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p.
..이런 질투심은 성인들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성인 율리아노(Julian, 7세기의 성인. 축일은 2월 12일)의 경우이다. 집을 떠나 방랑하던 율리아노는 한 성주의 딸과 결혼하고 기사로 임명되었다. 후에 그의 부모는 말없이 집을 나간 아들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우연히 그의 부모들이 이 성에 도착했는데 율리아노의 부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들이 누구인지 당장 알아차렸다. 그녀는 시부모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안방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다른 방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사냥터에서 돌아온 율리아노는 안방에 들어갔다가 네 개의 발이 침대에 있는 것을 보고 분노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을 죽여 버렸다. 부인이 다른 남자와 자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금 뒤 부인이 교회에서 아침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율리아노는 부인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나서야 자기가 돌이킬 수 없는 몹쓸짓을 한 것을 알아차렸다. 질투심에 불타서 죄를 지은 것이다. - P-1

98p.
..이런 일을 치르고 난 뒤 도움을 준 부부나, 도움을 얻은 부부 사이에 신뢰나 관계가 깨졌다는 기록은 없다고 발하우스는 전한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이웃의 안타까운 사연이 들리면 이웃집 남자들은 기꺼이 ‘결혼을 도와주는 남자‘ 역할에 나섰다. 이때 어떠한 껄끄러움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밭에 쓸 호미가 없는 이웃에게 호미를 선선히 빌려주는 것처럼, 땅은 있으나 밭에 뿌릴 씨가 없는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비유하면 될까? 발하우스는 이런 풍속이 "부족한 부분을 이웃끼리 서로 도와주는 건전한 이웃돕기의 일종이었다"고 전한다. - P-1

103~104p.
..1496년 슈바벤 지방에 있는 아델스부르크의 수도원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보르트링겐Bortlingen 지방의 한 종이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서 영주에게 나무 땔감을 바쳤고, 여종이 결혼할 때는 현금이나 프라이팬 등을 바쳤다고 적혀 있다. 프라이팬의 크기를 정하는 잣대는 ‘그녀의 엉덩이가 다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너그러운 영주 몇몇은 치즈나 버터만 받고도 결혼을 허락해주었다. 물론 치즈도 여자의 엉덩이 무게만큼 바쳤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종들은 일단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어떠한 자유도 없었다는 것이다. 종도 인간이기에 이런 제도에 대해 치욕과 모욕, 조롱을 느꼈을 테지만 신분제가 있는 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 P-1

124p.
...또 남자가 평소에 흠모하던 여자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반드시 챙겨야 할 방편도 있었다. 오리주둥이를 바짓단에 넣고 들어가거나 병아리의 혀를 상대방이 모르게 음식에 넣어 먹이는 처방이었다. - P-1

124~125p.
..남녀가 사랑을 나누기 위한 처방이 있다면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사랑이 귀찮아서 물리치기 위한 방편들이다. 너무나 싱거운 짓으로 보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간절한 염원을 담은 처방이었던 모양이다. 예를 들면 그(녀)에게 책 한권을 건네는 것인데, 책을 받은 이가 책장을 스르륵 넘길 때 사랑도 날아간다는 원리이다. 당시에는 책이 귀했으므로 이런 방편이 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방편은 귀찮은 사랑을 잘라내듯이 칼이나 가위로 무언가를 자르는 것이다. - P-1

145p.
..결혼식 장소를 온갖 꽃으로 장식하는 풍속은 르네상스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결혼식을 주로 5월에 치르는 것도, 사람들이 몸을 자주 씻지 않았기 때문에 꽃 향기를 통해서 냄새를 없애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꽃 냄새가 지나치게 강렬한 나머지 신부가 결혼식을 하는 동안 기절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친구나 하객들이 신랑신부에게 곡물을 던져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의미로, 대추를 신랑신부에게 던져주는 우리의 풍속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p. «빛 속으로»
..기분 탓인지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아마도 이 군 앞에서 적어도 이름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였었나 보다. 아무렇지 않은 기분으로 그를 대할 수 없었던 것은 내 마음속에 비굴함이 존재한다는 증거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조금 허둥거리며 이렇게 물었다. - P-1

