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의 미소는 산탄총이 난사된 듯 확 타오를 듯하고, 영화배우나 상원의원의 무기나 다름없는 매력이 느껴지는, 방 안을 환하게 밝히는 종류의 미소는 아니었다. 아랫니는 뾰족한 창을 박아 만든 던전의 함정처럼 제멋대로였지만, 윗니는 가지런했고, 한가운데 앞니 하나는 살짝 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알 수 있었는데, 그 미소는 좀 더 미묘한 무언가를 전해주었다. 그건 그와 미소의 수신자, 그렇게 오직 두 사람만이 이 세상을 희비극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인생이 언제나 원하는 대로 풀려나가지는 않거든, 그 미소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어쩌면 그게 핵심인지도 몰랐다.

..빌리는 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는 정말 사기꾼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가진 재능은 선물 같은 것이었고, 그건 단지 그 재능이 가져다줄 수 있는 외적인 보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 동안, 그저 자기의심만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성취감을 줄 작업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뜻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심지어는 그냥 운이 좋아서 기회가 많았던 사람들도 그런 안도감은 느끼지 못했다. 자신들이 하도록 운명 지어진, 직업이라기보다는 소명에 가까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계속 춰." 빌리는 명령하듯 말하고는 다른 손으로는 나오미를 붙잡았는데, 나오미는 클레어와 손을 잡았고, 클레어는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일종의 ‘링 어라운드 더 로지’ 놀이를 하듯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추었고, 곧 나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됐고, 심지어 나오미가 클레어에게 "미친, 우리 지금 뉴욕에서 춤추고 있다고!" 하고 소리쳤을 때도 그랬는데, 비록 그 말이 지나치게 몰입해서 없어 보이는 관광객다운 감상이긴 했지만,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던 보드카처럼 맑은 통찰의 순간을 구체화하고 있어서였다. 그 통찰이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은 뉴욕에서 춤추는 데 쓰이지 않고, 대신 일하는 데, 출퇴근하는 데, 샴푸로 머리를 감고 치실질을 하고 냄비에서 음식물을 긁어내는 데 낭비되며, 우리 삶의 봄날에 단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뉴욕과 춤이라는 그 두 가지 변수를 결합한다는 건 추앙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내면에 일정량의 외로움을 품고 살고, 그건 그냥 평생 동안 하나의 육체와 정신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며, 그러니 내가 느끼는 어떤 고립감이든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거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시거의 가사를 들으며, 나는 예술이 청중에게 느끼게 해주도록 되어 있는 대로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감정들을 표현해놓은 것에 동일시가 되기보다는, 내 고립감에 남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독특하고 괴상하다는, 외로움 중에서도 외로운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아마도 나는 또 진정한 외로움이란 그런 것이고, 그 톨스토이적인 고유성이 그것을 그렇게 만들었으며,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정의해 보이고 그런 다음에도 그들이 받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또한 거절당하는 것보다 유일하게 외로운 운명은 거절당할 가능성에 자신을 절대 노출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자기 책상에서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마치 설거지를 하면서 불 켜진 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있을 때처럼, 내 도움 없이도 또 다른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 역시 결국에는 나로 인한 것일 때 느끼곤 했던 종류의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언제나 내 과거가 아닌 과거에, 다른 사람들의 성장기에 배경음악으로 깔렸을 음반들에, 마치 그 경험들이 나 자신의 경험보다 더 진실하다는 듯 가장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그리움을 느꼈다.

...나는 내가 젊기는 하지만,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저수지가 끝없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나라는 인간의 껍질에서 가장 뚫고 들어가기 힘든 층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으며, 빌리는 내가 그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하는 일에 가까이 갔던 마지막 사람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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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로는 가설 형성이라거나 가설 추론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애브덕션이 지닌 직관적, 지각적 본질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가설을 세우는 발상 자체가 본질인 거죠. 불교의 깨달음에 가까운 행위라고나 할까……. 예를 들면 차라리 ‘비약법’ 혹은 ‘포획법’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겁니다. 원래 애브덕션은 유괴, 납치라는 뜻을 지닌 단어니까요."

..어린 시절 더운 여름날 반짝반짝 빛나는 강물에 얼굴을 담그고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내내 구경하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건 누구의 기억일까? 누구건 상관없다. 나는 요 몇 달간 어딘가 다른 곳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이 세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고개를 들고 다른 곳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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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자신을 관념의 괴물이라 생각한답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대조적인 두 사람이었다. 한쪽은 관념이라는 인공정원에 스스로를 속박했고, 다른 한쪽은 권력이라는 바위 속에 자신의 육체를 이식하려고 한다. 이만큼 서로 동떨어진 존재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 하나가 있음을 린타로는 깨달았다. 타자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의식의 강력한 자장이…….

.."상당히 젊은 분이군요." 니시무라 유지가 말했다. "실례지만 나이가?"
..린타로가 대답하자 니시무라가 자신을 되돌아보며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노스탤지어의 물결이 한순간 그의 눈동자 속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 물결을 무기 삼아 린타로의 우위에 서려는 의도가 슬쩍 엿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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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카에서는 메밀국수 식당을 겸하는 여관에 묵었다. 완코소바(모리오카의 명물로 밥그릇 크기의 그릇에 국수를 담아 손님이 뚜껑을 덮을 때까지 무한정 제공한다)에 도전했다. 일흔두 그릇을 해치우고는 결국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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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p.
.."그것이 가능한 경우에 말이지만, 올바르게 이성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죄악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 자갈에 대해 이런 식으로 추론하지 않는다면 남은 거라고는 기구 같은 것 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경비행기 조종술은 아직 하늘에서 기습해 오는 범인을 생각할 만큼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217p.
...룰르타뷰와 나의 대화를 재현하는 것보다는 이 보고서를 읽어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가장 엄밀한 진실을 전하지 못할 말이라면 차라리 한 마디라도 덧붙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255p.
"...지각에 의해 찾아내는 것 따위 증거가 될 수 없어. 나도 지각할 수 있는 흔적 위에 쭈그리고 앉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저 나의 이성이 그린 원 안에 그것이 제대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였어. 그 원은 실로 좁았던 적도 있어. 그야말로 아주 좁았던 적도……. 그러나 아무리 좁다고 해도 역시 광대했어. 그 이유는, 이 원은 그저 진실만을 넣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 지각할 수 있는 흔적 따위 나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코 나를 지배하는 주인인 적은 없었어. 나는 그들을 위해 장님보다 무섭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 즉 잘못된 견해를 가진 인간이 된 적은 없어! 프레드릭 라르상! 당신의 오류, 당신의 동물적인 사고에 내가 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거야!"

258p.
...그가 이렇게 자신의 생각에 잘 어울리는 말을 사용해서 자기표현을 하는 독특한 방법에 나는 새삼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종종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하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게다가 조셉 룰르타뷰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 청년의 사고법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모든 진기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진기한 것 중 하나였다. 그는 이런 사고법을 내세우면서도 그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 놀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저 놀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황하게 된다. 길에서 기묘한 인간을 만나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뒷모습을 언제까지나 바라보듯, 사람들은 룰르타뷰의 사고법을 만나게 되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디에서 온 사람이야, 저 녀석은! 어디로 가는 거지?‘ 라고 소곤거리듯, ‘조셉 룰르타뷰의 생각은 어디에서 온 거야?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거지?‘ 라고 마음속에서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373p.
.."저는 외면적인 징후에 의지해서 진상을 밝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히 그런 징후가 저의 이성의 올바른 활동에 의해 제시된 진상과 모순되지 않게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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