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세탁소 -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하이디 지음, 박주선 옮김 / 북폴리오 / 2024년 4월
평점 :
품절








어느 집에나 세탁기는 다 있으니

대부분의 옷가지들은 집에서 직접 세탁을 하지만

한 번씩 꼭 세탁소를 찾아 세탁을 맡기는 일이 생긴다.


아무리 집에서 빨래해도

얼룩이나 오염이 지워지지 않는 옷이나

추억이 담겨있어 어떻게든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주고 싶은 경우 돈이 더 들더라도

세탁소에 찾아가 '이 얼룩 지울 수 있을까요?'

하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패스트패션이라던가 저렴한 옷 가격으로

구멍이 나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생기면

'버리고 새걸로 하나 사지 뭐' 하기 쉽지만


아무리 저렴한 가격에 산 옷이라 해도

사연과 추억이 담겨있으면

이를 쉬이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

그냥 '옷'이 아니라

내 시간과 추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어느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한 세탁소의 이야기를 담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일반 세탁소 답지 않게

원목 책장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고,

세탁을 마친 옷을 비닐에 씌워 걸어둔

벽면만 제외하고는 책이 잔뜩 꽂혀있으니

얼핏 보면 도서관이나 서점 같은 느낌이다.


더욱이 40대 남짓의 사장님은

묘하게 철학적인 분위기는 물론,

세탁물을 맡기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따뜻한 조언을 건네기도 해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는

단순히 '옷을 세탁'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담긴 어떤 시간과 추억을

새롭게 입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입소문이 나있다.


좋아하는 선배가 준 손수건 한 장부터 시작해

바쁘게 살아가는 커리어 우먼의 잉크 얼룩이 묻은 셔츠,

세상을 떠난 아이가 좋아하던 속싸개,

엄마와의 이별이 담겨있는 가방끈이 끊어진 배낭이나,

떠나는 딸의 캐리어에

제멋대로 엄마가 넣어둔 스웨터 등

손님들이 맡긴 다양한 세탁물 속에 담긴

사연과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손님들은 더러워진 추억을 씻고,

또 구겨진 감정을 펴며,

찢어진 관계를 이어붙이는 과정을 겪는다.


얼핏 《시간세탁소》 라는 책 제목을 보고는

한창 유행했던 메리골드 시리즈나

편의점 시리즈처럼 시류에 편승한

판타지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이 소설은 현실에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를 담은 것이 아니라,

손님들의 세탁물을 받아든 세탁소 주인이

맡긴 옷과 관련된 손님들의 사연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야기를 나누며

스스로가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주는

상담가의 역할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심리 상담가로서 일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세탁소 주인에게 투영된 게 아닐까 싶어

사연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갈수록

마음의 아프거나 구겨진 마음이 해결된 듯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상담 일을 하며 '기억이 사람들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보물'이라는 깨달음 아래

이런 기억이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는 믿음으로

이 이야기들을 써 내려갔다고 하니

그의 의도가 충분히 전해진 책이 아니었나 싶다.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키며

때로는 돌이키고 싶고,

때로는 후회하는 순간이나

그리운 순간을 되새길 수 있기도,

또 세탁소 주인의 한마디가

마치 나에게 건네는 따스한 조언처럼 느껴져

감동을 받기도 했다.


각 손님들의 사연을 쫓다 보니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한 소년의 이야기와

또 어딘가 미스터리한 세탁소 주인의

비밀이라는 숨겨진 반전에 다다르게 되었고,

이를 통해 비로소 세탁소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손님들의 고민을 듣고

또, 조언을 건네게 되었는지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우고 싶은 감정이나 아픔 앞에

마치 없었던 것처럼 얼룩을 지우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여전히 남아있는 얼룩을 보며

추억을 되새길 수도 있고,

누군가를 떠올릴 수도 있으며

후회의 감정을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할 테니


그 안에 담긴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헤아리는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시간세탁소를 통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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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키초의 복수
나가이 사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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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도시대 후기

눈 내리는 어느 겨울의 정월 그믐날,

고비키초의 극장 뒤편에서 복수가 행해졌다.