118~119p. «천마»
..특히 가도이의 극히 인문학적인 설명에 의하면 조선의 청년은 하나같이 겁쟁이인데다 비뚤어진 근성을 가지고 있고, 뻔뻔하고, 심지어는 당파심이 강한 종족이라는 것이다. 다나카도 그 좋은 표본이 도쿄에서 알고 지내던 현룡이라고 했다. 도쿄의 유명한 작가 오가타가 경성에 왔을 때 오무라의 주선으로 조선의 몇몇 문인들과 함께 자리를 만들었는데, 오가타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현룡에게서 조선인 전부를 보았다고 한 것은 역시 날카로운 예술가의 혜안이라고 찬탄했다. 오가타가 여기에 조선인이 있다고 외치면서 현룡을 가리켰을 때, 실제로 조선의 문인들은 완전히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현룡은 너무나 득의양양하게 히죽히죽 웃으며 기뻐했던 것이다. - P-1

181p. «풀이 깊다»
..산간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뭔가 하늘에서 내려준 기적이라도 일어날 것을 바란 나머지, 언젠가는 행복의 나라로 인도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몸을 호랑이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인식은 가슴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어서, 그저 이런 두려운 현실로부터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들은 조선인은 흰옷을 벗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그의 눈앞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장 입구 포플러 나무 아래 서 있던 작은아버지와 코풀이 선생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 P-1

210p. «노마만리»
..사실 1945년이란 시기의 조선은 참으로 형형색색의 인간을 창조하고 있었다. 아마도 모르기는 모르되 이 베이징 천지에도 얼핏 보기에는 범놀음을 하는 범가죽을 쓴 개들이 많을 것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3p.
..하지만 사형 제도의 쇠퇴와 시기를 같이 하여 세계 각국에서 흉악 범죄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흉악 범죄가 늘어난 배경은 걷잡을 수 없는 환경 파괴와 수그러들 낌새가 없는 인구 증가세에서 발단된 지구 멸망론이 유포된 탓으로, 사형 제도와는 무관하다고 단언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고삐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한 탓에 말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라 느끼기 시작했다. - P83

286p.
..육체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지만, 과거를 돌이켜볼 수는 있다. 머릿속에서는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 - P286

286p.
..밀실A 내부에 밀실B가 있다고 치자. 이 경우 밀실A에서는 밀실B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요컨대 외부와 다름이 없다. 제리미스탄 종말감옥 자체가 거대한 우리라 할 수 있었다. 철창살 너머로 감옥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감옥 밖에 있다고 할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내게는 감옥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독방에서는 노동의 의무가 없다. 노동이 면제되는 대신 사흘 후에 나는 처형된다. - P286

343~344p.
..인간의 뇌는 어떨까.
..뇌 속에는 동결된 시간이 잔뜩 비축되어 있다. 뇌가 없으면 시간은 비축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뇌는 타임캡슐과 같다.
..동시에 시간이란 것은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기도 하다. 뇌가 없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뇌는 모래시계와 같다. - P343

357p.
..한 알 한 알의 모래에는 막대한 역사가 있다. 지구의 성립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막대한 역사가.
..과거에는 땅속을 흐르는 작열의 마그마였던 적도 있었으리라. 지상으로 나와 식고 굳어서 딱딱한 암반이 된 적도 있을 것이다. 물과 열과 바람의 힘으로 침식되고 분쇄되고 풍화되어 형태를 바꾸어 왔을 것이다.
..한 알 한 알의 모래에는 막대한 역사가 있다.
..내가 살아온 30년의 인생은 모래 한 알의 역사에 비하면 헛웃음이 날 정도로 짧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죽음의 공포가 아주 조금 완화되었다. - P3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1p. «줄 서기»
..인류의 적응력은 유명하지만, 향상된 생활 형편만큼 인간이 빨리 적응하는 것은 없다.... - P-1

57~58p. «줄 서기»
..푸시킨은 망설임 없이 줄 끝으로 가서 자리를 차지했다. 그 와중에도 너덜너덜한 외투를 입은 남자 한 명이 가까운 골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푸시킨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 알려주었다. ‘여기예요. 이쪽이에요, 친구.‘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 남자가 와서 줄을 서면, 푸시킨은 더 이상 줄의 맨 끝이 아닐 것이다. 아니, 사실 그 무엇의 끝도 아닐 것이다. - P-1

