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부메의 여름'에 뒤를 잇는 교고쿠도 시리즈, 망량의 상자입니다.
우부메 때와 마찬가지로 앞 부분에서는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살며, 형편에 어려운 사립학교를 다니는 소녀는 유일한 친구 가나코와 밤에 여행을 떠납니다.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나왔던 형사 기바는 퇴근하는 길에 한 소녀-가나코가 전철에 치여 전철이 멈추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사건을 만나고 그 때문에 첫사랑이기도 한 영화배우이자 가나코의 언니인이기도 한 미나미 기누코를 만납니다.
'나' 세키구치는 단행본을 내자는 출판사의 의뢰를 받는 자리에서 신진 환상소설가 구보를 만납니다.
구보는 상자에 집착하는 내용의 상자 속의 소녀라는 소설을 씁니다.
삼류잡지기자 도리구치는 근래 벌어지는 연쇄 토막살인사건 취재를 위해 세키구치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들은 사건 현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돌아오다 길을 잘못 들어 상자 같은 건물을 만나고 그 앞에서 기바의 도움으로 벗어나게 되죠. 발설하지 말라는 약속과 함께.
토막살인사건의 단서가 잡히지 않자 도리구치는 그 전에 조사하려 했던 상자-온바고 님을 숭배하는 종교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첫 번째 토막살인 사건, 연쇄 토막살인 사건, 가나코 살인 미수 사건, 가나코 유괴 미수 사건, 가나코 유괴 사건 등의 여러 사건들이 시간 순, 인과 관계에 상관없이 펼쳐지고,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해, 자신이 보는 시점만큼의 사건들만을 겪습니다. 그 날실, 씨실을 묶어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여전히 교고쿠도입니다.

읽어나가는 순간에는 범인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교고쿠도가 범인이 누구다라고 말해주기 전부터 그 범인은 너무 뻔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누구냐보다는 그 사건이 왜, 무슨 순서로,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가 더 궁금하죠. 그리고 결국 나타난 그림은 예상보다 더 음침합니다.


여전히 교고쿠도의 장광설은 읽기 괴롭고, 동의할 수 없는 면도 많지만, 그럼에도 대단하게 느껴지죠. 이 작가의 책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을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하기 위해서일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면에서는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 작가가 하는 말은 수다보다는 설교에 가깝습니다.)

이 책은 요괴를 빌어, 인간의 이야기를 합니다.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우부메는 나오지 않았다시피 이 책에서도 망량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망량이란, 요괴가 아니라, 어느 순간 유혹받는 선 너머의 무언가입니다. 평범하게 살 수도 있던 남자가 토막살인을 저지르고, 평범하게 살아온 남자가 사랑하는 소녀의 육체의 일부를 들고 도망가게 하는, 가장 친한 친구의 등을 떠밀어 버리게 하는 선 너머지만 일상에 가깝게 붙어있는 그 무언가.

책 안에서 나오다시피 범죄에서 동기는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상상 속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고, 충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실제, 실행하기 위해선 그에 맡는 상황이 필요한 거죠. 동기는 이미 벌어진 범죄를 일상에서 분리해내, 자신과 상관없는 세계로 밀어넣는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핑계라는 것,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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