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13p.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젠 알았어요. 당신은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어요. 적어도 내 도움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굳은 의지와 모든 것을 거부하는 냉혹함이 있어요. 당신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거부하죠.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쫓는 것, 찾는 것은 내 도움 없이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순간 눈앞에 다른 세계의 문이 나타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들여놓으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을,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이해받을 수 있는 말과 생각이 입을 열기만 하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 두뇌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세계의 말과 생각을 번역하고 있을 뿐, 아직 내 생각만큼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소리치고 싶은 말은 영어도 프랑스어도 아랍어도 다른 외국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단어와 문장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수정처럼 날카롭고 면도날처럼 예리하고 간결했다. 순간적인 깨달음은 곧 사라졌다. 힐이 있는 방으로 되돌아온 내 정신에 남아 있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인용뿐이었다.
..‘지성은 지성이 없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120p.
...이 세계와 인간들은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현재의 단편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세계를 날마다 스쳐가는 그림자였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수많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존재다. 선이든 악이든 결국 과거의 산물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는 현재가 없다.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141p.
..마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냉정함이 사라져 갔다. 나는 옆으로 누워 내게서 냉정함이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왠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이제 와서 감상에 잠기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는 편이 나았다.

199p.
...힐이 나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세계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나를 받아들여 내가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한 생활에 나를 남자로 편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선물을 받았지만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기뻐할 줄도 모르면서 쓰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과 동정은 그녀가 믿는 다른 세계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세계이지 환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단잠과 즐거운 꿈의 세계이지 악몽의 세계가 아니었다. 말과 뜻을 가진 세계이지 남자가 영혼의 황야에 혼자 살아야 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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