73p. «티모시 투쳇의 발라드»
..세상이 장원과 오두막으로 나눠져 있던 시대는 이미 먼 과거가 되었다. 대신 우리 시대에는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이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팔자를 고치려면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하거나 철도사업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던 반면, 지금은 일주일에 추가 수입이 50달러만 생겨도 사다리를 한 단 더 올라가 조금 더 맛있는 수프, 조금 더 세련된 셔츠, 자연광을 조금 더 받는 거실을 누릴 수 있다. - P-1

106p. «아스타 루에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는 이미 스미티가 덩치와 달리 부드러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나란히 서고 보니, 그가 십중팔구 그 덩치 때문에 부드러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처럼 큰 덩치로 다른 사람들 머리 위로 우뚝 서 있다가 남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자세를 고치는 법,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는 법, 몸짓에 서투른 느낌을 조금 섞는 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그는 북극곰의 몸을 한 판다였다. - P-1

146p. «나는 살아남으리라»
..넬의 어머니와 계부 존은 파크 애비뉴와 83번가가 교차하는 곳의 웅장한 건물에 살았다. 엘리베이터 여러 대가 두 곳에 나뉘어 설치되어 있고, 도어맨이 네 명이나 되는 곳이었다. 두 사람이 사는 아파트의 여러 방은 워낙 어둡고 풍부한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보자마자 도덕적인 자신감이 느껴졌다. 침실이 하나뿐인 우리 아파트가 달걀 껍질 색이나 아이보리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을 보면, 넬과 내게는 그런 도덕적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았다. - P-1

189p. «나는 살아남으리라»
...나는 페기가 배신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넬의 작은 카메라 화면 속에서 남편의 비밀스러운 외출을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순수한 기쁨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그녀가 없는 곳에 존재하는 기쁨, 게다가 그녀가 없어야만 가능할 것 같은 기쁨. - P-1

239p. «밀조업자»
..아, 우리가 얼마나 박수를 쳤는지. 처음에는 의자에 앉은 채, 그다음에는 일어서서. 우리는 이 거장 연주자나 이 작품이나 바흐에게만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에게도 박수를 보냈다. 우리가 공유한 기쁨, 공유를 통해 더욱 풍부해진 그 기쁨에도 박수를 보냈다. - P-1

253p. «디도메니코 조각»
...그러나 디도메니코가 의뢰받은 작품의 완성보다 예술가들의 교육에 더 많은 힘을 쏟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그의 작품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바로 그가 1475년에 로렌초 데 메디치를 위해 그린 <성수태고지>였다. 내 증조부는 1888년 유럽 대륙 순회여행을 하던 중에 파리의 어느 미술품 거래상에게서 그 그림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것을 뉴욕의 집으로 가져와 가장 상석에 걸어놓았다. 그가 식당에서 앉는 자리 뒤편의 벽 높은 곳. 그는 그 그림을 볼 수 없는 위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의 이미지에 그 그림이 융합되는 위치였다. - P-1

262p. «디도메니코 조각»
..사람의 성격은 확실히 태어난 뒤 10년 동안 형성되지만, 그 10년의 분위기는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 10년 동안 결정된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4p. 서문
..해즐릿이 쓴 에세이의 베일은 매우 얇아서 그것을 벗기면 다름 아닌 그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것은 콜리지가 본 그대로 "이마를 아래로 드리우고, 신발을 관조하는 듯한 기이한" 사람의 모습이다....

47p.
..우리는 누군가의 기지에 당황하고 경계하는 처지에 놓이는가 하면, 누군가의 아둔함은 죽도록 지겹다. 전자의 재치 있는 말은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반복되면 진부해지고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효과를 상실한다. 한편 후자의 무미건조함은 견디기 힘들어진다. 재미있거나 지식을 주는 친구는 기껏해야 얼마 뒤에는 그냥 책장에 꽂아 두고 싶은 애독서와도 같다. 하지만 우리의 친구들은 책장에 꽂히기를 꺼려하고, 그러다 보면 친구들과의 사이에 오해와 불화가 싹튼다....

