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p. ..주변이 어둑해지며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서도 석양의 빛을 받아 황제의 색을 띤 쯔진산은, 이때의 나에게는 거의 종교에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저 자금색의 산은, 인간의 역사가 다 끝난 뒤에도, 이 지상의 생명체가 모조리 모습을 감춘 뒤에도, 완만한 능선 어딘가에 때로는 험준한 저 모습 그대로 계속 존재해나갈 것이 틀림없다. 중국의 자연은 쉬안우호玄武湖나 시호西湖처럼 사람 손이 닿은 것이든, 또 저 산처럼 자연 그대로의 것이든 모두 어딘가에 인간을 소외시킨 것 같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인간의 역사 이전부터 그리고 역사 이후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비정함을 품고 있다. 역사 이후의 자연(그런 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 풍경을 보고 싶다면, 제군들, 늦가을 저녁 무렵 난징으로 오시게나. 그리고 쉬안우호를 앞에 둔 성벽 위, 쉬안우문玄武門 누각에 올라 쯔진산을 바라보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43p. ..남자가 자기는 영웅도 그 무엇도 아니고 그저 시시한 보통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여자와 아이가 필요하다. 여자와 아이는 광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110p. ...자기 일과 임무에 만족해서 언젠가 그 포화점에 이르러 강한 자극을 쫓는 쪽으로 정신이 흘러가면 큰일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외부 힘에 의해 좌우되고 만다. 재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앞서 말했던 영원한 것들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필요하다. 유동체나 기계가 되기 위해서는 생각을 방치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123p. ..이 세상의 자연과 인간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하는 사람의 최후의 순간 눈에 비치는 경치는, 투명한 막을 통해 보듯이 모든 것이 여과되어 아름답다고 한다.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다. ..주관의 극한. 인식의 고정화와 그 극복.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남자건 여자건, 요컨대 그 고독은 애정과 우정에 의해, 이 세상 모든 것에 의해 떠받쳐진 고독이다. 사람은 오히려 둔화되어 이데아와도 비슷한 애정과 우정을 보고 있을 뿐 풍경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죽음이건 죽음은 똑같다. 하지만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에게, 물고기의 눈이 되어 본 풍경은 황량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의미하다. 풀이 있건 나무가 있건, 눈이 오건 오지 않건, 그것은 바위와 금속으로 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의 아름다움은, 진리는, 아름답거나 진짜 같거나 한 게 아닌모양이다. 어중간한 것이 아니다.
134p. ...전쟁에는 아무래도 연극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 같다. 연기를 하는 것은, 사물이나 시간의 질과 방향을 바꾸거나 하지 않는다....
137p. ..잃어버려야 비로소 참으로 그것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여러 서정시인의 발상의 밑바탕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러한 발상에 포함되어 있는 어느 정도의 나약한 근성을 적출하고, 부정하고, 거부하려 한다. 그런 발상에는 필연적으로, 내가 획득한 존재는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 혹은 사물이 내게 얻게 해준 것이라고 하는 피조물적인 의식이 따르기 때문이다.
141p. ..환기도 잘 안 되는 지하실에서 하는 사색, 극도로 주관적인 독백, 성실한 바보천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 애매한 재료들을 풀로 붙이면서 공상을 마치 충족된 내면의 한 세상인 것처럼 가장하여 내적 존재를 겉으로만 뽐내는 어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처우는 결코 내면에 존재하거나 하지 않는다. 지금 그녀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관념인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냄새도 형체도 촉감도 없는, 매우 딱딱하게 굳은 관념의 단어로 말해야 한다.
159p. .."누구라도 평화롭게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잖아." ..평화주의자가 적국의 군사력에 의지한다. 사실을 인정하라고 한다. 나도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 하지만 내게 있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기정사실을 한층 더 견고히 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다. 그 사실을 바꾸려고 하는 의지인 것이다. 바꾸려고 할 권리가 나에게 있을 터이다. 권리는 이것저것 특수한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을 바꿔치기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사실을 계산에 넣지 않는 특수사실주의자 혹은 현재사실주의자(표현이 이상하지만)는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만 집어내고, 방해되는 것은 훌륭하게 피해버리는 특수한 재능을 갖고 있다.
161~162p ..여기서 나는 포기했다. 적어도 오늘은. 왜냐하면 지금 타격을 가하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내 사상으로는 백부라는 이 재료를 다시 조각할 힘과 기술, 제작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기술과 제작능력이 충분하지 않은데 악마의 힘이라도 빌려서, 다시 말해 기를 쓰고 덤비는 것은 사상 자체를 파괴해버린다. 대리석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대리석 자체를 경멸하거나, 이걸 마구 때리거나 하는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지 조각가는 아니다. 사상은 의지와 기술, 제작능력이 사상 자체를 한참 뛰어넘지 않는 한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 호모 사피엔스-지식인보다 호모 파베르-제작인에 이르는 길이다.
227p. .."살아간다는 것은 적신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마른다는 것. 믿으세요, 괜찮으니까."
242p. .."지금, 이 창문으로 정원의 나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무는요, 아주 지혜롭구나. 그런 생각을요. 나무는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그 현장을 떠날 수가 없잖아요. 도망갈 수도 숨을 수도 없어요. 그 자리에 있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나무는요, 아무리 험악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열심히 기다리는 거예요. 열심히 뿌리를 움직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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