열여섯 살의 한 소년이 전통 여성 예복을 입고는

우산으로 머리를 가린 채 서 있다.

소년을 여인으로 착각한 우락부락한

한 도박꾼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소년은 덮어썼던 옷을 내던지고 신분을 밝힌다.


"나는 이노 세이자에몬의 아들 기쿠노스케.

그대 사쿠베에는 내 아버지의 원수.

여기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


그리고 뽑아든 긴 칼.

상대 역시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길 가던 사람들마저 가던 길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키며 이들의 승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소년과 사내의 진검승부가 펼쳐진다.


누가 보아도 질 것 같은 소년이었지만

마침내 소년 기쿠노스케는 사쿠베에를 베고

피가 튀어 흰옷이 새빨갛게 물든 그는

베어낸 사쿠베에의 잘린 머리를 들곤

구경꾼 사이를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일이 '고비키초의 복수'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도 2년이 지난 후,

문득 이 사건을 쫓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기쿠노스케가 사쿠베에를 벤 사건을 목격한

다섯 명의 사람을 만나 사건의 진상을 묻고

또 알 수 없게 목격자들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데…

과연 이 사건에는 어떤 숨겨진 진실이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책을 읽는 독자가

목격자들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화자의 입장이 되도록 설정하여

이들의 진술을 따라 이야기를 쫓고

진실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익숙하지 않은 타국, 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해

낯설게만 느껴지는 시작이었지만

사건의 발생과 이를 진술하는 목격자들과

소년 기쿠노스케의 얽힌 관계를 알게 되면서

성공으로 끝난 이 복수극의 이면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으로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유곽에서 태어난 잇파치,

무사 신분을 버린 요이치로와 긴지,

고향을 떠나 화장터 지기의 손에서 자란 호타루,

아들을 잃은 소도구 담당 규조와 그의 아내 오요네.


그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고

원래의 신분도, 사정도 제각각이다.

겉으로 볼 때는

일명 세간에서 말하는 낙오자들로 보이지만,

아픔을 겪고 좌절하면서도

'연극'에 의지해 삶을 이어나가고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홀로 외로운 복수를 결심한 기쿠노스케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한 지원군이자

든든한 위로를 안겨주는 따스한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이지 않았을까 싶다.


시대적인 배경상 이들이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극장은 지배층에게는

'악처(악한 곳)'에 불과하지만

억압과 규제 속에서 지배층에게 시달리던

평민들에게는 '꿈을 파는 공간'이자

시름을 잊게 하는 곳이기에

복수의 배경이기도 한 극장이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무사로서 살고자 두렵고 내키지 않음에도

복수를 고집하는 기쿠노스케였지만,

극장에서 만난 동료들을 통해

그들의 과거와 삶의 방식에 영향을 받고

또 고민하면서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성장담이기도 했던 이 이야기는


꼭 복수가 아니더라도

삶을 살아가며 맞이하는 다양한 위기 속에서도

주변인들의 도움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나아갈 지혜와 용기를 얻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은 울림을 주었다.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복수극을 목격했고

이를 진술하는 것처럼 보이던

목격자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쫓다 보니

과연 이 복수극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며,

기쿠노스케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고


뜻을 관철하기 힘든 고난,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을 막는 갈등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지만

그런 일들을 마냥 비웃거나 창피해하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들여 살아가는 극장 사람들의 삶과


그리고 그들의 도움과 따스한 배려 아래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따를 힘을 얻게 된

기쿠노스케의 용기 있는 선택은

진정한 의미의 성장에 다다른 것 같아

후련함과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 하나만 생각하기 쉬운 요즈음의 사회에

부족하지만 타인을 보듬고 헤아리며 도울 줄 아는

에도시대의 복수극이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목격자들의 하나같이 입을 모으던 진술처럼

훌륭한 복수였다고,

좌절을 끝내는 가장 인간다운 방법이자

성장담이 담긴 최고의 미스터리 극이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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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살지 마라 무섭도록 현명하게 살아라 - 불완전한 인간을 위한 완전한 지혜
발타사르 그라시안 지음, 김종희 옮김 / 빅피시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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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성공과 행복을 지켜나가기 위한
냉정하고도 현명한 조언들이 참 많다.

