 버리곤 한다. 아, 말[馬]과 대화하면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슬픔에 가득 찬 남자. 아, 자신의 사랑을 하염없이 물을 주던 화분 속 꽃들에게 바친 무력한 귀공자. 허름한 의자에 앉아서 절대 오지 않을 편지를, 옛날 애인을 또는 이해심 없는 딸을 기다리는 예민한 남자. 우리에게 계속해서 상처와 아픔을 전시하는 이 주인공들을, 체홉을 투박하게 모방하고 훔쳐서 다른 지형과 기후에서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작가들도 사실상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보시오, 우리를,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보시오, 우리는 얼마나 예민하고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특별한가요! 고통은 우리를 당신들보다 더 섬세하고 감성적이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되고 싶고, 당신의 불행을 승리로, 특히 우월함으로 바꾸고 싶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믿으십시오. 우리의 슬픔이 인생의 평범한 즐거움보다 더 멋지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사탕 그릇을 계속 쳐다보았다. 내가 왠지 모를 죄책감과 불편함을 느꼈다고 말한다면 독자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만 말해 두자. 내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기억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은제 사탕 그릇에 거울과 같이 방 전체와 나, 그리고 라티베 아주머니가 동그랗게 휘어져서 비쳐 있었다. 얼마나 마법 같은가. 한순간 세상을, 우리의 눈이라고 말하는 열쇠 구멍을 통해서가 아니라, 잠시 동안 일종의 다른 이성의 렌즈 체계를 통해 보는 것이. 영리한 아이들은 이것을 이해한다, 영리한 어른들은 이에 미소 짓는다. 독자여, 내 이성의 반은 다른 곳에 있었고, 나머지 반은 또 다른 곳에 신경 쓰고 있었다. 당신들에게도 무엇인가를 기억하려다가, 기억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기도 전에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기억하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 일어나는가.
...나처럼 인생을 망친 사람들에게 슬픔은 영리해지려고 노력하는 분노로 나타난다. 그리고 영리해지려는 열망은 결국 모든 것을 망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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