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뭐라고 할까요. 남자들은 흔히 자기의 의지를 시험해 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머리는 별로 우수하지 않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어떤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경우, 그 과정에서 자기 의지를 과시해 보이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선 자기만족을 얻을 수가 있겠지요.

...병호는 그때까지 흔들리던 가슴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이윽고 알 수 없는 분노로 바뀌었다. 불행한 사람들의 불행한 행동이 그를 노하게 한 것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강 건너 산 위에 흐릿하게 떠 있는 워커힐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저런 데서는 훌륭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살고 있겠지. 이상하다. 감옥 문이 보이네. 감옥에서 나오던 날도 이렇게 눈이 왔었는디…… 역시 나한테는 거그가 좋아. 거그 들어가 있으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거든. 지리산 더덕은 역시 맛이 있어. 그걸 고추장에 찍어 먹으문 맛이 그만이지. 치알봉 올라가는 비탈에 봄이면 온통 빨갛게 피는 그 꽃들, 이름이 뭐드라. 늙어서 이젠 생각이 잘 안 나는군. 그 꽃을 따먹고 배가 아파서 죽을 뻔했었지. 그건 먹어서는 안 돼. 벌써 옛날 일이야. 아, 저기 감옥 문이 열리네. 아, 저건 우리 어멈하고 아들이 아닌가.

..그의 슬픔은 단순한 슬픔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외로운 방랑객이 오랜 여행 끝에 고향에 돌아와 새삼스럽게 자신의 비참함과 생의 허무함을 깨닫고는 울음을 터뜨리는 그런 모습이었다. 무엇을 찾아 지금까지 헤매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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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p. (편집자 후기 중)
...어느 인터뷰에서 왜 무서운 이야기를 쓰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있지요. "부모자식간의 애틋한 정을 소설에서 그대로 묘사하면 듣는 사람이 머쓱해질 수 있지만, 그걸 잃어버리거나 위협받는 상황을 그리면 얼마나 소중한가를 비로소 떠올릴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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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수면 상태에 있을 때 또는 꿈속에 있을 때 그는 영원히 잠들어 버렸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았다. 요즘 그는 종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는데, 만일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그것을 치렀으면 했다.

..그는 큼직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어 힘껏 던졌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이 세상에 대해서 점점 비굴해지고 항상 별다른 일 없이 편리하게 사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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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13p.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젠 알았어요. 당신은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어요. 적어도 내 도움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굳은 의지와 모든 것을 거부하는 냉혹함이 있어요. 당신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거부하죠.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쫓는 것, 찾는 것은 내 도움 없이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순간 눈앞에 다른 세계의 문이 나타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들여놓으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을,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이해받을 수 있는 말과 생각이 입을 열기만 하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 두뇌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세계의 말과 생각을 번역하고 있을 뿐, 아직 내 생각만큼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소리치고 싶은 말은 영어도 프랑스어도 아랍어도 다른 외국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단어와 문장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수정처럼 날카롭고 면도날처럼 예리하고 간결했다. 순간적인 깨달음은 곧 사라졌다. 힐이 있는 방으로 되돌아온 내 정신에 남아 있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인용뿐이었다.
..‘지성은 지성이 없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120p.
...이 세계와 인간들은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현재의 단편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세계를 날마다 스쳐가는 그림자였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수많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존재다. 선이든 악이든 결국 과거의 산물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는 현재가 없다.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141p.
..마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냉정함이 사라져 갔다. 나는 옆으로 누워 내게서 냉정함이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왠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이제 와서 감상에 잠기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편이 나았다.

199p.
...힐이 나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세계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나를 받아들여 내가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한 생활에 나를 남자로 편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선물을 받았지만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기뻐할 줄도 모르면서 쓰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과 동정은 그녀가 믿는 다른 세계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세계이지 환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단잠과 즐거운 꿈의 세계이지 악몽의 세계가 아니었다. 말과 뜻을 가진 세계이지 남자가 영혼의 황야에 혼자 살아야 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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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p.
..오배니언은 어깨를 올렸다가 천천히 내렸다. "표현할 수가 없네....... 나도 잘 모르겠어. 넌 외모는 여자인데 느낌은 야만인 같아. 프로이드가 말한 온갖 방어 기제로 무장하고 돌아다니는 마네킹 같아. 얘기를 듣기만 하지 하지는 않아. 대체 무슨 여자가 그래? 난 아직도 이상해...... 왜 얘기를 안 하는 거야? 너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정말 모르겠어, 캐런. 정말이야."...

148p.
...오배니언을 통해 그녀는 음악과 문학과 미술의 세계를, 그녀가 거의 알지 못하던 모든 실재와 추상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구절을 따라 썼고, 그의 생각과 취향, 편견을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표절했다. 자신에게 결여되었던 교육과 소득, 기회를 기반으로 한 깊고 정교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그녀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건물 터를 판 땅속에 펜트하우스를 짓는 셈이었다. 지하와 펜트하우스 사이에 있어야 할 스무 층의 건물은 생략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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