하지만 제아무리 똑똑한 머리를 가졌다 해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기에 흔들림의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될 때면
주변에 이야기하며 답을 얻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님들은
"옛말에 이런 얘기가 있는데" 하면서
어른들 말에는 틀리는 말이 하나도 없다고
척척 해답과 같은 현인들의 말을 전하곤 한다.

이 책은 400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일반인 뿐 만이 아니라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수상 처칠도 머리맡에 두고 항상
되새기곤 했다는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저서
《사람을 얻는 지혜》에 담긴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요즘 시대에 맞는 내용만을
엄선해 정리한 책이다.

처세나 성공을 위해 꿈꾸는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남은 인생을 세상이나 타인의 기준이 아닌
오직 나만의 기준에서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한
안내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정도로
400년 전의 메시지가 맞나 싶을 만큼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세상,
마땅히 성공해야 할 자가 실패하고
이길 자격이 없는 자가 승리는 작금의 상황,
또 진실한 사람은 외명당하고 아부하고
기회를 엿보는 이들일수록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현실 속 성공을 이끌어내기 위해

반드시 신중해라,
세상의 모순에 섣불리 자신을 던지지 말라,
타인의 생각을 귀담아듣되 자신의 생각은 숨기라며
인생을 살아가는 큰 지혜를 전한다.

책은 인간관계는 물론 성공과 동기부여 등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고민에 대해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하고
마음을 울리는 답을 제시하는데

1장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마라'에서는
그의 빛나는 지혜가 가장 돋보이는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을 다뤘다.

나이를 거듭할수록 순수하게 타인을 바라보던
시선은 탁해지고 이해관계나 이득을 따지며
점점 어려워만 가는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은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초년생에게도,
갈등이 많아 타인과 소통이 어려운 사람에게
와닿는 내용이 될 것 같다.

2장 '실제보다 더 큰 존재로 보이라'에서는
성공을 위한 처세법에 대해 알려준다.
그저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성공한다는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와 달리

현명함을 들키지 말고 때로는 무지한 척하기,
맡은 것 이상을 하기,
때로는 계산적인 행동하기,
일의 방향을 읽어 무의미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거나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등의
현실적인 메시지가 담겨있어 오랜 시간이 지난
현인의 메시지임에도 진부하지 않고
되려 깨어있는 시각을 배울 수 있는 장이었다.

3장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라'에서는
언젠가 올 인생의 기회를 알아보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더 나은 인생을 위한 지혜를 담았고,

4장 '아무리 긴 밤이어도 반드시 해는 뜬다'에서는
자신을 정확히 아는 법, 즉 그가 말하는
자기계발의 첫걸음이 무엇인지,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지혜를 소개하며
감정과 욕망, 유머, 긍정과 부정 등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고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5장 '세상이 인정하는 것을 비난하지 마라'
에서는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즉 현명한 대화를 위한 지혜를 담았다.

내가 아닌 타인이기에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나뉘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화할 것인지,
또 상대가 나를 바라보는 평판은
어떻게 해야 좋아지는지 통찰의 메시지가 담겨

어려운 순간, 고민의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다양한 연령대의 모든 독자들에게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하는 최고의 지혜를
안겨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지 않게 짤막한 문장으로 담백하게 담아낸
그의 메시지는 불완전한 인간을 위한
완벽한 조언이기도 하고,

실행하기 어렵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구시대적인 발상이 아니라
현대의 어느 상황에도 적용하기 좋아
이따금씩 고민이 생길 때마다 내 고민에 맞는
장을 펼쳐 답과 위안을 얻는 귀한 말이 될 것 같다.

