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p.
..결국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끝장으로 치닫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그 치열한 경주에서 기꺼이 제외될 수 있었다. 이곳에 막 도착해 출발점에 선 사람부터 결승점에 도달한 사람까지 온갖 부류를 알고 있었는데, 다들 얼마 후에는 하나같이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인생은 그저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초봄 어느 비 오는 날처럼 돈도 없는데 불운까지 겹친 현실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날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내가 그 누구에게도 나쁜 감정 따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것을 따라 살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27p.
...그리고 이 모든 이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생각해 봤다. 늘 그렇듯 우리는 만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떠나온 사람들을 위한 존재다....

70p.
...하루라는 개념이 침대에서 일어날 때부터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를 구분하는 시간이라면, 이 시간을 끝내기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사실 그날은 내게 아주 고된 하루였기 때문이다.

92p.
...리비오는 왜 진작 에바를 떠나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란 서로를 떠나려고 노력하지만 정말 헤어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법이다.

101p.
...계곡은 밝고 청명한 하늘의 무게에 눌려 조용했고, 공기는 무슨 징조를 기다리는 듯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더위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나는 갑자기 해야 할 무엇인가가 생각났다. 계절이 변해 원래 있던 곳을 떠나 다른 장소에 가고 싶어지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공기가 달라져 기후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멈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22p.
...하지만 그는 내가 부축해 주기를 원하지 않았고, 상체에 힘을 바짝 주고 아주 똑바로 걸었다. 자살 시도 후에는 반드시 위풍당당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 법이다.

127p.
...그 옛날 카바피스(Konstantinos Kavafis,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출신 그리스의 시인)의 말이 옳았던 걸까?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속한 도시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며, 당신을 위한 배도 도로도 없기에 다른 곳에서 희망을 품지 말라고, 이 세상 작은 구석에서 인생을 낭비한 것처럼 그 어느 곳이라고 해도 당신의 망가진 인생은 달라질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옛날 카바피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집에 두고 온 여행 가방을 떠올리며 담배 두 개비를 피웠다. 뭐, 나는 내가 와야 할 곳에 왔고, 이제 남은 것은 집에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132p.
...투항하는 상황에서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항상 패자가 승자보다 더 고상해 보이는데, 어쩌면 더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도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잘 가꾸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인 듯하다....

192p.
...석양 무렵 내가 바람을 쐬러 발코니로 나가면 하늘은 텅 비고 고요했다. 신문에서는 도시를 짓누르고 있는 유독성 대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유치한 합리화였다. 진실은 높은 곳에서 봐야 잘 보이는 법이다.

213p.
...렌조 부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 경박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인데도 끔찍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망가뜨리고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의자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는 더 이상 내가 올 곳이 아니었다....

218p.
...이상하게 슬프지도 않았다. 적어도 너무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조금 지친 것은 맞다. 확실히 그랬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전차를 타고 있었다. 운이 좀 좋으면 역 가판대에서 좋은 책을 발견하고 기차도 너무 붐비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 책은 재미있었고 기차는 거의 비어 있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슬픔이 밀려왔다. 기차가 다른 방향, 그 어떤 방향으로 향해도 내게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239~240p.
.."우린 그런 거 감당 못해." 내가 말했다. 그녀가 내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된 지금, 바로 지금처럼 그녀가 정말 내 여자인 것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다. 참 운도 없다. 나의 불운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여자일 때만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남은 음식처럼 누군가의 잔재일 때만 내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246p.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도시이자 우리의 도시이다. 그리고 강변의 나무들과 하늘로 뻗은 교회 첨탑들을 생각한다. 그라지아노의 영화와 아리아나가 규칙적인 생활을 해 보려고 문 옆에 붙여 놓은 메모들도 생각하고, 이미 끝난 내 젊음과 경험해 보지 못할 노년을 생각한다.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것과 죽은 채 태어난 아이들, 천사들, 상상 속의 사랑, 애초에 무너진 꿈들, 영원히 죽어버린 것들과 대량 학살, 잘린 나무들, 멸종된 고래를 비롯해 멸종된 모든 종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물을 버리고 나와 필사적인 노력으로 우리를 낳고 살아남은 최초의 물고기를 생각하자, 모든 것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지도 못한 모든 것과 영원히 죽은 것들까지, 그 모든 것을 받아 주는 바다를. 언젠가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이 처음으로, 혹은 다시 한번 정당성을 되찾을 날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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