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키초의 복수
나가이 사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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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도시대 후기

눈 내리는 어느 겨울의 정월 그믐날,

고비키초의 극장 뒤편에서 복수가 행해졌다.


열여섯 살의 한 소년이 전통 여성 예복을 입고는

우산으로 머리를 가린 채 서 있다.

소년을 여인으로 착각한 우락부락한

한 도박꾼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소년은 덮어썼던 옷을 내던지고 신분을 밝힌다.


"나는 이노 세이자에몬의 아들 기쿠노스케.

그대 사쿠베에는 내 아버지의 원수.

여기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


그리고 뽑아든 긴 칼.

상대 역시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길 가던 사람들마저 가던 길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키며 이들의 승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소년과 사내의 진검승부가 펼쳐진다.


누가 보아도 질 것 같은 소년이었지만

마침내 소년 기쿠노스케는 사쿠베에를 베고

피가 튀어 흰옷이 새빨갛게 물든 그는

베어낸 사쿠베에의 잘린 머리를 들곤

구경꾼 사이를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일이 '고비키초의 복수'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도 2년이 지난 후,

문득 이 사건을 쫓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기쿠노스케가 사쿠베에를 벤 사건을 목격한

다섯 명의 사람을 만나 사건의 진상을 묻고

또 알 수 없게 목격자들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데…

과연 이 사건에는 어떤 숨겨진 진실이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책을 읽는 독자가

목격자들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화자의 입장이 되도록 설정하여

이들의 진술을 따라 이야기를 쫓고

진실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익숙하지 않은 타국, 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해

낯설게만 느껴지는 시작이었지만

사건의 발생과 이를 진술하는 목격자들과

소년 기쿠노스케의 얽힌 관계를 알게 되면서

성공으로 끝난 이 복수극의 이면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으로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유곽에서 태어난 잇파치,

무사 신분을 버린 요이치로와 긴지,

고향을 떠나 화장터 지기의 손에서 자란 호타루,

아들을 잃은 소도구 담당 규조와 그의 아내 오요네.


그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고

원래의 신분도, 사정도 제각각이다.

겉으로 볼 때는

일명 세간에서 말하는 낙오자들로 보이지만,

아픔을 겪고 좌절하면서도

'연극'에 의지해 삶을 이어나가고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홀로 외로운 복수를 결심한 기쿠노스케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한 지원군이자

든든한 위로를 안겨주는 따스한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이지 않았을까 싶다.


시대적인 배경상 이들이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극장은 지배층에게는

'악처(악한 곳)'에 불과하지만

억압과 규제 속에서 지배층에게 시달리던

평민들에게는 '꿈을 파는 공간'이자

시름을 잊게 하는 곳이기에

복수의 배경이기도 한 극장이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무사로서 살고자 두렵고 내키지 않음에도

복수를 고집하는 기쿠노스케였지만,

극장에서 만난 동료들을 통해

그들의 과거와 삶의 방식에 영향을 받고

또 고민하면서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성장담이기도 했던 이 이야기는


꼭 복수가 아니더라도

삶을 살아가며 맞이하는 다양한 위기 속에서도

주변인들의 도움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나아갈 지혜와 용기를 얻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은 울림을 주었다.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복수극을 목격했고

이를 진술하는 것처럼 보이던

목격자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쫓다 보니

과연 이 복수극에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며,

기쿠노스케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고


뜻을 관철하기 힘든 고난,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을 막는 갈등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지만

그런 일들을 마냥 비웃거나 창피해하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들여 살아가는 극장 사람들의 삶과


그리고 그들의 도움과 따스한 배려 아래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따를 힘을 얻게 된

기쿠노스케의 용기 있는 선택은

진정한 의미의 성장에 다다른 것 같아

후련함과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 하나만 생각하기 쉬운 요즈음의 사회에

부족하지만 타인을 보듬고 헤아리며 도울 줄 아는

에도시대의 복수극이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목격자들의 하나같이 입을 모으던 진술처럼

훌륭한 복수였다고,

좌절을 끝내는 가장 인간다운 방법이자

성장담이 담긴 최고의 미스터리 극이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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