하루에 한 문장씩 필사를 하면서 읽으면
성공에 가까이 다가가는 마음과 태도를
자연스레 익힐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자주 펼쳐 그의 지혜를 읽고 또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지만,
400년 동안 사랑받는 현인의 메시지를
나침반 삼아 그의 지혜를 익히고 잊지 않는다면
성공에 가까워지는 것은 물론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하기보다는 스스로 행복해지고
나만의 기준과 시야를 가진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더욱 든든한 마음을 들게 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해 만족하지 말고,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쫓으라'라는
뻔한 동기부여의 글이 아니라

'자신보다 빛나 보이는 사람을 가까이 두면
상대방이 주목받고 영예로울 때,
나는 그의 그림자에 가려질 뿐이니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과 같은 시험대에 서지 말고,
나보다 빛나지 않은 사람과 사귀어
평범한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라'라는
그의 메시지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읽다 보면 '성공'에만 집중해 펼쳤던
처음의 기대는 사그라들고
나만의 기준에서 스스로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한
단단한 마음 안내서를 얻어 충만한 만족감에
웃음 짓게 되었다.

바쁘고 삭막하게 성공만을 쫓는
요즘의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마음과
인생의 자세를 오래전 현인의 말을 통해
다시금 이렇게 배운다.
역시 옛 어른들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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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살인 - 폭주하는 더위는 어떻게 우리 삶을 파괴하는가
제프 구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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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도 인도 한 지역의 최고 기온이 50도를 넘어 수돗물이 끓는물 같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더이상 그냥 더운게 아니라 ‘기후위기‘가 우리를 더 살기 어렵게, 두렵게 만들고 있다는걸 깨닫고 있는데요
그동안 외면해왔을지 모를 이 문제들의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싶어요. 너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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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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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쯤 한창 가정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 '수저 판별법'이 유행했었다.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위치한 금수저는
대학 졸업이나 결혼을 전후해
부모님이 정기적인 상속을 해주고
또 법인이나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는 가정을,
은수저는 대학 졸업이나 결혼을 전후해
부모님이 주거비의 일부라도 지원해 주는 경우,
동수저는 부모님에게 대학 졸업 혹은 결혼 후
어떤 부양의 의무를 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 등급의 가장 아래를 차지하는 '흙수저'는
부모님의 부양을 취직, 심지어 결혼 후에도 하는
가정을 말한다.


내가 무슨 수저인지를 따지기도,
또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수저라는 말도 등장했는데
재미를 넘어 '가난'을 희화화하고
스스로의 가정을 비하하는 느낌에
마냥 유쾌할 수만은 없는 씁쓸한 유행이었다.


이 책은 바로 이 흙수저,
은폐되어야 할 상황이거나 모욕의 대상,
또는 불행의 상징이거나 출생과 함께 벗어날 수 없는
신분 같은 현실이 된 '가난'의 범주에 속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빈곤 대물림이나 청년 빈곤, 개근 거지 등의 말로
설명되고 있는 이 시대의 가난이
실질적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교육을 통한 계급 이동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며
일명 '개천에서 용난다'는 것은 옛말이고,
돈을 투자한 만큼 성공한다는 지금의 현실은
노동의 가치마저 하락해 깜깜하기만 하다.


경제 위기 속에 '평범한' 사람들도 힘든 요즘,
과연 흙수저의 범주에 속한 가난한 아이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꿈꾸어왔는지,
그들이 체감하는 가난과 불평등에 대해
치밀하고 깊이 있는 시각으로 바라본
10년여의 관찰기라 할 수도 있겠다.