48p.
...지금까지 말한 모든 또는 그 가운데 어떤 이유는 점점 커져 머잖아 냉정이나 노여움에 이른다. 그러다가 냉정이나 노여움을 오래 억눌러 온 것에 대해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으로서, 현재의 감정과 어긋난 과거의 친절에 대한 기억을 털어 버리기에 손쉬운 수단으로서 마침내 공공연히 폭력성을 띠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주물러 변조하거나, 사멸한 우정의 잔해를 주워 맞추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자는 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할 테고, 후자는 잔해에 향유를 발라 방부 처리하는 수고를 들일 가치가 없다!

57p.
...내가 왜 이처럼 부드럽고 기분 좋은 그림을 떠올려서 불운과 나 사이를 영원히 가로막는 차단막으로 쓰지 않을까? 그 이유는 고통보다 즐거움을 유지하는 데 더 큰 정신적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헛되이 조금 시간을 낭비한 뒤 사랑하는 것에서 미워하는 것으로 주의를 돌린다!

60p.
...나처럼 이 모든 것을 보고, 인생의 직물을 풀어 비열함과 악의, 비겁함, 감정의 결핍, 이해의 결핍, 타인에 대한 무관심, 자신에 대한 무지라는 다양한 실로 구분하고, 관습이 모든 우수성을 압도하고 악행에 길을 내주는 것을 보고서, 타인을 내 관점에서 평가하되 잘못해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품은 희망이 와오되었어도, 우정에 속는 얼간이이자 사랑에 우롱당하는 바보인 내가 가장 의지하던 것에 낙담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충분히 혐오하고 경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68~69p.
..왜냐하면 할 수 있는 동안은 현재를 소유하고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를 빼앗기고 현재가 있던 방이 텅 비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별의 아픔, 움켜쥔 것을 놓는 아픔, 단단한 인연을 끊어 버리는 아픔, 마음에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죽음에 격렬히 반발하고 "오래 사는 불행을 겪는다."

83p.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없앨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저 억제할 수 없는 기분과 견디기 괴로운 격정을 만족시키려고 인생의 무대에 머물고자 할 뿐이라면 우리는 즉시 떠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편, 삶에서 얻는 좋은 것 때문에 존재에 애착할 뿐이라면 떠날 때의 고통은 그다지 심하지 않을 것이다.

94~95p.
..그렇다면 질투는 정의감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질투는 사칭과 엉터리에 대한 방어책인 것이다. 우리는 허식적이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숨겨 놓은 우리 스스로의 가치를 쉽게 내주지 않지만, 정당한 명성을 날릴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경의를 표하고 심지어 우리 스스로 그런 가치와 자격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자부심을 느낀다. 이것이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들이 제거되어 우리에게 방해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숭배와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모든 의혹과 분분한 의견이 죽음으로 일소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혀에는 자유가 있어서 죽은 자들을 칭찬하는 데는 방종해진다....

136p.
..이와 달리 학교에서 빈둥거리는 아이는 건강하고 쾌활하다. 자유롭게 행동하되 주의깊은 아이는 자신의 피의 순환과 심장의 움직임을 느낀다. 웃다가도 금방 울 수 있고, 케케묵은 철자 교본을 보다 졸고 만다. 이런 아이는 선생님이 불러 주는 외국어 구절을 따라 말하고 수많은 시간을 책상 앞에 붙박혀 앉아 있기보다는, 학기말이나 연말에 즐거움을 누리지 않은 대가로 하찮은 상장이나 받기보다는, 공을 차고 나비를 쫓아다니고, 얼굴 한가득 자연의 공기를 느끼고, 들이나 하늘을 바라보고,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다니고,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온갖 소소한 갈등이나 이해관계에 기꺼이 끼어든다.

142p.
..문제는 간단하다. 사람이 정말 이해하는 것은 모두 매우 작은 범위(일상사, 경험, 우연히 알게 된 것, 공부나 연습을 할 동기)에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는 꾸밈과 속임이다....

160p.
..물질은 나를 얼마나 압박하는가! 사실이란 얼마나 완고한가! 자연과 예술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언젠가 리치먼드 씨가 "여러 다양한 걸 봐두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닭싸움이 유익한 구경거리라는 말이었다. 도덕에 관한 논문이라도 같은 책을 두 번 다시 읽는 것보다 이런 실용적인 것을 단편적 방식으로 고찰하는 것이 사물의 (마땅히 어찌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됨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