가난을 둘러싼 겹겹의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철저히 증언하고 폭로한 이 이야기들은
가족 문제, 진로 고민, 우울증, 탈학교,
가출과 범죄, 사회 진출과 성인으로서의 자립,
청소년의 노동 경험 등 다양한 각도로
심층적인 조명을 통해 차마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또 교육과 노동, 사회복지나 정책 등의 측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고
양지로, 가난이 아닌 삶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지
날카로운 진단과 제안까지 이어졌다.


책에서는 저자가 10 년여의 시간에 걸쳐 만난
여덟 명의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조부모부터 대를 이어 내려온 우울증과
중독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소희,
성실하게 생활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으리라고 믿고 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과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모범생 영성,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말 원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선택을 주관 있게 밀고 나가는 지현,
가족의 무관심과 방임 속에서도
사색하는 시간을 통해 좋아하는 일을 찾은 연우,


어머니의 병과 빚 때문에 꿈을 포기했다가
이제야 독립하게 된 수정,
전과자라는 편견과 오해 속에서도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고 채워나가려는 현석,


'돈 좀 만지는 사장님'이 되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전념하는 우빈,
학교 밖 청소년으로 낮은 자존감을 가졌지만
이제 자기 자리를 찾고 꿈을 꾸는 혜주.


사실 이 아이들은 우리의 시야에서는
'비행 청소년'이나 '싹이 틀려먹은'
아이들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에게 관심이 없고 방임하는 부모,
그런 무관심 속에 학교 밖으로 겉돌게 된 아이들,
사랑받지 못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으로 취약해지며
어딘가로 내몰리게 된 퍽퍽한 현실과
이런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와 주변의 차가운 시선까지


과연 이들의 모습은 자신들이 초래한 결과일까?
그리고 과연 이런 '가난한 아이들'은
이제라도 성장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세상 속으로 우리 사회 속으로 나아가면 안되는 걸까?


처음에는 가슴이 답답해질 만큼
어디서부터 손을 뻗어야 할지 모르겠던
그들의 현실 앞에 내가 가진 필터로
편견을 가진 채 바라보았던 아이들의 모습은,


책을 읽을수록 안타까움은 물론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빈곤에 대한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 여러 굴레 안에서 좌충우돌하면서도
스스로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발견하는
그들의 성장이 기특하게 느껴졌고,


가난과 가족, 타인과 사회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가며 이런 '가난'의 문제가
개인의 무기력함이나 게으름을 탓하며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인해 가정과 학교, 사회 밖으로
밀어내지는 아이들을 어떻게 포용하고
감싸 안을 수 있는지 제도적인 차원에서
또 이들을 바라보는 시야의 개선이
필요하겠다는 가르침도 얻을 수 있었다.


마냥 쉽고 당연하게 느껴졌던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의 기준치가
사실은 얼마나 많은 것이 전제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부모가 학교에 차를 태워 데려다주는 것,
아이들의 진로를 지지하고 학비를 대 주는 것,
노동시장에 일찍 내몰리지 않고
꿈을 좇을 수 있는 것 등
한 사람이 성장하는 동안 자연스레 취하고,
내 몫인 양 누리고, 눈 감고 선 그은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닫고 나니
가난한 아이들과 그들의 사연을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가난한 주인공의 성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음을 잃지 않고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며,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립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픽션이기 때문이라는 걸


그들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제대로 이를 마주하고
또 받아들이며 포용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너무 많은 것이 기본값이 된 시대이다.
늘 '친구들은 다 ~하는데'라며
우리 집의 부족함을, 아쉬움을 토로하는
많은 '평범한' 가난하지 않은 아이들도,
성장의 시간을 이만큼 지나
내 몫을 하고 사회를 지탱하는 어른들에게도
꼭 필요한 독서인 것 같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동화 속 마지막 문장처럼
이제서야 스스로를 제대로 보듬고
앞으로 나아갈 마음을 가지게 된
'가난한' 아이들의 삶이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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